로마서 영적 계시

로마서 (8:12-13) 육신에 빚진 자 /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2024. 5. 28. 01:22

롬 8:12-13

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육신에게 진다는 것은, 육신에 빚을 졌다는 말이며, 육신을 주관하는 사단의 종으로 죄의 종으로 산다는 뜻이다. 죄가 주관하는 육신은 바울이 지적한 봐와 같이 열린 무덤처럼 죄가 목구멍까지 차고 넘친 상태이며, 그 열린 무덤에서 쏘다져 나오는 것은 오로지 추악한 죄악뿐이다(롬 3:13-18). 성도의 옛 사람은 사단에게 속하여 죄의 종으로 육신의 탐심과 정욕을 따라 살아온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으며”,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이다(엡 2:1).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2-3). “그러므로”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는다’(12-13절)라고 육신의 실체가 바로 죄와 사망임을 확실히 밝힌다. 육신의 빚은 육신이 죽어야 만이 갚은 사망의 빚이기에 육신으로 살면 영원한 사망으로 다시 살길이 없다는 말씀이다. 인간의 육신은 곧 죽음으로 끝나는 썩은 시체이기에, 그 몸 안에는 온갖 탐심과 방탕과 음란과 외식과 불법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와 온갖 더러운 것들로 가득함으로(막 7:21~23, 마 23:25-30),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하나님과 원수가 되며,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8: 6-8)라고 바울은 육신의 실체를 투철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바울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 땅의 모든 육체는 그 존재 자체가 바로 죄악이며 때문에 육신의 생각이나 생산하는 것이란 질려와 형극이요 가시와 엉겅퀴로 스스로 멸망을 자초함으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는다, “허물과 죄로 죽었다”,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다”라고 반복하여 육신의 실체가 곧 사망임을 선언한다. 즉 육신은 죄의 종으로 죄가 원하는 탐심과 정욕과 욕망을 이루어 하나님을 대적하며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일으켜 죽음을 자초함으로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라고 말한다. 이는 창세기 2:17에서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에게 선포하신 말씀과 동일하다.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즉 육신대로 행하면 반드시 죽는다는 말씀이다. 바울은 오직 영만이 생명임을 강조하여 성도의 겉사람 (몸)과 속사람 (영)을 구별하여 말한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8:1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요 6:63)라는 예수님의 동일한 말씀대로 육신에 속한 자는 죄의 대가로 목숨이 끊어지면 육도 사라져 ‘없음’이 됨으로 무익하다. 즉 이 땅의 흙으로 육신을 입은 목숨은 무익하고 허사이며 사망으로 정해 놓으셨기에, 육신에서 나오는 모든 것들은 죽은 행위이며, 때문에 육신의 행위로서는 의롭다할 자가 없다고 선언한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갈 3:10-11)함과 같이 오직 믿음으로 사는 자만이 의롭다 여김을 받으며, 오직 믿음으로 사는 영으로써만이 몸의 행실을 죽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만약 바울의 이 말씀을 은혜와 믿음의 원리로 영의 계시로 읽어내지 못한다면 다시 율법주의 행위와 성화로 빠지게 된다. 성도는 이미 죄와 율법의 영역에 대하여는 죽었으며,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영의 영역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하나님의 영이 성도 안에 거하심으로 영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한 자들이며, 때문에 성령이 성도 안에서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여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로 만들어 내시는 성도의 지향성을 제시한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영으로 탄생한 흠도 점도 없는 영의 자녀로 영원한 생명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죄로 타락한 이 땅의 것을 추구하는 이 땅에 속한 육체는 반드시 ‘죽음’을 통과하여야 하며, 그 죽음을 육신이 사는 동안 성령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성령님의 사역이기에 영으로써만이 가능함을 제시한다. 오로지 나만을 위해 살던 육적 ‘자아’가 죽어야만이 하나님의 영적 자녀로 잉태되어 영원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바울은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8:13-14)라고 영적 원리로 말씀해주고 있다.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육신에 속한 것들은 반드시 뽑히고 파괴되며 결국은 죽음으로 ‘없음’이 된다

피조 된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속한 육신의 모든 것들은 반드시 뽑히고 파괴되고 파멸되며 결국은 죽음이다는 것을 성경은 반복하여 제시한다.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이기에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나서는 죽음 그 자체임을 늙고 썩어서 죽고, 태어나기도 전에 죽고, 태어나자마자 죽고, 젊어서도 죽는 ‘죽음’을 매일 눈으로 지켜보면서 이 역사 자체가 바로 죽음의 파멸임을 체험하게 하신다. 그리하여 지혜 전도자는 해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은 헛되고 헛된 ‘공허’이며, 오직 해 위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만이 영존하다고 선언한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 민족과 나라, 산천초목을 비릇한 만물은 동일한 원리로 생성(生成)과 멸망의 법칙으로 돌아가고 있다. 만물의 존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내용으로 품고 계시하고 있으며, 때문에 하나님의 섭리와 말씀에 의해 경륜되고 있음으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은 뽑히고 파괴되고 멸망함과 동시에 새롭게 탄생하여 심어지고 세워지는 하나님의 법칙으로 운용되고 있다. 그 어떤 것도 우연적이거나 우발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 피조물 자체의 의도로 일어나는 일은 없다. 뜻이 없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에 내용이 없는 현상은 없으며, 하늘나라 실상을 계시하기 위해 잠깐 있는 모형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보이는 물리적 세계는 뽑으며 넘어뜨리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다시 심고 건설하며, 또 다시 뽑히고 멸망되는 과정을 반복하심으로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만이 영존하시며 영생이심을 끊임없이 제시해 주고 있다.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렘1:10).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뿌릴 날이 이르리니 깨어서 그들을 뿌리 뽑으며 무너뜨리며 전복하며 멸망시키며 괴롭게 하던 것과 같이 내가 깨어서 그들을 세우며 심으리라”(렘 31:27-28).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이스라엘과 유다족속도 “뽑고 무너뜨리며 전복하며 멸망시키고 괴롭게 하시며”, 하지만 이는 썩지 않는 영원한 생명의 씨를 심어주셔서 당신의 영원한 나라를 세우시기 위한 선한 섭리와 의도이시며 구속의 은혜임을 확실히 제시해 주신다.

똑 같은 원리로 하나님은 이 땅에서 난 육신과 그 육신에서 나오는 온갖 불의와 죄악들을 뽑아버리고 파괴하고 파멸하고 넘어뜨리는 ‘죽음’으로 정하시고, 당신의 거룩하신 영으로 영원히 썩지 않는 새 생명의 창조를 일으키신다. 이 땅에서 난 육신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 하늘나라 진리를 생명으로 읽어낼 수도 인식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이 땅의 것만을 인식하고 추구하고 쟁취하는 죄의 종이 되어 끝없는 탐심과 욕망과 정욕으로 극도로 타락하여 파멸을 자초하며 스스로 자신들이 들어갈 사망의 구덩이를 파고 있다. 즉 육신은 ‘허물과 죄로 죽은’(엡 2:1) 시체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셔서 인간의 육신의 죄를 몽땅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죄를 뒤집어쓰신 육신이 죽음으로 도륙 당함으로, 죄로 얼룩진 육체는 예수와 함께 저주의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고, 점도 흠도 없으신 그리스도의 영으로 새 생명의 창조를 일으키시는 성령의 법을 세워주셨다.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히 10: 9-10).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갈 2:19).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으로 거듭난 성도는 이제 죽은 육신을 위해 사는 자가 아니다

성도는 육신으로는 죄와 율법에 대하여는 죽은 자이다(롬 6:2,11, 7:4). 그 ‘죽음’을 육신이 잠깐 사는 동안 날마다 겪게 하신다. 그리하여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라고 육신의 자아가 죽는 자기부인과 자기죽음의 십자가 삶을 성령님이 성도 안에서 일으키고 계심을, 즉 영이 살기위해 육이 죽는 삶을 날마다 체험하게 되는 두 영이 공존하는 곤고함을 제시한다(롬 7장). 성도는 하나님의 영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잉태된 영적 자녀이다는 영광스러운 신분을 지니고 하늘나라 삶에 합당한 거룩한 백성으로 하나님의 손에서 다듬어가는 성령님의 강권적인 간섭과 훈련을 이 세상에서 육이 잠깐 사는 동안 겪게 하신다. 성령이 성도 안에서 모든 삶을 주관하여 더는 육신의 탐심과 욕망과 정욕을 좇아 죄의 종이 되어 지옥의 사망에 떨어지지 않도록 굳게 붙들어 주시며, 진리의 말씀, 영생의 말씀을 일용할 양식으로 먹이신다. 이르시기를,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요 6:27), 그 생명의 말씀이 내 안에서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며’(히 4:12), 육신을 쳐서 ‘자아’를 뽑고, 파괴하고, 무너뜨리고, 파멸하는 자기부인과 자기죽음의 십자가를 날마다 지고 주님을 좇아가게 하시며(눅 9:23), 믿음으로 사는 영의 사람으로 세우시고 성장시키는 영적 훈련을 육이 사는 동안 반드시 이루어내심을 우리 믿음의 선지들의 삶으로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구약에서 수시로 실수하는 아브라함, 오로지 자기 유익만을 챙기는 이기적인 야곱, 격한 성격으로 분노를 참지 못해 사람을 죽인 모세, 신약에서 예수님을 배신하고 뿔뿔이 도망하여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제자들, 비방자, 난폭한자, 폭행자, 사기 등등하여 예수를 박해하던 사도 바울, 모두가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겸손한 자로, 온유한 자로, 긍휼한 자로, 인내와 사랑으로 그리스도의 성품을 보여주는 믿음의 본으로 다듬어지고 세워진 것이다. 그 과정을 이 세상에서 육신으로 겪어내게 됨으로 온갖 고난과 고통이 따르게 되며, 그리하여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성도에게는 도살당하는 양으로 체험됨으로 바울은 성도의 십자가 삶을 한마디로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롬 8:36, 시 44:22)라고 매일 죽임을 당케 된다는 성도의 신앙여정을 리얼하게 말해주고 있다. 왜냐하면, 성도는 이제 육과 영이 공존하여 서로 대적하고 서로 배척하는 영적 싸움으로 갈등과 좌절과 절망과 곤고함을 매일 체험하기 때문이다. 그 환난과 자아죽음을 통하여 성도는 육신의 불가능함과 무능함과 무지함과 어리석음을 철저하게 뼈저리게 인식하고 깨닫게 됨으로, ‘죄인중의 괴수가 바로 나이다’는 육의 현실을 올바로 인식하게 됨으로,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만을 굳게 붙들게 되며,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게 되며, 오로지 십자가 의만을 믿고 복음을 전파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굳건히 세워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열심과 사랑에 항복하여 다시는 선악과를 따 먹지 않는 자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 위대하신 사랑과 전능과 은혜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성도는 바울과 같이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찬송과 감사와 기쁨이 터져 나오는 아들로 다듬어가는 것이다.

 

바울의 신앙고백과 같이 나의 나 된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떠나서는 한시도 살수 없다는 것을 성령님이 내 안에서 깨우쳐주시고, 가르치고, 깨닫게 하심으로, 매일의 일상에서 느끼고, 깨닫고, 체험함으로 다시는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자로, 그 무엇으로도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수 없다는 참된 고백으로 믿음에 서게 하시며, 그 어떠한 환경과 상황속에서도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다’는 고백 하나로 다윗과 바울과 같이 매일 하나님만을 찬송하며, 내가 받은 은혜가 차고 넘침으로 십자가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감사하며 내적 평강을 누리는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영으로 사는 믿음의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손에서 다듬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성도가 도달하게 되는 성화이다.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사랑하며, 오직 하나님 한분만을 찬송하는 진정으로 하나님과 마음이 합한 자로 자신이 죽고 오직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순종과 믿음이 바로 성화이다. 그렇게 오로지 하나님 한분만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자가 바로 온전케 된 자이며, 그 어떠한 핍박과 박해와 유혹과 죽음으로도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는 히브리서 11장에서 나오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 주신다. 성령님이 성도를 강권적으로 붙들어 주시고 지켜주시기 때문에, 죽음으로도 성도의 믿음의 신앙을 꺾을 수가 없음으로 죄와 사망이 성도를 주장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롬 6: 8-9, 14). 그리하여 영으로 사는 자는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일 수 있다’고 말하며, 이는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으로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영의 사람으로 성령님이 내 안에서 다듬어 주시기 때문이다. 내 육신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의로운 인도와 말씀에 불순종하는 실수를 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사랑과 긍휼과 자비와 인내와 용서와 온유로 나를 품에 안고 다듬어주시는 그 위대하신 능력과 사랑과 은혜에 굴복하여 순종으로 자기부인의 십자가 삶을 지향하게 하신다.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몸의 행실이란? 인간은 아담의 타락을 시점으로하여 사단의 종이 되어 육신이 원하는 탐심과 욕망을 따라 거침없이 끊임없이 죄를 찾아 헤매며 행하고 즐기는 온갖 불의로 스스로 자신을 파멸하고 있다. 바울은 이와 같이 육이 원하는 대로 행하는 그 행악이 바로 파멸과 사망을 자초하는 심판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을 “육에 속한 사람”(고전 2:14), “육신”(롬 8:6), ”몸의 행실”(8:13)이라고 부른다. “몸의 행실”에 대하여 바울은 로마서 3장과 갈 5: 17-21에서 투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모든 인간은 거짓된 존재이며, 죄의 종이 되었기에 선을 알 수도 깨닫는 자도 행하는 자도 없다. 인간은 양심을 주어도, 율법 말씀을 주어도, 죄를 짓는 철저한 완벽한 죄인이기에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들은 악일뿐 선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없다고 말한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롬3:13-18). 그러므로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갈 5:17-21). 인간의 몸 안에는 온갖 탐심과 방탕과 음란과 외식과 불법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와 온갖 더러운 것들로 가득하다(막 7:21~23, 마 23:25-30)고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영이 죽어있는 “몸의 행실”이다.

죄는 오직 십자가 피로만이 죽일 수 있으며, 믿음으로만이 가능한 영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첫째, 인간은 그 자체가 전적으로 타락하여 그 마음이 악함으로 바울은 육신의 ‘행실’에 죽음을 선포하기 보다는 근본 뿌리인 마음의 ‘생각’에 사망을 선포한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8:6-7)라고 인간의 마음 자체를 사망이라고 선언한다. 즉 인간 마음 자체가 악하기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 죄를 죽이는 행위를 할 수가 없다. 오히려 바리새인들과 같이 외식된 행위로 더 교활하게 죄를 덮어 감추는 독사가 되어 스스로 진노의 심판을 자초한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33). 죄는 오직 점도 흠도 없으신 의인이시며 구원자이시며 거룩하신 하늘의 왕이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만 죽일 수 있으며, 이는 창세전부터 아버지께서 정하신 뜻이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의 공로를 의지하고 믿는 믿음으로만이 죄와 사망에서 벗어날 수가 있으며, 오직 그리스도의 영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잉태된 자만이 의롭다 여김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이 됨을 확실히 제시한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8:14), 즉 하나님의 영으로 잉태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반드시 영의 인도로 하나님의 아들에 합당한 자로 만들어내심으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는 은혜의 특권을 누리게 된다(8:15).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희생제물이 되셔서 육신의 죽음으로 우리 육신의 모든 죄를 몽땅 죽이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으로 거듭난 자는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즉 내가 하는 육신의 일이 아니라, 내 안에서 성령님이 이루어 가시는 영에서 일어나는 영적 싸움(롬 7장)을 겪게 됨을 제시하여 오직 “영으로써만이 죽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둘째, 예수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의로운 뜻에 순종하여 희생제물로 자신을 드린 그 믿음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셨고 우리를 구원하셨으며, 때문에 오직 십자가 구원의 의를 믿는 믿음으로만이 죄에서 해방 받아 하나님의 영으로 영화로운 아들로 탄생하여 의롭다여김을 받는다(롬 3:24-28)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죄를 죽이고, 죄를 도말하시는 분은 오직 한분 예수그리스도이시며, 육신의 죽음으로 성취하여 주셨으며,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의 의를 믿는 믿음으로만이 죄가 사하여지고 도말되는 복음을 제시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8:1-2).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는 말씀은 행실의 성화를 강조하는 구절로 갖다 쓰는 것이 아니며, 또한 그렇다하여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성령이 내 안에서 모든 것을 해준다는 방종도 아니며, 그렇게 말하는 자는 하나님의 그 위대하신 조건 없는 압도적인 사랑과 구원의 은혜를 마음에 간직하지 못한 자이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앞에서 여러번 설명해 주고 있다. 바울은 이 구절에서 몸의 행실을 죽이는 주체는 인간에게서 나오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의 사역임을 분명하게 제시하여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인다”고 말한다. 즉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거룩한 아들로 삼으셔서 “아버 아버지”라고 부르짖게 하셨기에, 그분은 영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당신의 거룩한 성품에 합당한 영광스러운 아들로 빚어 가시며 다듬어 가시며 세워주시는데 온 심혈을 다하신다.

셋째, 바울은 7장에서 거듭난 성도에게 직면한 죄의 문제를 제시한다. 성도는 하나님의 영이시며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하여 의롭다 칭함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이 된 신분을 가지고 있다. 하늘에 시민권을 지니고 있는 성도는 영으로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요 육신으로는 여전히 이 세상 죄에 묶여 있는 두 법이 공존함으로(7:21), 영과 육이 서로 원수가 되어 싸우지만 몸이 죽지 않는 한 육과 영이 분리가 될 수 없음으로 부등켜안고 씨름을 하게 되는 갈등과 좌절과 절망의 현실을 그대로 경험하게 됨을 제시한다. 바울의 고백과 같이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함으로”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7:18-19) 처절한 실망과 절망과 무력함을 외치고 있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7:23-24)함과 같이 육신으로는 절대로 몸의 행실, 죄를 죽일 수가 없다. 그리하여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친히 육신을 입고 인간의 육신의 모든 죄를 자신에게 전가시키시고 그 죄를 짊어지신 육신이 십자가에서 죽는 죽음으로 죄를 몽땅 죽이셨다. 즉 죄는 오직 육신이 죽어야만이 해결됨을 제시하셨다. 그리하여 바울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때 홀로 죽으시지 아니하시고 죄인 우리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부활하였다고 말한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 6:3-8). 그러므로 성도는 이제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사는 영적 존재가 되었으며, 영으로 사는 성도는 영으로써 육신이 사는 동안 육신의 행실이 뽑히고, 파괴되고, 파멸되고, 자아가 죽는 십자가 삶으로 성령님의 강권적인 간섭과 인도를 받게 됨을 제시한다.

육신의 성화를 주장하는 자는 십자가 구원의 은혜를 망령되게 하는 자이다

성도가 영으로 거듭났다고 하여, 의롭다 여김을 받았다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된 하늘나라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육신이 죄 없는 의인으로 바꾸어지거나 또는 육신이 성화로 이룰 수 있다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것을 율법을 받은 구약 역사가 증명하며, 또한 신약에서 의인이라 자칭하는 유대 율법주의 바리새인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죄악을 통하여 증거하고 있다. 율법의 말씀을 받은 이스라엘은 4000여년의 역사에서 율법을 지켜 행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거룩한 백성으로 성화된 것이 아니라, 율법아래 있는 구약 전체가 하나님께서 더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하고 패역하여 심판받아 마땅한 백성으로 막이 내렸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자신의 의와 영광과 선과 하늘나라 영생을 드러내시기 위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며”(갈 3:22),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셨다”(롬 7:13). 이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롬11:32)라고 정확하게 제시해 주고 있다. 즉 육신을 죄 아래와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시고, 율법을 주셔서 죄로 심히 죄 되게 하심으로, 모든 인간을 하나님의 심판 아래 가두어 두셨다는 말씀이다.

그렇게 하심으로:

첫째,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의 타락과 패역함을 통하여 육신의 실체를 완전히 드러내심으로 이 땅에 속한 육체로는 하나님을 알 수도, 하나님의 선하신 율법 말씀을 지킬 수도 없음으로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 아래 놓여있는 절망적인 상태라는 것을 완전히 드러내어 보여주시기 위함이셨다. 그러므로 율법의 기능은 죄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며 스스로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육신의 불가능함과 무익함을 인식하게 하심으로 그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주실 구원자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하는 역할이었다. 즉 율법은 우리에게 무엇이 죄인지를 깨닫게 하여 자신이 죄인이라는 정체성을 확실하게 인식하게 함으로 그 죄와 사망에서 벗어나고자하는 간절한 소망을 가지게 하시며, 그 갈망과 소망이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께로 인도하신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갈 3:24-26).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희생제물이 되어 율법의 요구를 몽땅 이루어 주셔서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믿음의 법을 세워주시기 위함이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홀로 이루시는 독립적인 주권이며, 아무런 조건도 대가도 없이 인간에게 베풀어주시는 아가페 사랑이시며, 궁휼의 은혜이시며,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그분의 영광을 온 세상에 나타내시기 위해 우리를 구원의 대상으로 은혜를 입혀주시고 생명을 입혀주시는 아버지로 남편으로 자신을 제시하셨다.

둘째, 그러므로 성도는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시기 위해 자신의 독생자 예수를 희생 제물로 내어주신 그 위대하신 은혜와 그 압도적인 사랑을 알아가며, 마음에 간직하며, 매순간마다 체험하게 하시는 그 한없는 은혜에 감사하며, 기뻐하며, 마음을 다하여 나를 그토록 사랑하시는 아버지를 사랑하며, 그분의 영광을 찬송하며, 천하에 알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끊임없이 외친 것이다. 이르기를, “배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품기운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 품을 것이요 구하여 내리라”(사 46:3-4).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 2:7). 너를 불쌍히 여기는 애정이 나의 속에서 불길처럼 강하게 치솟아 오르는구나…”(호 11:8). 그분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마음은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신 그 마음을 알기를 원하시며 오직 그분 한분만을 바라보고 믿는 절대적 의존자로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바울의 고백과 같이, 그 무엇으로도 끊을수 없는 압도적인 사랑 앞에서 행위의 성화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노년이 되어서도 변하지 않는 육신의 실체를 꿰뚫어 보게 됨으로, 나같은 죄인을 살려주신 그 은혜가 너무나 감당치 못함으로, “나는 죄인 중의 괴수이다”, “나의 나 된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이다”라는 신앙 고백이 터져 나오게 되는 것이다. 한없이 부어주시는 은혜와 나 같은 죄인을 끊임없이 사랑하여 주시는 그 압도적인 아가페 사랑에 항복하여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는 자기부인의 십자가 삶으로 이끌려 가는 것이며, ‘은혜가 아니면 도저히 살아갈 수없는’, 단 한순간도 숨을 쉴 수없는 그 생명의 은혜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하나임을 온전히 아는 것이 성화이다. 성도가 구할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이며, 그 사랑과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의 모든 주권에 순종하기를 소망하는 믿음이다. 오직 그 믿음으로 성령님이 내 안에서 거룩한 하늘나라 백성에 합당한 열매를 하나씩 맺어주시는 것이며, 이는 육신의 행위로 맺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내 안에서 맺어주셔서 밖으로 나타나 보이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눈에 나타나 보이지 않는 씨중 가장 작은 씨 한 알을 영생을 사는 천국으로(마 13:31-32), 믿음의 본질로 표현하여 주셨다. 첫째, 천국은 이 세상 가치관으로 인식되는 육신의 노력과 열심으로 권세와 힘으로 재물과 업적으로 쟁취되는 나라가 아니다. 그 나라는 오직 겨자씨 한 알과 같이 나타나 보이지 않는 없음의 자리로 내려간 자기 부인의 삶을 지향하는 성도들에게만 허락된 태초부터 성도 안에 심겨 놓으신 천국의 씨앗이며, 그 작은 씨앗은 성령님이 내 안에 뚫고 들어오셔야만이 생명이 잉태되고 확장되어 믿음으로 천국이 내 안에서 이루어짐을 말씀하신다.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며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마 13:32). 둘째, 가장 작은 씨인 겨자씨를 믿음으로 말씀하신 것은, 너회에게 요구되는 것은 태산과 같은 무엇인가를 할수 있다는 능력을 구하는 세속적인 믿음이 아니라, 반대로 겨자씨와 같은 존재로 “없음”으로 자기부인으로 내려가는 순종의 삶으로 이끌려감을 계시하신다. 그렇게 겨자씨와 같은 없음의 자리로 내려갈 때 하나님의 믿음으로 너희 안에 견고하게 쌓여있는 ‘자아’라는 산이 바다에 던져지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말씀이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거듭난 성도 안에는 성령의 법이 성도의 영을 주관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새로운 창조를 일으키고 있기 때문에, 그동안 육신을 지배하던 죄가 더욱 기세를 부려 온갖 간교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육체의 욕망으로 성령을 거스리고 대적하게 함으로 영이 원하는 일을 하지 못하게 한다고 (갈 5:17, 롬7:18-19)고 말하고 있다.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할수록 악한 것이 더 드세게 유혹과 욕망의 늪으로 끌고 감을 체험하게 된다. 항상 마귀에게 지는 것 같고,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자신을 미워하게 되며, 항상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죄책감으로 매일 자신을 정죄하는 회개에 묶어 있게 된다. 의인답게 살지 못하는 육을 한탄하며, 육을 억제하거나 학대하는 등 자해하는 방법으로 죄의 본능을 떨쳐버리려고 무척이나 애를 쓴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함으로”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롬 7:18-19), 분명히 무서운 죄의 본능과 성향이 잠재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나의 타락한 육신을 부인할 수도, 바꿀 수도, 노력과 행위로 죄를 죽일 수없다는 것을 처절하게 깨닫게 됨으로, 은혜가 아니면 단 한순간도 온전한 마음으로 살수 없다는 고백이 터져 나오게 된다. 때문에 처음부터 육신을 뜯어고치거나 의로운 행위를 요구하지 않으시고, 인간의 노력과 행위를 모두 배제하여 홀로 독립적으로 구원을 성취하여 주시는데 죄는 육신이 죽는 죽음으로 죽이셨다.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이라는 방법으로 구원을 선물로 주시기로 창세전부터 정해 놓으셨으며, 그리스도 예수의 육신의 죽으심으로 성취하셨으며, 성령의 사역을 통하여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는 새 생명의 창조를 일으키신다. 그리하여 바울은 인간의 노력과 행위의 의로움으로 죄를 죽이는 것이 아니기에, 육신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었음으로 죽은 육신을 위해 사는 자가 아니라, 영으로 하늘나라 백성에 합당한 삶을 사는 성도의 지향성을 제시한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육신이 잠깐 사는 동안 열심히 노력하여 공로와 업적을 이루는 성공도 아니고, 육신의 의로움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는 행위의 성화에 도달하는 것도 아니다. 성도는 인생의 역경 속에서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아무리 진실하게 살아도, 아무리 믿음으로 살려고 몸부림쳐도 바뀌어지지 않는 그 삶의 현실에 부딪치면서 경험되는 것은 실패, 좌절, 서러움, 막막함, 절망, 눈물과 초라한 탄식이다. 이와 같은 환난의 고통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궁휼과 자비와 인내와 온유하신 그 놀라운 은혜를 날마다 체험하는 삶 그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영광만이 오롯이 드려나는 재료가 되는 것이며, 그럼에도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붙들어주시는 이는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의 능력임을 깨닫는 것이 바로 성화이다. 욥의 고난에서 보여주신 것과 같이, 때로는 벌과 저주를 받은 듯한 완전한 절망으로 잿더미에 앉아 ‘의롭다’고 자칭하며 존귀하게 여기던 몸이 하나님의 은혜의 손에서 벗어나게 될 때 순식간에 썩은 시체로 변하는 몸둥아리를 바라보면서 육신을 의지하면서 살아온 그 인생의 허무함과 추악함과 ‘없음’으로 귀결되는 ‘흙’ 그 자체임을 처절하게 경험하고 깨닫고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살아감을 깨닫는 것이다. 바울의 고백과 같이 나의 나된 것은 행위도 아니요 율법지킴도 아니요, 오로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다듬어가고 빚어가는 “은혜”뿐이다(고전 15:10). 바울은 자신이 입은 은혜가 헛되지 않게 그 누구보다도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그 열심과 수고는 자신의 육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직 바울과 함께 하신 성령님의 능력과 사역이며, 바울이 받은 은혜가 헛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친히 굳게 붙들고 다듬어 주셨기 때문임을 고백한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그렇게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앞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끝까지 경주해가는 그 길이 바로 성화의 자리로 가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