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4:7-14
14:7 청함을 받은 사람들의 상좌 택함을 보시고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가라사대 8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상좌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9 너와 저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말석으로 가게 되리라 10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 11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12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13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14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
이 세상 모든 인간은 가장 높은 상좌의 자리를 목표로 삼아 경쟁하며 싸우고 있다. 주님은 그러한 인간들의 자신의 가치 높이기 위한 상좌다툼을 ‘높아지기’라고 부르고 있고, 그렇게 상좌에 앉기를 좋아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반드시 낮은 자리로 끌어내리신다고 말씀하시는데, 그 ‘낮은 자리’가 바로 바닥이 없는 무지갱이 같은 지옥임을 의미한다. 즉 이 세상에서 높아지고 상좌를 원하는 모든 인간들의 결국이 바로 바닥이 없는 낮아짐의 지옥이라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하나님이 주신 선한 법까지도 이용하여 자신들의 행위의 의로움을 내 세워 자신들의 가치를 높이고 상좌에 앉기를 추구하는 자아 숭배에 집념하는 악당들이라는 것을 이 비유로 폭로하신 것이다. 주님은 이 세상 인간들의 모형으로 등장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상좌다툼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폭로하시고 있다.
마 23:2-7, 12
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5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6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7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 하느니라 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율법 지킴과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는 모든 종교행위들이 사실은 상좌에 앉아 자신을 자랑하고 드러내어 칭찬받기 위한 외식임을 폭로하신다.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의 추구가 바로 자기 높아지기와 상좌 다툼이다. 그러나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이 추구하는 높아지기의 삶과 반대로 ‘낮아지기’의 삶을 추구하는 자가 있으니 그들이 바로 택함을 받은 자들이며, 오히려 자신을 부인하는 티끌의 자리로 내려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며 세상을 향하여는 십자가 삶을 지향하는 자들이며, 그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높여주신다는 것이 이 비유가 은유적으로 제시하는 핵심이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눅14:11). 자기를 낮춘다는 말은 도덕과 윤리를 갖춘 의로운 자로 인정받는 행위에 관한 겸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러한 시도를 다 내려놓고, 죄인으로 태어난 인간에게서 절대로 하늘의 의가 나올 수 없는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는 철저한 자기 부인의 자리로 내려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구원의 은혜만을 추구하는 삶을 가리킨다. 즉 하늘나라 상좌의 자리에 앉게 되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로 이 세상을 향하여서는 자기 부인의 십자가 죽음을 통과하여 그리스도의 영으로 탄생된 하늘나라의 아들들이다. 그렇게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십자가 삶으로 이끌려가는 자는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 당연히 아무런 자격도 아무것도 행한 것 없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강권으로 이끌려왔음을 확실하게 알기 때문에 스스로 제일 낮은 말석에 앉게 된다. 그때 주인이 그렇게 낮은 자리로 내려가 말석에 앉은 자를 상좌로 청하여 주신다고 말씀하신다.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앉으라 하리니 그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 (눅14:10).
그럼에도 오늘날 교회는 바리새인들과 같이 예수님의 말씀과 정 반대로 상좌 앉기 위한 쟁탈전을 벌이고 있다. 즉 바리새인들이 스스로 의롭다고 자체 하는 율법적 행위와 외식을 열심히 본받아 금식 기도, 십일조, 선행, 충성 봉사, 헌금, 선교, 구제 등 밖으로 나타나 보이는 행함들을 자기들 마음대로 하나님의 일로 규정해 놓고, 하나님을 섬겨드린다는 구실로 교회 이름을 높여 자랑하며, 자신의 의와 가치를 쌓아서 사람들의 칭찬과 존경심을 얻어내는 경쟁과 다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주님은 그러한 열심과 의지적 행함이 바로 상좌에 앉기를 좋아하는 바리새인의 외식이며, 회칠한 무덤이며, 마귀의 욕심을 따라 행하는 '마귀의 행사'라고 확실히 밝히고 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요 8:44). 즉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 아니라 사실은 ‘거짓과 살인자인 마귀’ 라고 저주하신다. 그렇다면 어떤 삶이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낮아짐의 삶이며, 어떤 것이 마귀의 욕심을 따라 행하는 높은 상좌 앉기를 다투는 외식인가를 주님은 여러 가지 비유로 구별하여 말씀하여 주신다.
상좌 와 낮은 말석의 의미
눅18:10-14
18: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 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높아지기의 삶과 낮아지기의 삶의 표본을 주님은 이 두 사람의 기도로 비교하고 있다. 여기에서 진짜 낮아지기의 삶을 사는 이가 나오는데 그가 바로 세상으로부터 ‘악한 죄인’이라고 정죄 받는 세리이다. 하지만 그가 진실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애통으로 자신의 실체를 올바로 직시하고, 가난한 심령으로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를 구할 때 주님은 그를 ‘의롭다고 높여주신 것이다. 그가 행한 것은 오직 죄뿐이다. 그는 바리새인들처럼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지는 경건한 삶과 율법 지킴으로 사람들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을 만한 일을 한 것 없는 오히려 자기 유익을 위해 자기 민족을 배신한 악한 죄인으로 정죄 받아 버림을 당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다만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을 구하는 것뿐이었다. 주님은 그렇게 자신의 정체를 온전히 깨닫고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를 입어야만 이 그 죄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죄인임을 깨닫는 자기 부인의 자리로 내려가는 그 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하늘나라의 청함을 받게 되며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주님은 굳이 죄인이라 정죄 받은 세리 마태의 집을 택하여 죄인과 연합을 이루는 뜻깊은 잔치를 베풀었던 것이다. 그렇게 제일 밑바닥에 처해있는 죄인이라 정죄 받은 세리와 창녀들을 신부로 맞이하여 함께 먹고 마시는 기쁜 연합의 잔치를 바리새인들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음으로 예수님을 “먹기를 탐하는 자요 포도주를 즐기는 자요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로다” (눅 7:34) 라고 비방한 것이다.
높아지기의 삶이란?
반면에 높아지기의 삶을 사는 이가 나오는데 그가 바로 율법적 행위로 모든 사람들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고 칭찬받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다. 그래서 바리새인은 감히 하나님 앞에서도 자신의 공로와 업적들을 나열하며 자신을 높이고 있었다. 그는 세리와 창녀와 같이 토색, 불의, 간음을 하지 않고, 불법도 저지르지 않으며, 이레에 두 번씩 금식을 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꼬박꼬박 드리며 ‘하나님 저는 하나님 말씀대로 다 행하였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마 19:20) 라고 당당히 부족함이 없는 자로 자칭하더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스스로 의롭다고 자칭하는 그 행함이 바로 오늘날 모든 교회가 지향하는 신앙생활의 모토이다. ‘토색, 불의, 간음, 불법 행하지 않고, 십일조 꼬박꼬박 내고, 금식, 기도, 봉사, 구제 등의 행함으로 착한 그리스도인이라 칭찬 받는 자들이다. 그들이 외치는 소리가 바로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의 일꾼이 되자’ ‘빛과 소금의 역할로 세상을 구제하자’ 이와 같은 인간 주체의 행함이며, 이것이 오늘날 주일 설교의 핵심이요 모든 교인들의 신조로 세워져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행위로는 흠잡을 것 없이 의롭게 산 바리새인들의 삶이 바로 마귀의 욕심을 따라 행하는 마귀의 일이며 그들의 아비는 마귀라고 저주하신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요 8:44). “화 있을진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마 23:15). 오늘날 많은 교회 목회자들이 정확하게 예수님이 주신 진리의 말씀과 정 반대로 교인들을 가르치고 선동하여 ‘배나 더 되는 지옥 자식’으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대로 ‘너회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회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 23:13) 함과 같이 외식과 불법을 힝할뿐만 아니라 선생이 되어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향하여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회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마 23:33) 라고 그들에게 임하게 되는 심판을 경고하신 것이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은 인간들이 추구하는 의로운 행위들이 바로 자신을 높이기 위한 즉 상좌 챙기기 위한 집착이며, 결국 ‘나의 자랑, 나의 칭찬, 나의 가치와 영광’을 챙기기 위한 속셈임을 꿰뚫고 계시기에 처음부터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들을 죄악으로 규정하셨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에게서 나오는 열심은 오직 자신을 높이기 위한 외식적 행위일 뿐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의로운 자로 위장하는데에 목숨을 걸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의 추악한 외식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부르고, 반복하여 그들의 상좌다툼과 높아지기의 행위를 삼가하라고 경고하여 주신다. 막 12:39 -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눅20:46 -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주님은 그렇게 높아지기를 원하고 상좌 챙기기 위해 행하여지는 율법 지킴에 화가 있다고 말씀하심으로 그들이 스스로 ‘외식과 불법으로’ 지옥에 갈 근거를 쌓고 있음을 말씀하신다 (마 23: 13-33). 그렇게 자기 높이기의 삶을 추구하는 그들은 외양으로 볼 때 종교행위에 지나친 열심을 부리며,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자처할 만큼 도덕적 윤리적 양심적 삶을 훌륭하게 살아내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자칭하는 ‘의로운 삶’이 바로 오늘날 교회가 열심히 추앙하는 ‘고상한 청빈’, ‘의로운 삶’ ‘성화의 삶’이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의 높아지기의 삶을 경고하실 때마다 바리새인들의 행위를 예로 들어 인간의 마음속에 깊이 감추어져 있는 추악한 교만과 외식을 폭로하신 것이다.
이 세상 그 어떤 인간도 자신의 육에서 나오는 육적 행위로 자신을 깨끗하게 할 수도 또한 자신을 죄에서 구원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을 하나님은 ‘죄’로 규정하셨고, ‘사망’으로 선고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롬 6:23)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죄인의 열심과 노력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늘나라의 의로움이 나올 수가 없기 때문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이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라고 선포하셨으며, 창세기 첫 시작부터 밝히고 설명하고 증거하여 주고 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하늘나라에서 이미 완성된 묵시대로 펼쳐지는 역사이다. 마찬가지로 본문의 상좌 배정도 인간의 행위의 열심으로 쌓은 공로나 업적으로 배치되는 것이 아니며, 잔치 자리의 상좌 배정의 권한은 잔칫집 주인이 갖고 있으며, 이미 정하여져 있다는 말씀이다 (눅14:8-10). 아무리 자기들 마음대로 상좌를 차지하고 앉아도 하나님 나라의 상좌는 이미 결정이 되어 있다. 즉 바리새인들이 집착하는 상좌 쟁탈전은 하늘나라 상좌 배정에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이 배설하시는 잔치에는 의로운 자, 공로와 업적으로 상좌 앉기를 원하는 자가 청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한 것 없이 또한 할 수도 없는 저주의 질병에 묶여있는, 오직 구원자의 은혜를 입어야만 이 살아날 수 있는 자들이 청함을 받았음을 이 비유에서 강조하여 설명하시고 있다.
천국 혼인 잔치에 참여하게 되는 자들과 거절하는 자들은 어떠한 자들인가?
눅14:13-14 -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
천국의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되는 자는 가난한 자, 병신들, 저는 자, 소경 이와 같이 아무것도 할 수도 갚을 수도 없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신다. 그 잔치는 노력의 대가와 행위의 의로움으로 공로를 쌓아서 들어가는 나라가 아니라, 반대로 보잘것없는 아무것도 갖추지 못한 무능하고 연약하고 가난하고 온몸이 온전치 못한 병신들, 즉 온갖 더러운 죄로 죽어가는 죄인들이 오직 하나님이 입혀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들어가게 되는 복음을 계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린 양의 혼인잔치는 모든 사람이 다 초청받았다 하여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설마 그들에게 초청장을 보낸다고 하여도 그들은 그 혼인잔치가 계시하는 영생의 진리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참여할 리가 없다는 것을 주님은 말씀하신다.
눅14:16-20
14:16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17 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18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하나는 가로되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19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20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그들은 자신들의 육신을 살찌우는 세상일에 너무 바빠서 하나님께서 친히 청하시는 영생을 주시기 위한 은혜의 잔치에 참여할 것을 스스로 거절한다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이 땅에 묶여있는 자들은 이 세상 땅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기에 영생이 임하는 하늘나라의 혼인잔치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하나님은 그들에게 예수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있는 눈과 복음을 알아들을 수 있는 귀를 열어 주지 않았기 때문에 거절하게 된다는 은유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이스라엘에게 가서 당신의 말씀을 전하라고 하시면서 보고 듣는 무리의 눈과 귀는 막으신다고 말씀하신다.
사 6:9-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의 눈과 귀를 막아 마음을 둔하게 만들어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지 못하게’ 금하셨다고 말씀하신다. 오직 당신이 택한 자에게만 보는 눈과 듣는 귀를 열어주시는데 그들이 바로 아무런 조건도 자격도 없는 연약한 자들로 오직 주인의 긍휼과 은혜를 입어야만 이 살 수 있는, 즉 은혜를 입게 되는 자는 아무것도 한 것도 또한 할 수도 없는 가난한 자들, 온갖 질병으로 죽어가는 죄인들임을 제시한다. 도저히 자력으로 살아갈 수 없는 불가능한 자들이며, 전적으로 주인이 긍휼과 은혜를 입혀 주셨기에 혼인잔치에 강권으로 끌려오게 됨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들은 자신이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는데 누군가가 와서 손을 잡고 모든 것이 완벽하게 차려진 혼인잔치 집으로 끌고 감으로 주인의 강권으로 참여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천국 잔치는 그렇게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가 덮어짐으로 그분이 강권하여 친히 우리의 손을 끌어 주심으로 불가항력적 은혜로 참여하게 됨을 명쾌하게 설명하여 주신 것이다.
마 22:8~14
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 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9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11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 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12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 이어늘 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여기에서 먼저 청함을 입은 자들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비롯한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비록 그들이 먼저 택함을 받아 청함을 받았지만 혼인잔치의 참여에는 ‘합당치 아니한’ 자들이라고 확실히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율법과 제사와 말씀을 먼저 맡겨 주셨기에 그들이 먼저 청함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은 오히려 율법과 제사와 말씀을 가지고 공로와 업적을 쌓아서 자신들의 가치와 이름과 영광을 챙기는데 집착하여 은혜로 초청하는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기에 스스로 참여할 것을 거절한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먼저 청함을 받은 사람들은 한 사람도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심으로 그들에게는 천국에 들어갈 문이 닫혀있음을 암시하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눅 4:24).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다 데려오라” / 예복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아무런 대가도 갚을 것도 없는, 자격도 조건도 공로도 없는 가난한 자, 장애를 가진 병신이라 불리는 그러한 자들이 은혜의 강권으로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끌려옴을 제시하신다.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다 데려오라” (마 22:10). 즉 하나님의 천국 잔치에 들어갈 수 있는 근거가 인간들의 선한 행위나 악한 행위와는 전혀 무관하다는 말씀이다. 오직 택함을 받은 자만 주인이 손을 끌고 와서 준비한 예복을 입혀주시고 상좌에 앉혀 주신다는 말씀이다. 주인이 입혀주시는 예복은 요한계시록에서 상세히 기록되고 있다.
계 7:13-14 -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계 19:7-9 -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 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이끄심을 받은 성도는 주인이 주시는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되는데 바로 어린 양의 피에 씻은 횐옷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는 어린 양의 피의 공로로 만들어진 생명의 예복이며, 그 생명의 예복은 오직 창세전 택함을 받은 자만 하나님이 친히 입혀주시고 의롭다고 칭하여 주시고 ‘옳은 행실’로 인정해주신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그 혼인잔치에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이 등장한다 (마 22:11). 그는 혼인 잔치에 합당한 주인이 입혀주시는 예복은 입지 않고, 자기가 준비한 옷을 입고 잔치에 들어온 것이다. 바로 하나님이 입혀주시는 은혜의 예복을 거절하고 자신의 공로와 업적으로 만든 자신이 준비하여 입은 누더기 같은 옷임을 암시한다. 자신에게는 의롭고 영광스러운 옷으로 보이지만 주인에게는 더러운 걸레이며 용납할 수가 없는 악인의 옷이기에 주인은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마 22:13)라고 그런 자들의 결국을 선포하신다. 오늘날 교회는 선한 행위로 열심과 노력을 다하여 예복을 준비하고, 옳은 행실로 깨끗한 세마포를 준비하라고 자신의 의를 쌓는 일에 집념하도록 은혜를 욕되게 하는 망령된 설교를 하고 있다. 하나님을 열심히 섬긴다는 구실로 ‘나’의 존재성과 가치를 확립하여 하나님 앞에 인정받고 상금을 바라며 사람 앞에 칭찬받고 이름을 높이는 자아 숭배를 믿음과 신앙생활이라고 경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주님은 그들의 결과를 확실히 말씀하여 주시고 있다.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이다.
아담의 후손 가인이 자신의 제사를 지키기 위해 동생 아벨을 때려죽인 것과 같이,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율법 지킴의 의와 제사 행위를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이다. 그리고, 그 유대 율법주의 자들의 악렬한 외식을 오늘날 교회가 열심히 달습하고 있다. 그렇게 하나님을 섬긴다고 열심을 부리는 자들이 ‘나’의 이름에 조금이라도 흠이 되는 일이 있으면 그 대상이 하나님일지라도 절대로 순복하지 않고 대적하며 죽이려는 것이 바로 악한 죄인의 본심이다. 내 마음속 깊은 곳에는 항상 ‘나’라는 자아가 주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렇게 인간은 신앙생활마저 온통 자기 자랑거리로 간증 거리로 만드는 열심으로 집착하고 있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몇 가지 근사한 착한 일을 해놓고 그것을 겸손으로, 의로움으로, 청빈으로, 성화로 포장을 하지만 그 외식이 바로 마귀의 탐심이며, 더 교활한 자아 숭배이며, 자기 이름을 높이기 위한 회칠한 무덤으로 자신을 지옥의 자식으로 만드는 파멸의 길이다.
그렇게 자신의 공로와 업적을 쌓아서 인정과 영광을 갈취하려는 마귀의 자식들은 절대로 신랑의 은혜와 공로로 준비하여 주신 예복을 입을 수도 또한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도 없음을 주님은 제시하여 주셨다. 그래서 어린 양의 피로 만드신 은혜의 예복을 입지 않은 자가 수족이 결박되어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져지는 심판을 비유로 말씀하여 주신 것이다 (마 22:11).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는 오직 갚을 것이 없는 자, 가난한 자, 저는 자, 소경들과 같은 온갖 질병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무력한 죄인들이 강권하여 끌려와 상좌에 앉게 되며, 그렇게 갚을 것이 없이 주인의 강권으로 이끌려온 자들만이 하나님의 은혜만을 붙들고 그렇게 초청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만을 의지하고 자랑하게 되며, 그분의 모든 말씀에 순복하기를 기뻐하게 된다.
혼인 잔치에 참여한 성도의 삶이란?
주님이 은혜로 초청하여 강권적으로 손을 끌고 앉혀주신 혼인잔치는 먹고 마시는 그런 육신의 욕구를 만족시켜주는 잔치가 아니라, 죄와 사망의 영원한 지옥에서 건지심을 받는 구원과 영생의 초청임을 제시하신다. 그렇게 구원받은 성도는 자신이 저주와 사망의 구렁에서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말미암아 건지심을 받은 자임을 정확하게 알기 때문에 자신의 가치와 존재성을 부인하는 없음의 자리로 내려가게 된다. 그러므로 은혜의 전제조건은 ‘없음’이다. 아무것도 없는 자이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채워지고, 그렇게 내 것이 다 비워지게 됨으로 오직 그분의 은혜만을 의지하며 그분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존재로 그분에게 함몰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분의 영으로 탄생되어 그분에게 속한 자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라는 확실한 신앙고백으로 그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는 영원한 사랑으로 하나가 되었음을 고백하게 되는 성도의 진실된 신앙을 제시하여 준 것이다.
롬 8: 35-39 -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인간은 티끌로 피조 된 존재이며 타락으로 “죄와 허물로 죽었던 존재” (엡 2:1)이다. 영이 죽고, 죄와 허물로 이미 사형선고를 받은 썩은 육체의 욕심에서 어떻게 하늘나라의 의가 나오며 선이 나올 수가 있겠는가! 죄인의 송장에서 나오는 것은 오직 악취뿐인데 어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내놓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인간들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구실로 몇 가지 배설물 같은 공로를 쌓아서 자기의 의를 자랑한다면 그것은 사람들의 칭찬과 숭배를 얻어내려는 상좌 자리 쟁탈전을 벌이고 있다는 증거이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자신의 유익을 챙겨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는 것이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다. 그 뿌리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죽음 외에는 죄를 소멸하는 다른 방책이 없음을 말씀해 주고 있다. 그리하여 바울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씀하고 있고, 우리 육신의 죄인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말한 것이다.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롬 6:6).
십자가에 못 박은 내 옛 죄인은 탐심과 욕망으로 오직 자신만을 위해 사는 죄의 종이였다. 율법에 묶인 종이 되어 수많은 ‘하라, 하지 말라’의 명령을 열심히 지켜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아 복받고, 사람들로부터 의로운 사람으로 칭찬받아 이름과 인기를 얻으려고 본심을 감추고 무척이나 자신을 억제하는 무거운 짐을 지고 공로와 업적들을 쌓는 거짓된 외식들을 열심히 행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선한 율법을 지킬 수 없음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붙드는 철저한 자기 부인의 삶을 지향하기보다는 오히려 긍정의 힘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인간의 욕망을 살리는데 힘써 왔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에서 주장하는 옛 사람을 다시 살려내는 망령된 신앙생활이다.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해서 하나님에게 드려야 한다는 압박감과 그렇게 열심히 쌓아놓은 공로로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 주실 것이라는 잠재적 의식 속에서 여전히 내 인생의 주인은 ‘나’였던 것이다. 나의 행위와 공로와 업적의 정도에 따라 축복이 주어진다는 것이 오늘날 기복주의와 인본주의가 판을 치는 교회의 설교 내용이다.
성도는 살아서 역사하시는 말씀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여” (히 4:12) ‘나’라는 우상이 벗겨지고 깨지고 부서지고 죽어져야 하는 철저한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삶으로 끌려가게 된다. 그렇게 내 ‘자아’라는 옛 사람이 죽고, 그 자리에 진리의 말씀을 채워 진리가 되는 일에 열심을 내는 것이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집요하게 붙들게 됨으로 진정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로 내려가 오직 하나님이 하라는 일,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에 순종하기를 기뻐하며 지향하게 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말년이 왜 그렇게 쓸쓸하고 외로웠는지 디모데후서 4장에서 읽을 수가 있으며, 왜 그가 자신의 사역 말년에서 성화를 외친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내가 죄인 중의 괴수’라는 철저한 자기 부인의 타이틀을 스스로 붙들고 갔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와 공로만을 드러내는 도구요 그릇으로 사는 존재이다. 나의 죄 된 열심과 노력으로 하나님이 이루어 놓으신 일에 무엇인가를 보태는 것은 은혜로운 잔치상에 재를 뿌리는 것과 같다. 더더욱 예수그리스도를 닮는 성화의 삶을 지향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그렇게 될 수도 없는 것이다. 처음부터 인간이 이 땅의 티끌로 피조물로 만들여졌다는 것은 나의 존재가치와 처음 자리가 바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티끌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입혀지는 근거임을 제시한다. 죄인의 몸에서 나오는 것은 오직 죄뿐인데 무엇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가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바울은 인간의 육신과 죄 된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도 또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가 절대로 없다고 단정을 내린 것이다.
롬 8:6-8 -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이와 같이 나라는 존재가 하나님 앞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티끌이며 추악한 죄인임이 낱낱이 폭로됨에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자기 부인으로 내려갈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가 입혀지는 구원이 임하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을 이 땅의 티끌로 만들어 놓으시고 죄 아래 가두어 두셨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갈 3:22).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낮은 자리, 자기 부인의 자리, 십자가에 자아를 못 박는 자리로 끌어내리신다. 자아가 철저히 부인되고 죽어야 만이 새 사람,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탄생되는 상좌로 하나님이 앉혀주신다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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