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5: 1-2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믿음으로 은혜에 들어간 성도의 삶
하나님과 화평케 된 성도는 성령님의 임재로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새롭게 태어나 아버지와 더불어 하늘나라 평강을 누리는 은혜의 자리로 들어 온 자들이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엡 2:14-16).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로 있었던 죄인들이 십자가 피의 공로를 믿는 믿음으로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새로운 피조물로 잉태되어 의롭다 여기심을 받아 하나님 아버지와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은혜를 입었으며, 이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는”(롬 8:15) 영광을 입게 됨으로 즐거워한다는 말씀이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5:2).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인으로 정죄하고 심판하는 계명의 율법을 자신의 육체로 페하여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어 주심으로(엡 2:14-16), 더는 원수도 아니며 진노가 임하는 심판의 대상도 아니며,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힘입어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함을 받은 자들이며, 하늘나라의 유업을 이어받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은”(마 5:9)자들임을 제시해 주고 있다.
바울은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써 은혜의 자리에 들어간 성도는 이제 하나님 아버지와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영광에 참여하게 됨으로 항상 기뻐하며 은혜의 복음을 누리며 그것이 곧 성도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권면하고 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데살전 5:16-18). 그런데 바울이 이 세상에서 살아낸 인생은 예수그리스도를 위해 고난과 핍박과 버림과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혹독한 매 맞음과 감옥살이로 도살당하는 양의 삶을 살아낸 것이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3-28).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롬 8:36).
그럼에도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 감사하라 평강을 누리라,’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라는 역설로 격려해 주고 있으며,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라는 확신을 심어주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평강’은 이 세상 육신이 겪는 근심 걱정 두려움, 환난 고통이 사라지는 안전한 평안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나와 동행하여 나의 고난에 동참하여 주시며 나의 아픔과 고통에 함께 하시며, 위로와 격려로 믿음을 잃지 않도록 붙들어 주시는 하나 됨의 관계를 말한다. 모든 것을 아시고(전지),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는(전능)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그 사랑의 관계에서 부어지는 기쁨과 감사와 평강이며, 이는 우리 주님이 우리 안에서 부어주시는 하늘나라의 평강이며, 우리 주 안에서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시기 위해 겪는 일이기에 반드시 견디어내는 인내와 연단으로 소망을 이루신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5:2-4).
예를 들면 바울은 자신에게 고통스러운 육체의 가시가 있다고 고백했고, 너무나 괴로워 여러 번 하나님에게 낫기를 기도했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라고 말씀하셨고 그 가시를 제거하지 않으셨다. 바울은 기도 중에 주님께서 육체의 가시를 허용하신 이유는 자만하지 않는 겸손한 주의 사도로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감사한 것이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바울은 주님을 핍박하고 대적하는 원수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이방인의 사도로 세워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그 사랑이 너무나 차고 넘치게 그를 감싸고 있었기에, 자신이 겪는 모든 환난과 고통과 멸시와 천대와 매 맞음과 감옥과 순교당하는 것을 은혜로 감사로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이 세상을 초월한 영적 눈을 가진 것이다. 이 세상에서 당하는 환난과 고통과 죽음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고, 자신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세워주시고 이룬 모든 업적도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고백이다. 살아서 숨 쉬는 것도, 매일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 적든 크든, 좋든 나쁘든, 원하든 원치 않든, 보고 듣고 하는 모든 것들을 오직 은혜로 감사로 기쁨으로 영적으로 받아들이고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모든 서신의 서두와 끝말을 한결같이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라고 자신이 매일 경험하고 전하는 복음의 전체 내용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 와 ‘예수그리스도의 평강’임을 제시한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하나님의 영광은, 영원부터 계시는 그 자체이시며, 천지창조를 통하여 나타내신 그분의 신성과 성품: 거룩하심, 지존하심, 완전하심, 초월성, 위엄, 권능과 사랑과 용서와 긍휼과 자비와 인내와 온유와 같은 본질적 성품을 말씀하신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롬1:20). 창조와 창조물의 완벽한 운행과 역사를 통하여 그분은 생명을 창조하시는 생명의 근원이시며, 만물의 생명을 주관하시고 통치하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셨다. 그리하여 성도의 첫 신앙고백이 바로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밉사오니”이다. 그분은 자신의 생명력을 피조물에게 내려주심으로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여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목적을 두셨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한 치 차이도 없이 이 지구의 모든 기식하는 생물들을 당신의 생명력으로 붙들고 계신다. 만물은 태초에 하나님이 주신 말씀의 법칙대로 하나님의 생명력으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 종류대로 생존하고 번성하며 자신들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드러내는 임무를 준행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시는 예수그리스도이시며,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셨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9,14,18). 그리하여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17:4-5). 창세전 아버지와 함께 하셨던 영화는 바로 순종과 죽음으로 죄인들을 저희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며, 그 일로 아버지의 한없는 사랑과 용서와 자비와 긍휼과 오래 참으시는 선하심과 의로우심이 만백성에게 전달되는 일임을 계시하셨다. 즉 예수님의 순종과 십자가 죽음으로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드러나게 됨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이 세상에 계시되고, 당신의 백성들이 그 영광의 하나님을 믿음으로 영화롭게 되는 일이 바로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행하신 ‘영광’이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곧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아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새 생명으로 잉태되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온전히 임하게 되는 십자가 구원 성취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자신이 한 알의 밀이 되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희생을 영광의 때라고 말씀하셨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2-23). 예수님은 아버지에게 향한 철저한 순종으로 희생제물이 되어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것이 곧 아버지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이며,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말미암아 당신의 백성들이 죄와 사망에서 살아 올라와 아버지와 영원히 함께 사는 화평이 이루어짐이 바로 아버지의 영광임을 제시하셨다. 그리하여 주님은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셨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또한 하나님의 백성은 예수그리스도의 발자취를 좇아 자기부인과 자기죽음의 십자가 삶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는 반사적 영광을 드러내는 하나님 절대적 의존자로 지어졌음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향하신 의로운 구원으로 영광을 받으시는 일은 창세전 묵시 속에서 이미 이루어진 일이며, 절대로 변경되는 일이 없기에 주님은 “창세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라고 말씀하셨다. 이 세상에서 전개되는 모든 일은 이미 하늘나라에서 이루어진 묵시대로 펼쳐지는 섭리이며, 이와 같은 예정론을 성경에서 주장하는 근본 원인과 이유가 바로 하나님의 본체가 영광과 사랑이시며, 선과 진리이시며,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목적으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기 때문이다. 이르기를,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사 43:7) 하나님은 처음부터 당신의 영광을 천하에 나타내시기 위해 당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으며, 당신의 백성을 이 세상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당신의 영광을 입혀주는 일로 당신의 백성으로부터 영광을 받으시기로 정하셨다고 말씀하신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다윗은 시편 104: 31에서, 우리가 창조되고 존재하는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이 될 뿐 아니라 기쁨과 즐거움이 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 기쁨과 생명의 원천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인식이다. 그분이 먼저 자신의 영광과 사랑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으며’(엡 1:4),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우심을 받은 자”(엡 2:10)들이다. 즉 우리는 그분의 구속의 목적으로 짓으심을 받았기에 우리에게 영광과 은혜를 입혀주시는 일이 그분의 행사이며 이로 인하여 그분은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시 104: 30-31)고 말하고 있다. 즉 바울이 지적한 봐와 같이,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 하사 만세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전 2: 7), 그러므로 우리는 다만 그분의 영광스러운 선택과 영광을 입혀주시는 구원 사역에 오직 감사와 찬양과 기쁨과 평강의 은혜를 누리는 것뿐이라고 바울은 말한 것이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5:2).
주님이 이 땅에서 살아내신 영광의 삶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영광의 삶은 아버지에게 향한 철저한 순종과 자신을 부인하는 낮아짐과 우리 죄인을 섬겨주시는 종이 되셔서 이 세상에서 온갖 고난을 다 받으시고 도살당하는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는 희생이었다. 이는 또한 성도가 추구하고 지향하게 되는 십자가 자기 부인의 삶으로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냄과 동시에 하늘나라 영광을 입는 고난의 삶임을 몸소 보여주셨다.
주님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하늘나라의 왕이시며 창조주이시며 역사를 주관하시고 세상을 심판하시는 만왕의 왕이시다. 그럼에도 하늘나라의 영광을 내려놓으시고 굳이 죄인의 몸을 빌려서 죄의 뿌리를 자신에게 전가시키시는 아기로 태어나셨으며, 우리의 죄를 짊어진 육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희생제물이 되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철저히 영원히 도말하여 주셨다. 주님은 이 세상에서 태어날 때부터 이 세상으로부터 멸시와 살해당하게 되는 핍박을 받으셨다(마 2:12-16). 이사야의 예언대로, 그분은 이 세상에서 온갖 “미움과 멸시를 받았으며, 아픔과 고통을 많이 겪으셨으며”(사 53:3), “굴욕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였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시고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아무런 대항을 하지 않으셨다”(사 53:7). 이것이 주님이 이 땅에서 살아내신 아버지의 영광을 나타내신 삶이었으며, 우리에게 하늘의 영광을 입혀주시기 위한 삶이었다. 그리하여 이사야는 “그가 상처 입은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짓밟힌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며 그가 맞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얻었고 그가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다”(사 53:5)라고 우리 죄인을 이 세상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영광을 입혀주시기 위하여 우리 주님이 이 세상에서 고난과 핍박과 죽음을 당하셨음을 정확하게 예언하였고 그대로 성취된 것이다.
우리 주님은 ‘종의 형체’로 죄인의 육을 입고 오셨으며, 섬김을 받는 왕궁에서 만 백성이 영접하는 왕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음으로 태어날 곳조차 없이 마구간에서 태어나셨다. 마구간은 짐승과 같은 죄인들이 사는 이 죄악 된 세상을 상징하며, 태어나자 구유에 눕히게 하신 것은 자신을 죄인에게 몽땅 내어주심으로 죄인들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구원을 받게 됨을 미리 알려주신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요 6:48)라고 선포하셨으며,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요 6:54-56)라고 그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하나가 되는 연합을 제시하여 주셨다. 주님은 이 세상에서 친히 종이 되셔서 각종 질병으로 죽어가는 자들을 고치셔서 정결한 자로 만들어 주셨으며, 굶주린 자들에게 하늘에서 떡을 내려 먹여주시고, 목마른 자에게는 생수를 마시게 하셨으며, 죄와 허물로 죽은 자를 자신의 권능으로 살려 내셨으며, 죄인을 살리기 위한 희생제물이 되셔서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으셨다. 주님이 이 세상에서 살아내신 그 인생은 예수님 자신의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종의 인생’이었다. 사랑하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자신의 전부를 온전히 내어주시는 ‘종의 삶’이었음을 나타내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전날 제자들을 모여 놓고 마지막 성찬에서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자신의 종 된 삶을 한 폭의 그림으로 보여주시고 제자들도 주님의 발자취를 좇아 증인의 삶을 살아내실 것을 명하셨다(마 28:18-20, 행 1:8).
주님은 반복하여 자신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하심, 전 생애 모두가 ‘아버지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으로 말씀하셨다(요 17:1,5; 12:28. ). 이는 아버지의 영광, 사랑의 본질과 성품과 권능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온전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즉 당신의 독생자를 저주의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이시더라도 죄인을 이 세상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당신의 자녀로 삼아 하늘나라에서 하나로 함께 영생을 살게 하시겠다는 죄인에게 향한 극지의 사랑이 죄인의 마음에 꽂혀진 것이며, 바로 하나님이 받으시는 영광이시다. 그리하여 바울은 예수님이 살아내신 영광의 삶에 대하여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6-11). 십자가 구원을 통하여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신실하심과 거룩하심과 인자하심과 자비와 긍휼과 인내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세상에 드러냈고 확증하심이 아버지가 받으시는 영광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제 내가 영광을 받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도 나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게 되었다”(요 13:31 현대인의 성경).
이 세상 가치관으로, 육신적으로 예수 십자가를 보면, 이 세상 권세자로부터 조롱과 멸시와 천대로 온갖 박해와 고난과 고통으로 무력하게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 가망이 없는 실패로 보이게 된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좇아 "호산나, 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치며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메시아로 환호하고 믿고 따랐던 그 무리들이 예수님이 무력하게 로마군에게 잡혀가 채찍에 맞고 춤 뱉음을 당하며 도살장에 끌러가는 연약한 양의 모습으로 나타나자 이내 예수님을 향하여 "십자가에 못을 박으소서"라고 분노로 외친 것이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창주주이시며 생명을 주관하시는 구원자이신 예수그리스도가 이와 같이 처참한 어린 양의 모습으로 무력하게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사야에서 미리 예언하여 주셨지만, 실제로 예수님이 눈앞에서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의 모습으로 반항도 기적도 능력도 행하지 않고 벌거벗은 모습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자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는 죽음에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라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모든 것이 회복되는 구원이었으며 새 생명의 시작이었다. 주님은 자신의 말씀대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하늘과 땅을 통치하시며 심판하시는 모든 권세로 만물을 주관하시고 계신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 이로소이다“(요 17:2),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며”(마 28:16),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요 5:22).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속죄의 십자가요 부활과 함께 영생의 새 생명을 입고 영화로운 아들로 영광스러운 신부로 잉태되는 절정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과 자신의 권능으로 죽음에서 부활하셨으며, 하늘과 땅을 통치하시고 심판하시는 모든 권세를 가지신 만왕의 왕으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셔서 만물을 주관하시며, 진리와 영생이심을 확증하심으로 부활의 영광을 천하에 나타내셨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공의와 사랑과 용서와 자비와 긍휼과 오래 참으심과 온유와 같은 하나님의 성품과 우리에게 향한 구원과 생명의 사랑이 농축이 되어 있었다. 아버지의 뜻은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이 땅에 희생 제물로 보내셔서 당신이 택하신 백성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하늘의 영원한 생명으로 잉태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하나로 연합을 이루시는 영광의 뜻을 성취하시는데 있었다. 즉 한 분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세상 끝까지 흩어져 있는 당신의 백성들이 죄와 사망에서 살아 올라오는 가장 의로운 선을 이루시는 사랑의 십자가이기에 주님은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영광의 때로 말씀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영광’은 그분이 스스로 지니고 계시는 본질이시며 속성과 성품이시다. 그분은 선하시며 의로우시며, 거룩하시며 용서와 사랑이시며, 생명과 진리이시며, 만유의 영광을 지니고 계시는 영광스러운 분이시다. 다윗의 고백과 같이 우리는 다만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 뿐이다 (시 29: 2). 그분은 스스로 계시는 그 자체만으로 영광이시기에 우리가 무엇인가를 해 드림으로 영광스러워지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이 원하는 것은 죄인이 자신의 실체를 온전히 인식하고 그분의 사랑을 깨닫고 그분이 바로 나를 낳아주신 아버지라고 고백하는 그 믿음 위에서 성령의 거듭남을 통하여 그분과 하나로 연합을 이루는 일이며, 그분에게는 영광이 되는 일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말씀하셨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 23-26).
성도가 추구하게 되는 영광의 삶
성도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는 자로 지음을 받았다(사 43:7). 성도에게 요구되는 영광의 삶이란 바로 우리 주님이 살아내신 십자가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삶이다. 우리 주님은 이 세상에서 영광과 섬김을 받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시며, 또한 이 세상에서 왕 노릇하기 위해 강력한 군주로 오신 분도 아니셨다. 오히려 하늘나라 영광의 자리에서 죄악과 죽음으로 차 있는 이 땅으로 내려오셔서 자기를 비우시고 세상 죄를 짊어지신 희생양으로 오셨다(요1:29). 자신을 세상 죄인들에게 내어주어 온갖 고난과 멸시와 조롱과 핍박과 매 맞음을 당하시고 도살당하는 양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희생으로 당신의 백성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주셨으며, 당신의 백성을 아버지의 아들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잉태하는 새 생명을 부어주시기 위해 부활하셔서 영생의 주가 되셨다. 그리고 우리 성도도 주님이 살아내신 십자가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삶으로 이끌려가게 됨을 말씀하여 주셨다.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로 말미암아 너희가 권력자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그들에게 증거가 되려 함이라”(막 13:9).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눅10:3). 분명 양이 세상 이리 속에 들어가게 되면, 이리에게 잡혀 뜯기고 찢겨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게 되어 있음에도 이리 가운데로 보낸다고 말씀하신다. 구약에서 믿음의 선지자들이 그 길을 갔으며, 신약에서도 주님의 제자들과 사도들이 그 길을 갔고, 우리 믿음의 선배들도 모두 세상 이리에게 잡혀 먹히는 어린 양의 길을 순종으로 받아들임으로 그 피의 씨앗으로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된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이 세상에서 당하는 환난과 핍박이 바로 주님을 증거하는 일이며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라고 말한 것이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그러므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이란, 바로 우리 주님이 살아내신 철저한 순종과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십자가 삶이며, 그 길로 성도를 이끌고 가시기 위해 우리 주님이 친히 성령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우리의 모든 삶을 주관하고 계신다. 성도는 세상 악과 맞서서 싸우는 자도 아니요, 또한 빛과 소금의 착하 행실로 세상 부패를 방지하는 정화로, 세상 어둠을 밝히는 빛의 역할로 인정과 칭찬과 모델로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받는 위인이 아니다. 반대로 성도는 멸망으로 썩어가는 이 세상에서 분리된 썩지 아니하는 소금이며, 이 어둠의 멸망으로부터 구원받아 하늘나라로 입성하는 빛의 자녀이다. 이 세상으로부터 분리되는 그 빛과 소금의 삶은 세상이 공격하는 모든 고난과 핍박과 조롱과 살해를 감당하는 십자가 삶으로 세상을 무력하게 만드는 하늘나라 원리의 삶이며 주님이 성도에게 원하는 삶이다.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어떤 것도 자랑할 수 없나니 그분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있고 나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즉 하나님을 향해 살아올라온 자는 이 세상에 대하여서는 죽은 자이기에 이 세상은 나에 대하여 죽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삶은, 세상 것이 털리는 가난으로, 자신의 존재가치가 부정당하는 애통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온유로, 이 세상의 양식을 끊는 굶주림의 금식으로 옛사람이 죽고, 오직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오직 진리의 말씀만을 받아먹는 진리의 아들로 완성의 지점까지 끌려가는 삶이다.
그리하여 우리 주님은 성령으로 우리 안에 친히 뚫고 들어오셔서 우리 안에서 하나의 동행으로 모든 삶을 주관하셔서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순종으로 십자가 삶으로 이끌고 가시며, 그 삶이 때로는 하나님의 징계와 시험과 환난으로, 때로는 이 세상에서 당하게 되는 멸시와 핍박과 고난으로 나타나며, 이는 우리에게 영광을 입혀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선한 의도임을 제시하고 있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 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즉 성도는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자로 완성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찬송하는 자로 운명되어 있다는 말씀이다. 때문에 성도는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사는 자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존재하며, 그 영광은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환경과 환난과 시련과 징계와 이 세상에서 당하게 되는 미움과 멸시와 천대와 핍박과 죽음을 순종으로 받아들이며, 주님의 성품을 따라 사랑과 용서와 자비와 긍휼과 겸손과 온유로 이웃을 대하며, 자기부인의 삶으로 잘 견디어 내는 믿음이며, 거기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세상에 밝히 드러남으로 하나님의 뜻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일을 하시기 위해 성령님이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내 의지와 내 노력과 내 열심이 아니라 성령님의 열심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자로 완성하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