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8: 1-14
18:1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2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3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7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8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9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10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11 (없음) 12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1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14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제자들은 예수님 앞에서 천국에서 누가 큰 자가 될 것인가 하는 쟁론을 하고 있었다 (막 9:34 / 눅 9:46). 제자들은 여전히 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행위의 노력과 도덕과 윤리의 경건함으로 공로와 업적들을 쌓아서 하늘나라에서 큰 자가 된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주님은 어린아이를 투입하여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가 큰 자인가를 설명하여 주신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 18: 3). 즉 천국은 결단코 성인이 되어 열심과 노력으로 갖추게 되는 도덕과 윤리적 경건과 책임감과 성화로 들어가는 나라가 아니라는 말씀이다. 또한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이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고 깨끗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그런 유치한 해석도 아니다.
어린 아이의 특성과 성인의 탐심
천국은 크고 작은 것과는 무관하다. 그 나라는 이 땅에서 공로와 업적을 쌓아서 큰 자 작은 자로 등급을 메기는 이 세상 가치와 원리로 운행되는 나라가 아니라는 말씀이다. 주님이 어린아이를 투입하여 천국을 설명하신 것은,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는 특성 때문이다. 어린아이는 부모의 품을 떠나서는 독립적으로 살 수가 없는 반드시 어머니의 품에서 어머니가 주시는 음식을 먹고, 어머니가 입혀주시는 옷을 입고, 어머니만 바라보는 어머니 의존적 존재로 사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천국은 바로 하나님 의존적 존재로 하나님이 먹여주시는 하늘의 신령한 양식으로, 입혀주시는 은혜의 옷으로, 불기둥과 구름기둥의 인도를 따라 들어가는 나라임을 제시하고 있다. 어린아이는 세상 삶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이 없으며, 또한 부모의 입장과 상황을 고려하는 일도 없으며, 세상이 요구하는 고착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 자아 확장과 자아실현을 위한 탐심과 욕망과 야망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이 세상에서 큰 자 되기 위한 경쟁과 폭력과 시기 질투와 살인과 같은 치열한 전쟁 속에 어린아이는 투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에 성인이 된 인간은 탐심과 욕망의 본성을 따라 큰 자 되기 위한 치열한 자리다툼의 싸움을 하고 있다. 그러한 큰 자 되기 위한 치열한 전쟁과 경쟁 속에서 인간이 끊임없이 토해내는 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묘사한 온갖 사악함과 추악함이다.
롬 1:21-24 -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롬 1:29-32 -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그들이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이것이 바로 어른이 된 고착된 사고방식과 탐심에서 나오는 악행들이다. 그 누구도 마귀의 본심에서 나오는 탐심을 제거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나라에 가서도 큰 자가 되어 다른 이를 지배하는 왕으로 살기 위해 이 땅에서 열심히 공로와 업적들을 쌓고 있다. 자신의 죄의 실체를 깨닫고, 악한 죄인임을 인정하고, 예수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는 은혜의 복음을 께달으라고 주신 선한 율법으로 오히려 자신의 실체를 감추는 방패로 외식을 행하며, 율법을 지켜 행하여 의인이 될 수 있다고 거짓과 가증한 행위들을 추구하고 감행하더라는 것이다. 그들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에서, 자신을 하나님처럼 군립 하려는 자아 숭배자들이며, 세상 마귀의 욕심을 따라 행하는 세상과 간음하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도용하여 자신들의 유익을 챙기는 도둑질하는 자들이며, 진리의 말씀을 거짓으로 말하고 행하는 거짓말 쟁이며, 당연히 그 마음에 진리가 서지 못함으로 진리로 오신 메시아를 죽이는 살인하는 자들임을 주님은 '마귀의 자식, 외식하는 자, 회칠한 무덤, 우매한 자요, 마귀의 행사를 그대로 따라 하는 독사의 새끼들이다'고 저주하셨다(마 23:33).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 8:44).
오늘날 기독교 교회가 아주 정확하게 바리새인들의 이러한 외식을 열심히 본받아 자신들의 의와 영광을 챙겨가지고 있다. 즉 주님이 주신 진리의 말씀과 정 반대로 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다"(요 6:29).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라고 아주 확실하게 말씀하여 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참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가르치고 배우고 깨닫고 소유하는 일에 힘을 쓰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나의 큰 자 되기에, 즉 인기와 자랑과 칭찬과 공로를 쌓는 일에 열심을 부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교회마다 똑같이 강조하는 율법적 행함과 거룩한 삶, 십일조와 헌금, 충성 봉사, 구제와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빛과 소금의 역할 등 교회가 역사의 주인공이 되어 하나님의 일을 계획하고 목표를 세워 세상을 변화시키고 교회의 이름을 빛내는 종교 바벨탑을 쌓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자신들의 의를 쌓는 거짓과 외식적 행위로 하나님을 속이고, 세상으로부터 칭찬과 인기를 얻어내는 종교행위에 투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공로의 성취에 따라 큰 자와 작은 자로 등급을 매기며, 큰 자는 간증으로 모델로 세워놓고 교인들을 자극하여 경쟁을 붙여서 이익을 챙겨가지는 자가 따로 있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요 2:16) 라고 말씀하시면서 성전을 뒤엎고 헬라고 외친 것이다. 즉 교회를 이용하여 너회들의 유익을 챙겨 가지는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거짓 의를 행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그럼에도 교인들에게 인간의 능력을 발휘하는 '긍정의 힘', 능력의 기적, 재물의 축복, 거룩한 성화와 같은 인본주의와 기복주의와 같은 거짓된 신앙을 추구하도록 선동하여 자신들의 배를 채우는 양으로 이용하고, 생명의 말씀을 먹지 못하는 무지한 양들은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양을 노략질하고 팔아먹는 '강도요 절도요 삯꾼이요 이리'라고 폭로하신 것이다.
요 10: 7-12
10: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가고 또 헤치느니라
마 7: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예수님은 왜 어린아이여야 천국에 들어갈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일까?
천국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덮음으로, 십자가 구원의 의를 믿는 믿음으로 들어가는 거룩하고 흠 없는 나라이기에, "혼돈과 공허와 흑암"(창 1:2)으로 뒤덮인 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이 땅의 티끌로 지음을 받은 죄인에게서 나오는 그 어떠한 것도, 티끌만치라도 절대로 빛과 영광과 생명으로 충만한 거룩한 하나님 나라에 보탬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을 주님은 비유로 말씀으로 반복하여 말씀하여 주신다. 인간을 포함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첫 인간 아담의 범죄로 저주가 임한 (창 3:11-19) 타락으로 의 산물이며, 때문에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들은 악할뿐 의로운 것이 없음으로(막 7:14-23) 처음부터 심판으로 멸망으로 정해놓으셨다. 그리고 오직 당신의 독립적인 주권으로 구원을 성취하시고,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창세전 택함을 받은 자들만 믿음을 주셔서 당신의 나라로 들어 올리시기로 정해 놓으셨다. 예수님은 특별하게 제자들에게 어린 아이여야 천국에 들어갈수 있다고 말씀심으로, 천국은 다만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 '하나님께로 난 자들'만 들어갈수 있음을 제시한다. 즉 어린아이가 엄마의 아들이 된 것은 엄마가 낳아주셨다는 그 이유 하나뿐이다. 거기에는 그 어떠한 조건도 자격도 행위도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으며 또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어린아이의 특징임을 제시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탄생된 것은 다만 창세전 택함을 받았다는 그 이유 하나로 은혜의 덮음으로 그리스도의 영으로 그분에게 속한 자로 잉태시켜 주셨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낳기 때문이다'고 (요 1:13) 확실히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하나님의 온전한 은혜의 덮음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피의 공로를 믿고 의지함으로 인간의 모든 가능성을 배제하여 들어가는 나라이며, 오직 그분의 은혜와 영광 충만으로 운용되는 나라이기에 죄인의 육에서 나오는 그 어떤 것도 허용될 수가 없다. 때문에 그 나라에 들어가는 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직 온전한 순종과 자신의 실체를 철저히 자각하는 자기 부인과 십자가 죽음이다. 즉 예수와 함께 내 옛 사람 죄인이 십자가에 못을 박아 영원히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점도 흠도 없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탄생한 영의 사람으로 들어가는 나라이다. 그래서 주님은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요 3: 5-6) 라고 물세례로 이 세상 공중권세를 따라 죄의 종으로 살던 옛 사람은 영원히 죽고,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으로 영의 사람으로 거듭나서 들어가는 나라임을 확실히 말씀하여 주셨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그분의 영광과 은혜의 충만으로 영생으로 운용되는 나라이이며, 아버지의 품 안에서 하나의 통일체로 연합된 한 몸으로 그분의 사랑과 생명력으로 존재하는 영적 나라이며, 절대로 육적으로 인식되는 차별, 계급, 큰 자나 작은 자와 같은 상금이나 등급으로 메기는 나라가 아니라 어린 아이와 같은 하나님 절대적 의존자로 살아가게 됨을 어인 아이를 투입하여 설명하여 주신 것이다. 등급과 차별이 있다는 것은 경쟁과 시기와 질투와 탐심이 있다는 말인데 이는 인간의 차원에서 세속적으로 인식하여 영의 하나님을 이 세상 육신으로 섬기는 세상 신으로 끌어내리려는 망령된 짓이다. 예수님은 아무것도 할수 없는, 엄마의 품에 있어야만 생존이 가능한 어린 아이의 의존성으로 천국은 행위와 의지로 들어갈수 있는 나라가 아니며, 큰자, 작은 자로 등급을 메기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과 절대적 의존적 관계를 가지고 있는 '하나님께로 난 자들'만 은혜로 들어가 하나님의 품안에서 하나로 사는 나라임을 제시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 8:15)라고 말하는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을 열심히 섬겨드리며 율법을 열심히 지켜 행하여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기를 추구하며 애써 노력한 자신에 대하여 이와 같이 고백한다.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내가 곡하고 금식하였더니 그것이 도리어 나의 욕이 되었으며 내가 굵은 베로 내 옷을 삼았더니 내가 그들의 말 거리가 되었나이다"(시 69: 9-1). 하나님의 성전을 열심히 섬겼는데 그 열심히 도리어 자신을 삼키는 근거가 되었고 비방 거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곡하여 금식을 하였더니 도리에 욕이 되고 굵은 베를 입고 회개하였더니 도리어 말 거리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즉 율법대로 지키고 행하는데 열심을 부렸는데 그 율법의 의와 공로가 오히려 자신에게 해로 돌아와 자신을 삼켜 버리는 파멸로 끌고 감을 다윗은 영감으로 깨달은 것이다. 사도 바울도 자신이 그렇게 목숨을 다하여 섬기고 지켜 행하였던 그 율법적 행함이 자신을 의로운 자로 성화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더럽히는 배설물이 되더라고 고백한 것이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5절)
예수님은 어린 아이를 자신의 모습으로 묘사하여 제자들에게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과 순종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생명에 이르게 됨을 계시하셨으며, 이는 예수님 자신이 바로 어린양,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내려오셨기 때문임을 제시하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마18:5)함고 같이, 주님은 이 땅에 어린아이로 탄생하여 오심으로 그분은 성인이 된 강한 자의 힘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권력자로 오신 분이 아니라, 연약하고 비천한 어린아이로 즉 어린 양으로 아버지의 절대적 순종과 의존자로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오신 분이시며, 또 그렇게 어린 양의 모습으로 십자가 구원을 성취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하늘나라의 원리로, 자신을 완전히 비우시는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오셔서 아버지가 하라는 일만 하시고, 하라는 말씀만 하시는 절대적 순종으로 아버지의 절대적 의존자로 오신 분이시다. 그리고 이사야가 예언한 것과 같이 어린 양으로 연약하고 무능한 모습으로 세상 사람들의 멸시와 조롱과 핍박과 매 맞음과 폭력을 다 받아내시고, 아무런 반응도 대항도 하지 않으시고 묵묵히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의 모습으로 십자가 구원을 성취하여 주셨다
사 53: 3-8
53: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키셨도다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8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18: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계속하여 어린 아이를 개입하셔서 천국에서는 어떤 자가 큰 자인지를 설명하여 주신다. 예수님은 하늘의 큰 자인 내가 이 세상에서 어린 아이로 탄생하셔서 어린아이, 작은 자, 어린 양의 삶을 살아내신 것과 같이, 너희도 어린 아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는 자신 부인의 십자가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며, 그 어린 아이의 삶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천국에서 큰 자의 삶이다고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18:4).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눅 9:23) 라고 말씀하심으로 하늘나라에 합당한 큰 자는 이 세상에서는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는 십자가 삶으로 '없음'으로 내려가는 자임을 제시한다.
그리하여 주님은 성도의 믿음을 씨중에 가장 작은 겨자씨로 표현하시면서 성도는 이 세상에서 그렇게 가장 작은 겨자씨와 같은 자로 은닉된 삶을 살아가게 되며, 그렇게 보잘것없는 작은 씨로 시작하여 하늘의 큰 자로 농부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가꾸어 주셔서 생명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는 비유를 주신 것이다. 사도바울도 이 진리를 깨닫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는 십자가 삶을 추구하는 자신에 대하여 성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 부르며, 그 작은 자로 사는 성도의 삶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9-10). 성도가 지향하고 살아가게 되는 작은 자의 삶이란, 바로 주님이 앞서 살아내신 어린 양의 삶이며, 어린 아이의 순종이며, 자신을 부인하는 한 알의 썩은 밀알로 자신을 철저히 희생하는 십자가 죽음의 삶임을 제시하셨다. 자기 부인의 십자가 삶은 이 세상에서는 어린아이처럼 나약하고 무력하고 무능한 자로 보인다는 것이다. 또한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징계를 당하는 자 같으나 예수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넉넉히 이기는 능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부활의 생명을 가진 자요, 세상에서는 절망이지만 하늘나라를 소망하는 자요, 평강과 기쁨이 충만한 자요, 세상에서는 모든 것을 잃은 거지 나사로와 같은 자이지만 영생의 복을 받은 천국의 아들이라는 말씀이다(고후 6:9-10).
주님이 원하시는 어린 아이의 삶이란
때문에 성도는 절대로 이 세상에서 힘과 권세와 재물과 성공으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쌓아서 큰 자 되기를 추구하는 자가 아니다. 성도는 어린아이처럼 오직 아버지가 주시는 은혜의 옷을 입고, 아버지가 주시는 하늘의 양식을 먹으며, 아버지가 인도하시는 손을 꼭 잡고 함께 살아가는 완전한 아버지 의존적 존재로 순종의 삶을 사는 자이며, 성령님의 내주와 인도로 모든 일에 자진하여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십자가 삶을 지향하게 된다고 성경은 거듭 말씀하여 주시고 있다. 그러므로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오직 아버지에게 완전히 의존하는 어린아이의 순종이며 성품이다. 어린아이는 엄마의 품을 떠나서는 살수 없는 존재이기에 주님은 성도를 엄마의 의존적 존재로 절대 독립할 수 없는 어린아이로 표현하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어린아이로 부르신 것이다(호 11:1). 마찬가지로 주님은 우리 성도를 어린 양으로 자신을 우리를 기르시는 목자로 표현하심으로 성도는 목자를 떠나서는 절대로 독립적으로 살수 없는 존재임을 확실하게 말씀해 주시고 있다.
첫 인간 아담이 하나님의 보살핌과 은혜의 품속에서 절대적 의존자로 살아가기를 저버리고, 독립하여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욕심에 이끌러 하나님을 떠나 객체가 되었을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온 인류를 죄에 사망에 빠뜨리는 저주였다. 인간이 독립하여 하나님처럼 행서 하겠다고 스스로 선택한 것은 복된 삶이 아니라 반대로 자신을 파괴하고 멸망시키는 죽음과 지옥이었다. 그래서 주님은 성도에게 어린아이의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마 18:3-4).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 하게 하거든 찍어 내 버리라
18: 6-7 -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18: 8-9 -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 하게 하거든 찍어 내 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9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 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예수님은 성도는 어린 아이처럼 아버지가 입혀주시는 은혜의 옷을 입고, 아버지가 먹여주시는 생명의 양식인 진리의 말씀을 먹으며, 아버지의 품 안에서 아버지의 절대적 의존적 존재로 살아가는 삶이 천국에 합당한 삶임을 확실하게 제시해 주신다. 하지만 어린아이의 신분을 가착게 버리고 업신여기고, 독립적인 자아를 주장하는 성인의 삶을 추구하는 자는 주님을 실족케 하는 자이며, 그런 자에게 해당되는 것은 목에 연자 맷돌을 달아서 깊은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마 18:6-7). 즉 두 번 다시 기회가 없는 영원한 지옥에 던져지게 되는 무서운 심판임을 제시한다. 그래서 주님은 그다음 구절에 아주 매몰찬 말씀을 하셨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 하게 하거든 찍어 내 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 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마 18:8-9).
이 세상의 힘과 재물과 명예와 인기와 자랑과 같은 탐심이 이미 나의 몸속 피와 살이 되어 한 몸이 되었기에 그것으로 절대로 영생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탐심으로 가득 찬 내 옛사람이 죽기 위해서는 반드시 팔 다리가 짤려 나가고 눈이 뽑혀지는 자기 죽음을 통과하게 되며 그렇게 다 짤려나가는 죽음이 우리에게 유익하다고 말씀하신다. 그래야 만이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 아버지의 아들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영생인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옛 사람은 "죄 중에 태어났고, 어머니의 태 속에 있을 때부터 죄인이었기에"(시 51:5), 스스로의 힘으로 손발을 찍고 눈을 파 낸다고 한들 피와 살이 되고 세포 하나하나 죄로 물든 것을 제거할수가 없으며 오직 죽음만이 죄를 없이 할수가 있기 때문에, 우리 주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손발이 찍혀나가고 눈이 뽑혀나가는 죽음을 당하신 것이다. 주님은 그 죄악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말씀하여 주심으로 내 옛사람 죄인이 반드시 죽어야 만이 새로운 피조물로 죄와 상관없는 하늘나라 백성으로 영생을 살게됨을 제시하신 것이다.
길 잃은 한 마리 양의 비유
마 18: 12-13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백 마리 양 중에서 아흔아홉의 양은 독립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잘 발휘하여 길을 잘 찾아가는 자기 관리를 잘하는 성인 된 자들로 묘사하신다. 그런데 그중 한 마리는 독립할 수 없는 길을 잃은 연약한 어린 양으로 묘사하고 있다. 목자는 독립적으로 자신을 잘 관리하는 성인이 된 아흔아홉의 양은 버려두고, 길을 잃을 수밖에 없는 어린양 한 마리를 찾아내어 자신의 품 안에 안겨주신다. 길을 잃은 양은 목자에 의해 찾아지고 목자의 품 안에 안기게 됨으로 살아난 것이다. 길을 잃었다는 것은 본래 목자에게 속하여 있었던 양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어린 양은 목자를 떠나서는 살수가 없는 절대적 의존자이며, 목자는 자신에게 속한 양은 그 어떠한 대가를 치루더라도 반드시 찾아내어 당신의 품 안에서 하나로 묶어 놓으심을 제시한다. 반대로 독립적으로 자기관리를 잘하는 아흔아홉의 양은 처음부터 목자에게 속한 양이 아니였기에, 목자는 그들을 상관없이 버려두고, 자신에게 속해 있었던 잃은 한 마리 어린 양을 찾아 나선 것이다. 그 한 마리 양이 바로 창세전 예수 안에 있었던 그에게 속한 양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절대적 의존자로 아버지의 모든 말씀에 순종으로 화답하는 가장 작은 어린아이의 삶을 살아가게 됨을 이 비유로 설명하여 주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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