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영적 계시

로마서 (8: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2024. 4. 27. 04:38

롬 8:12

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그러므로” : 바울은 앞에서 이제 그리스도의 영으로 잉태된 하늘나라 성도는 영적 존재로 영의 것을 추구하며 온전한 몸의 부활을 소망하면서 살아가는 거룩함을 입은 성도임을 제시하고,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실제의 삶을 제시한다. 바울이 첫 번째로 제시한 삶은 바로 은혜에 빚진 자로 살아가는 성도의 정체성이다. 바울은 내 옛사람은 육신으로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지금 살고 있는 생명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잉태된 새로운 생명이며,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그 어떤 대가도 조건도 없이 오직 창세전 사랑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았다는(엡 1:4) 그 사랑의 은혜로 얻은 생명이며, 이를 ‘빚진 자’ 라고 말한다. 육신에 묶여서 죄의 종으로 살던 자가 예수그리스도 십자가 구원을 믿음으로 죄의 종노릇과 사망에서 완전히 해방 받았다(6:18, 8:2).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그 죗값이 치러졌으므로, 그리스도의 영, 성령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그리스도에게 속한 영적 존재로 거듭났으며, “그러므로” 다시는 죄의 종이 되어 육신을 따라 살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선언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12절).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6:14). 우리는 이제 ‘율법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자가 되었다’(갈 2:19). 반대로 육신에게 빚을 진 자는 죄의 종으로 사는 자이며 그 결국은 사망임을 제시한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13절).

바울이 말하는 “빚진 자”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첫째, 성도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은혜에 빚진 자로 태어났다

구원의 은혜가 바로 ‘빚’이다. 나의 본체는 허물과 죄로 “사망”을 선고받은 죽은 존재이다(엡 2:1). 죽은 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내가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엡 1:4-5)는 놀라운 은혜를 입었다. 구원의 은혜는 내가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나를 당신의 자녀로 택하셨다는 하나님의 자발적인 사랑의 열정이며, 때문에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에 빚진 자이다. 세상을 창조하시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셨고, 우리를 당신의 거룩한 자녀로 예정하셨다. 이는 아무런 조건도 대가도 없이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아들들이 되게 하셔서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며’(엡 1:4-7) 전파하는 자로 살아가는 존재로 예정하셨다는 놀라운 은혜의 선택이다. 창세전부터 삼위일체 하나님의 원대한 섭리와 예정으로 은혜의 빚진 자로 태어났기에 하나님을 떠나서는 절대로 살수 없는 하나님의 절대적 의존자로 오직 은혜 안에서만 살아갈 수 있도록 정하셨다는 말씀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은혜의 빚진 자’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은혜에 빚진 자로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는 태어난 것, 살이 존재하는 것, 숨을 쉬는 것, 지금까지 붙들고 계시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인간의 그 어떤 것도 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그분이 입혀주신 은혜를 갚을 길이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밝히기 위해, “우리가 빚진 자”라고 성도의 정체성을 은혜의 빚으로 제시한다. 성도는 이제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아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가 되었으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그러므로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에게 속한 몸을 더럽히는 죄 가운데서 더는 살수 없다고 말한다.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지체이며’(고후 6:19-20), ‘그러므로 너희 지체를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라’(롬 6:13). 성도는 이제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에 합당한 거룩한 삶을 살도록 ‘하나님의 영’ 즉 성령님의 인도와 간섭을 받게 됨으로 이제는 더는 육신대로 육신의 원하는 삶을 살 수가 없다는 말씀이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롬 8:6)이기 때문이다. 즉 성도는 영적 존재로 영의 영역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과,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죄와 율법의 영역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사실과, 그러므로 성도는 육신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영으로 육의 행실을 죽이는 거룩한 백성으로 지어져가는 삶을 추구하게 되는 지향성을 제시한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8:13-14). 이것이 은혜에 빚진 자로 거룩한 삶으로 인도를 받는 성도의 지향성이며 정체성이다.

둘째, 은혜의 빚으로 태어난 자는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알고 기억하고 마음에 새기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입혀주신 의도는, 하나님의 은혜의 품 안에서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보고, 기억하고, 섬기고, 사랑하며, 그분의 영광과 거룩하신 이름을 자랑하며 드러내며 천하에 알리기를 원하신다. 구약 전체에서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실 때 가장 많이 외친 구절이 바로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나는 여호와라”이다. 에스겔서에서만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라는 구절이 70회 이상이나 나온다. 하나님은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심으로 이스라엘이 대대손손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하나님만을 섬기기를 원하셨다. “야곱 집이여 이스라엘 집의 남은 모든 자여 나를 들을 찌어다 배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품기운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 품을 것이요 구하여 내리라”(사 46:3-4). 이것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애타는 마음이다.

이스라엘을 애급의 종살이에서 구원하여 주셨으며, 홍해를 가르고 광야로 인도하여 만나와 메추라기와 반석에서 물을 내셔서 먹이셨으며, 구름과 불기둥으로 그들을 지켜주시고 인도하셨으며, 친히 이스라엘을 위해 싸워주셔서 약속의 땅으로 들여보내 주셨다. 그렇게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켜주시는 아버지가 되시며 남편이 되셔서 긍휼과 자비와 인내와 용서와 사랑으로 품에 안고 함께 하시는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 이신 줄 알고, 기억하고, 새기며, 오직 하나님 한부만을 바라보며, 마음과 뜻을 다하여 사랑하기를 원하셨다. 이르기를, “나는 인정의 끈과 사랑의 띠로 그들을 묶어서 업고 다녔으며, 그들의 목에서 멍에를 벗기고 가슴을 헤쳐 젖을 물렸다“(호 11:4). 그렇게 사랑하여 구원하여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알고 기억하고 바라보라고 수시로 선지자들을 보내주셔서 이스라엘에게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라고 외쳐주신 것이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수시로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얼굴을 돌려 이방인들이 섬기는 허수아비에게 절하며 섬기는 패역망덕한 백성으로 하나님을 버린 것이다.

 

에스겔 8장에서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이스라엘의 극악한 우상숭배를 보여주셨다.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장로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선택된 제사장까지도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으며, 비밀스러운 방의 사면 벽에 각양 곤충과 가증한 짐승과 우상을 그려 놓고 숭배한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의 거룩한 성소에서도 등을 돌려 동쪽을 향해 태양에게 예배하는(겔 8:16) 어리석기 짝이 없는 가증한 행위로 하나님을 멸시하며 부인하는 우상숭배로 완전히 패역 되어 있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나는 너희 남편임이니라”(렘 3:14),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라고 수없이 외쳤고, 심판을 경고하기도 하셨지만, 그들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멸시하며, 끊임없이 베풀어주신 은혜를 기억하지도,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지도 않았고, 하나님께 등을 돌려 눈은 이방 신들에게, 머리와 무릎은 허수아비를 향해 절하고 굽히는 배신과 배역으로 스스로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사 1:3)”. “슬프다 범죄 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해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사 1:4). “그들이 나를 버렸도다” (렘 2:13)라고 한탄하셨다.

그렇게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과 끊임없이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빚’으로 여기지 못하고 수시로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에게 징계를 내리셔서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인 줄을 알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기를 원하셨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선지자들의 외침과 경고를 무시한 이스라엘은 마침내 나라가 망하고 성전이 약탈당하고 백성이 죽어나가고 노예로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심판을 자초한 것이다. 예루살렘 함락을 통해 하나님께서 내리셨던 재앙의 선포가 바로 “그때에야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겔 6:10), “너희가 죽임을 당하여 엎드러지게 하여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게 하려 함이라”(겔 6:7)이다. 즉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다시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기를 원하셔서 재앙을 내리셨다는 말씀이다. “내가 내 손을 그들의 위에 펴서 그가 사는 온 땅 곧 광야에서부터 디보라까지 황량하고 황폐하게 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겔 6:14). “그 죄악대로 그들을 심판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겔 7:27). 그러므로 “은혜의 빚”은, 모세가 그렇게도 안타깝게 신명기에서 이스라엘 후손들에게 반복하여 외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빚으로 여기고 하나님의 은혜의 품을 떠나지 않는 것이며, 대대손손 하나님을 기억하여 그분의 은혜 안에 살기 위해 그분의 말씀을 매일 묵상하고 가르치고 마음에 새기며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경배하며 사랑하는 것임을 외친 것이다.

신명기 6:4-9

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9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찌니라

(1). 이 세상에서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한 참 신이시며, 구원자이시며, 사랑이시며, 동시에 죄를 심판하시는 참 유일하신 하나님이심을 알고 기억하고 마음과 힘과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 하나님만을 사랑하라고 명하신다. (2). 하나님의 은혜를 빚으로 여기고 잊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명하여 주신 말씀이 곧 하나님 자신이심을 알고, 그 말씀에 순종하고 대대손손 기억하도록 가르치고 배우고 몸으로 마음으로 새겨서 매일을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말씀으로 살아감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말라는 것이다. (3).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알고 인정하고 경외하고 갈망하며, 그분은 당신의 생명을 다하여 당신의 백성들을 열정으로 사랑하심을 알고 기억하고 새기라는 것이다. 이르기를, “에브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원수의 손에 넘기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즈마처럼 버리며, 내가 어찌 너를 스보임처럼 만들겠느냐? 너를 버리려고 하여도, 나의 마음이 허락하지 않는구나! 너를 불쌍히 여기는 애정이 나의 속에서 불길처럼 강하게 치솟아 오르는구나… 나는 너희 가운데 있는 거룩한 하나님이다”(호 11:8-11) 당신의 백성을 향한 그 강력한 사랑이 사자처럼 울부짖는 그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마음을 알아 달라는 외침이다. 그러므로 은혜의 빚은: > 하나님 한 분만이 우리를 지키시고 사랑하시는 유일한 신이심을 이 세상 사람들에게 자랑스럽게 알리는 일이며; > 우리를 이 세상 죄와 죽음의 멸망에서 건져내신 구원의 은혜를 잊지 않는 기억이며; >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잉태시켜 주셔서 영원히 하나로 영생을 살게 하신 그 한없는 은혜로운 사랑을 마음에 빚으로 새기고 그분을 마음과 뜻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이며; >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찬송하며 예배하며 경외하며 그분의 영광과 이름을 드러내는 삶으로 누리는 것이다.

 

셋째, 성도는 예수그리스도에게 빚진 자들이다

예수그리스도께서 하늘나라 영광의 보좌에서 내려오셔서 죄악과 사망에 갇힌 우리를 친히 찾아와 주셨으며,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저주의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당신의 생명의 핏 값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죄인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죽음의 상태에서 구원받았으므로 구원 자체가 바로 ‘빚’이다. 그분은 십자가 희생으로 우리에게 향한 사랑을 확증하셨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늘을 보좌로, 땅을 발판으로’(사 66:1) 삼으시는 영광의 하나님이시다. 그럼에도 발의 먼지와 같은, 거름 더미(사무엘상 2:8)에 불과한 죄인들을 위해 몸이 찢기는 매를 맞으셨으며, 조롱과 멸시와 천대를 당하셨으며, 벌거벗은 몸으로 십자가에 매달리는 수치를 받으셨으며, 손과 발에는 못이 박혔고, 옆구리는 창에 찔리고 모든 피를 쏟아내는 생명의 대가로 우리를 죄로 인한 온갖 수치와 고통과 죽음에서 살려내셨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영광의 하나님이 이와 같은 멸시와 천대와 저주의 십자가에 매달리는 가장 참혹한 방법으로 죄인을 구원하여 주시리라 상상조차 하지 못하였다. 그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쏟아부어주신 그 은혜의 빚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는가! 아무런 조건도 자격도 없는 오직 죄인이라는 그 이유 하나로 구원받은 그 사랑의 은혜를 어찌 빚으로 여기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어찌 거저 받은 은혜라 하여 당연한 권리로 교만할 수가 있으며, 어찌 그 생명의 대가로 받은 은혜를 잊어버리고 하찮게 여기며 저버릴 수가 있겠는가! 어찌 그 위대하시며 선하시며 의로우시며 자비와 긍휼과 사랑이 풍성하신 은혜를 찬송하지 않을 수가 있으며, 어찌 감시하지 않을 수가 있으며,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그 은혜의 복음이 얼마나 깊고 넓고 높으며,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하시며 존귀하시며 신실하시며 충만하시며, 영원한 생명을 잉태하여 주시는 능력이신지를 바울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그 사랑의 은혜를 감당할 수가 없음으로 은혜에 빚진 자로, 그리스도 예수에 빚진 자로, 복음에 빚진 자로, 모든 사람에게 빚진 자로,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른 것이다. 성경 전체에서 바울처럼 처참한 환난의 인생을 산 사람은 이 세상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 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 24-27). 그는 14년 동안 아홉 번이나 죽음과 같은 매와 돌로 맞는 만신창으로 깨지고 어그러지고 찢어지고 부러지고 구부러진 몸을 이끌고 은혜에 빚진 자로 복음에 빚진 자로, 땅 끝까지 순교의 날까지 복음 전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성경에서 하나님 찬양으로 제일 많이 하나님께 감사한 사람은 바울과 다윗이었다. 바울의 13 서신에서 빠지지 않고 시작한 구절이 바로 하나님 은혜에 대한 찬송과 감사와 평강이었으며, 바울의 삶 자체가 바로 찬송이며 감사였으며 예수그리스도에게 향한 그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는 사랑의 고백이었다(롬 8:35-39). 바울은 자신이 입은 그 위대한 구원과 생명이 ‘은혜 은혜 은혜’, 한없는 은혜의 빚으로 마음에 새겨져 있었기에, 도살당하는 양과 같은 극악한 환경과 상황 속에서도 믿음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며 감사와 기쁨과 평강으로 모든 성도들이 은혜를 누리기를 원하고 또 원한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제시한 은혜에 빚진 자로 살아가는 성도의 신앙의 정체이다.

내가 태어난 것도, 살아 숨을 쉬는 것도, 존재하는 것도,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장차 하늘나라에서 영생을 사는 그 소망, 모든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우리는 ‘빚진 자이다’. 만약 누리는 은혜가 육신의 수고와 노력과 공력과 헌신으로 얻어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권리이지 ‘빚’이 아니다. 아무것도 한껏 없이 한순간에 하나님의 영의 임재로 성령님이 내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무상으로 입혀주신 은혜이기에 ‘빚’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 빚은 은혜로 말미암아 선물로 입혀진 것이기에, 갚을 수 없음으로 누리는 것이며, 그 누림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성도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며,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보고 믿고 의지하고 사랑하며 영원히 하나로 영생을 살기로 정하여 주신 결혼을 약속한 ‘은혜 언약’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성도를 하나님에게 속하여 은혜로 살아가는 ‘종’으로 표현한 것이다. “죄에게서 해방되어 이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 6:18).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롬 6:22). 그러므로 성도가 입은 은혜는 내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살아가는 생명줄이기 때문에 나는 그 은혜가 아니면 살아날 수도, 살아갈 수도, 하늘나라 영생의 소망도 이룰 수가 없다. 성도는 이미 하늘나라의 모든 신령한 복을 받은 존재로 은혜에 빚진 자로 기쁨과 감사로 살아가는 복된 자들임을 제시한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온갖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엡 1:2-3). 또 이르기를,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웹 2:5).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옙 2:8-9).

마 18:23-35에서 제시하신 은혜에 빚진 자

예수님은 일만 달란트 빚진 자를 탕감하여 주는 비유로 은혜의 빚에 대하여 설명하신다. 주인은 어느 날 평생 갚아도 갚을 길이 없어 감옥에서 죄인으로 자유의 삶을 박탈당한 살 가망이 없는 빚진 자를 불러내었고, 이내 그에게 긍휼과 은혜를 베풀어 모든 빚을 몽땅 탕감하여 준 것이다. 탕감 받은 자는 주인을 알지도 못하였고 주인을 위해 한 일도 전혀 없었다. 주인은 그의 빚을 몽땅 탕감하여 줄 때 그 어떤 조건도 대가도 이유도 없이 오직 긍휼과 은혜로 죽음의 시궁창에서 구원해 준 것이다. 그는 평생 갚아도 갚을 수 없는 은혜에 빚진 자로 주인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며 주인의 은혜를 사람들에게 알리는 자로 살아가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탕감을 받은 그는 자기에게 아주 적은 빚 백 데나리온을 진 자를 용서하지 못하고 목을 잡고 감옥에 처넣은 것이다. 그는 주인이 아무런 대가도 조건도 없이 오직 긍휼과 자비로 베풀어주신 은혜의 빚을 마음에 두지도, 기억조차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이 받은 은혜를 다른 이에게 흘러줄 수가 없었으며, 그 결국은 두 번 용서 없이 다시 죽음의 감옥에 처넣게 되는 심판을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그러므로 은혜를 빚으로 여기는 자는, 내가 입은 구원의 은혜는 나에게서 끝나는 은혜가 아니라 반드시 이웃에게 전하는 생명의 씨를 잉태시키는 원동력을 가지고 있음으로 샘물처럼 내 주위에 흘려 내려가 마른 땅에 심어진 씨를 태동시키는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복음임을 비유로 말씀하여 주셨다.

넷째, 복음에 빚진 성도의 삶

사울(바울)은 자신과 같은 죄인들을 살리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희생제물이 되신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를 알지 못하였고, 오히려 은혜를 악으로 갚는 “훼방 자오 핍박자요 폭행자”(딤 전 1:13)로 예수그리스도를 핍박하며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교회와 성도를 붙잡아 감옥에 가두고 죽이는 일에 열심을 부렸다. 그런 그를 예수그리스도께서 친히 찾아와 주시고 불러주시고 은혜를 입혀주셔서 구원하여 주셨으며, 이방인 사도로 세우셔서 복음을 전파하는 복음의 선구자로 만들어 내셨다. 그 은혜를 감당할 길이 없음으로, 자신이 받은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명감에 불타 있었기에, 자신을 복음에 빚진 자, 모든 사람에게 빚진 자(롬 1:14),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부르며, 그 어떤 사도보다도 복음을 위해 고난 당하기를 기뻐하며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는 이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위대한 사도로 모든 성도들의 본보기가 된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받은 은혜의 복음은,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을 희생하셔서 이 세상 죄와 사망에 갇혀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살려내는 생명을 잉태하여 생육하고 땅 끝까지 번성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하나님의 원대한 뜻과 목적이 담겨 있음으로 바울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 모든 성도를 포함하여 ‘빚진 자’라로 제시한다. 그 ‘빚’은 나를 영원한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하늘나라 백성으로 영생을 누리게 하는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신 은혜이며, 그 빚은 내 형제와 이웃에게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죽은 자를 생명으로 살려내는 원동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바울은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라고 고백한 것이다. 즉 그의 삶 자체가 바로 은혜이며, 그 은혜에 이끌려 모든 사람에게 빚진 자로 오직 예수 복음을 전파하는 일평생 빚진 자로 그리스도의 사슬이 되어 예수에게 붙잡힌 자로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하며, 기쁨으로 감사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삶을 살아낸 것이다.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길이요 생명이요 빛이요 진리요 천국이요 영생이기에 그분의 종으로 사는 그 자체가 바로 영광이며 자랑이며 소망이다. 이것이 은혜에 빚진 자의 감격으로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됩니다”(롬 14:7-8)라는 고백으로 복음에 빚진 자로 복음을 전파하는 자로 살아가는 성도의 신앙이다.

바울의 인생과 같이 성도는 복음으로 구원받는 그 순간부터 복음을 전파하는 통로로 도구로 운명되어 있다. 우리의 의지와 열정에 근거하여 복음이 전파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대로 성령의 사역으로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열심이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구원받은 성도를 복음의 통로로 삼아 세상 끝까지 당신의 나라를 전파하고 확정하여 가심으로 바울은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에게 복음에 ‘빚진 자’라는 가장 적합한 표현으로 복음의 속성과 기능을 제시한 것이다.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옙 1: 11). 우리가 매일 살아서 움직이는 그 생명 자체가 바로 은혜로 입혀진 빚이다. 왜냐하면 내가 살아서 움직이는 이 생명은 나의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의 피 값으로 지불되었기 때문에 은혜가 아니면 나는 영생의 생명을 누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당신의 자녀는 오직 당신의 은혜에 빚진 자로 살아가게 하셨다. 왜냐하면 당신의 자녀는 당신을 떠나서는 단 한순간도 살수 없는 전적인 의존적 존재로 하나로 묶어 놓으셔서 오로지 당신만을 바라보고, 당신만을 의지하고, 당신만을 사랑하며, 당신만을 자랑하며, 당신만을 세상에 나타내는 자로 세우시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에게 한없는 은혜를 입혀주시기를 기뻐하시며, 그분을 떠나지 말고 그분 안에서 하나로 살아가기를 원하시며, 하나님의 이 마음을 아는 자는 날마다 은혜의 빚진 자로서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만 사랑하며 내가 입은 그 구원의 은혜를 땅 끝까지 전파하는 통로가 되기를 갈망하며 그것이 우리 성도에게 주어진 마지막 사명임을 예수님은 명하여 주셨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