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4:9-16
9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10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11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2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 뿐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에게도니라 13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14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16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사도 바울은 계속 집요하게 유대 율법주의를 폭격하면서, 오직 은혜와 믿음의 복음만을 고집하며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4장 9절부터 또 다시 할례와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서, 아브라함이 의롭다 여기심을 받은 것은 할례 받기 전이냐? 아니면 할례 받은 후냐? 라는 물음을 던지면서 할례로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라고 복음의 본질적 핵심을 또다시 강조한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할례를 율법을 하나님의 선민임을 보증해 주고 구별해 주고 의롭게 되는 중요한 요소로 여겨왔기 때문에, 바울은 본 절에서 또 다시 할례와 율법의 문제를 언급하여 유대 율법주의를 부순 것이다.
아브라함이 받은 행복은 어디에서 왔는가? 할례에서인가 아니면 믿음에서 인가?
9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10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바울은 앞 절에서 무엇이 행복인지를 확실히 제시하고, 그 복을 아브라함이 할례로 받은 것이 아니라 할례와 전혀 상관없이 오직 믿음으로 받은 것이라고 못을 박는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4:5-8). 즉 죄인으로 태어난 본능으로 계속 불법을 행하고 있음에도,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죽을 때까지 계속 죄를 짓고 있음에도,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분명 죄인으로 정죄 받아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음에도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이 은혜의 복음을 믿는 자가 복된 자이며 아브라함이 이 복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덮어버림으로 모든 죄를 간과하시고, 그 죄인을 은혜로 감싸주시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깨끗한 의의 옷을 입혀서 의인으로 여겨서 당신과 하나가 되어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사는 영생이 곧 ‘행복’이며, 그 행복을 아브라함이 할례로 받은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았다고 확실하게 제시한다.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4:9-10).
아브라함의 복은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찾아와 주시는 부르심에서 시작된다. 온 인류 중에서 우상을 섬기고 있었던 아브라함 한 사람에게만 당신을 계시하신 것은, 이 세상 중에 당신이 택하신 백성만을 구원하여 주실 것이며, 그 구원은 하나님 홀로 성취하셔서 오직 은혜와 믿음의 원리로 입혀 주실 것임을 나타내시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이 세상을 신으로 삼고 사는 완전히 불가능한 상태에 처해 있을 때 하나님께서 친히 찾아와 주셔서 일방적으로 ‘의롭다’는 인을 쳐 주시고, ‘복의 근원’으로 세워 주시겠다는 언약을 선포하신 것이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12:1-3). 아직 아브라함이 아무것도 행한 것 없는 또한 할 수도 없는 죄인의 상태에서 복을 받는 은혜를 먼저 입은 것이다. 그리고 복의 근원으로 세워진 아브라함의 인생은 험악한 나그네 고생길이었다. 100 세에 가까운 인생길에서 아브라함은 무능함과 무지함과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실수를 거듭하면서 불가능한 자로, ‘없음’으로 내려가게 되었을 때, 더디어 약속하신 언약의 자손 이삭을 99세에 가지게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받치라고 명하시고, 아브라함의 인생은 그렇게 자신의 아들의 심장에 칼을 꽂는 절정으로 끝난 것이다. 그리고 복의 근원이 된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이 역사 속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의 발자취를 쫓아 십자가 자기 부인의 삶으로 끌려가는 것이다.
성도가 추구하는 참 행복이란?
성경이 말씀해주는 진정한 복은 하늘나라에서 영원을 사는 영생이다. 즉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십자가로 구원의 의를 성취하여 주시고, 부활하셔서 성령으로 우리 안으로 뚫고 들어오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새롭게 태어나게 하시고, 하나로 함몰하여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함께 사는 은혜 입혀 주심이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에 갇혀 있는 이 세상에는 처음부터 행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창세기 첫 시작부터 계시하여 주셨다(창1:2). 그 사실을 보여주고 알게 하시기 위해 첫 인간에게 ‘선악과’를 주셨으며, 흙으로 육체를 입은 인간은 하나님의 절대적 의존적 존재로 하나님을 떠나서는 죽음이며 생명이 없음을 ‘선악과’로 증명하여 주셨다. 인간 자체가 죽은 흙으로 빗어진 존재이기에 생명의 말씀을 먹지 않으면, 즉 생명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곧 죽음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해 순종하라는 첫 계명을 주신 것이며, 육신이 연약하여 말씀에 순종할 수가 없음으로, 바로 선악과 옆에 있는 영생의 복으로 주신 생명나무의 과실을 스스로 거부하고, 죄와 죽음이 선포된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 복을 만들겠다고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자초한 것은 저주와 죽음이었다. 땅도 인간의 타락으로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내어 인간을 삼키는 무덤이 된 것이다.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붙들고 계시지 않는다면 이내 파멸임을 증명하셨다. 흙으로 만들어진 인간에게 생기를 부어주지 않는다면 생명이 없는 흙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추구하고 쫓고 쟁취하려는 ‘복’은 이 세상에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복은 하늘나라에서 영원을 사는 “생명”이다. 반대로 인간이 추구하는 복은 잠깐 있다가 곧 썩어서 없어질 육체의 안일과 탐심을 채우는 것이며, 삶의 질을 높혀 복을 누리겠다고 만들어낸 문명, 기술, 과학, 문화, 오락같은 것들이 사실은 지구를 파멸로 몰아가는 멸망의 자초이다. 모든 인간들이 갖고 싶어 하는 돈, 인기, 명예, 권력 같은 것들은 지옥으로 밀어 넣기 위해 마귀가 던져주는 위조품이다. 인간들이 그 모조품 행복을 만들고 쟁취하기 위해 자신들의 전 인생을 걸고 분주하게 살아가고 있다. 자신들이 쫓고 있는 그 모조품 행복이 바로 사망이며 지옥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바로 인간의 무지이며 어리석음이다. 아무런 조건도, 대가도, 노력도, 업적도, 공로도 없이, 오직 그분만이 구원이시며 생명임을 믿는 믿음으로 영원을 사는 하늘나라의 복을 준다고 해도 인간들은 열려져 있는 천국으로 들어가지 않더라는 것이다.
첫 창조의 세상은, 멸망되기 위해 창조가 된 것이며 불사르기 위해,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잠시 보존하여 두신 것임을(벧후 3:7,12) 깨닫지 못하는 것이 바로 육신의 한계이다. 이 세상은 창조된 피조물이며, 태초부터 계시는 만들어지지 않은 영원한 하늘나라를 설명하여 보여주시기 위한 역할로 잠시 존재하는 것뿐이다. 그 역할이 끝나면 첫 창조와 첫 창조 아래의 모든 것들은 없음의 자리로 귀결됨을 말씀해 주고 있다. 그러니 ‘없음’에서 어찌 영원한 생명의 복이 있을 수가 있겠는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역사이며 인생이다. 이 없음의 세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고 소망하고 붙드는 자가 복된 자라는 것이다. 성도는 이 세상 모조품을 경험하면서 자신의 실체를 깨닫는 것이며, 하나님의 선택 밖의 존재들의 행보와 열매와 결과물을 보면서 죄가 무엇이며 그 죄의 심판이 얼마나 무시한지를 깨닫는 것이다. 만물은 우리에게 구원과 생명을 주시는 예수그리스도를 나타내시기 위해 창조된 것임을 바울은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다. “그는(예수그리스도)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5-17). 만물은 예수로 말미암고, 예수로 비롯되어, 예수를 증거하기 위해 존재함으로, 하늘의 복을 받은 성도는 이 세상에서 예수그리스도를 알고 배우고 깨닫고,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땅 끝까지 증거하는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
성도는 이미 완료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복을 받고 이 세상에서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얻어 의롭다함을 받는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고 전파하는 역할로 살아가는 것이며, 오직 예수의 피로만이 구원과 생명이 있으며, 복의 근원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엡 1:3)함과 같이 복은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이는 창세전에 정하신 뜻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 창세전에 복을 입혀주시기로 정하시고, 그 복을 역사속에서 설명하여 나타내시기 위해, 먼저 율법과 제사와 할례를 주셔서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만이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은혜의 풍성한 복음을 설명해 주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세상은 초개처럼 말려 없어지는 불사름으로 종말을 고할 것이기에 절대로 이 세상에 행복이 없다는 것을 증거하며 인간의 실체가 바로 흙에 불과한 ‘없음’임을 자각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성도의 과제이며 세상에 알리는 것이 사명이다. 인생의 허무함과 공허와 탄식과 통곡을 경험하면서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깨닫고 믿음으로 증거하는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 이 역사와 인생은 복 받은 성도의 처음 자리 확인과 십자가 피를 의지하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임을 깨닫고 증거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아브라함에게 왜 하필이면 생식기 끝을 자르는 할례를 명하셨을까?
10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11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아브라함의 할례는 창세기 17장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그의 나이가 99세 이었다(창17:23-24). 그런데 창세기 15장에서 아직 할례를 받기 거의 25년 전에, 이미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았다’(창 15:6)라고 진술하고 있다. 즉 아브라함은 율법이 있기 전에, 할례를 받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고 믿음의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다”(4:11)라고 확실히 밝힘으로,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을 쫓아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을 것인데, 어찌하여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고집하면서 믿음을 쫓지 않고 율법을 지켜서, 할례를 받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우길 수가 있겠는가? 라는 질문을 던진 것이다.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로마서 4:9-10). 아브라함이 의롭다 여기심을 받은 것은 믿음이지 너희가 고집하는 할레나 율법지킴이 아니라고 확실하게 못을 박는다. 한마디로, 아브라함이 의롭다 여기심을 받은 것은 믿음이지 너희들이 주장하는 율법과 할례와 전혀 상관이 없다는 논리를 펼치고 있다.
이는 당시 초대 교회 시대에 유대인들이 여전히 자신들이 지켜온 할례를 고집하며 이방인들에게도 할례를 요구할 정도로 심각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행 15:1). 또한 베드로마저도 무할례자들(이방인들)과 함께 애찬을 나누다가 할례자들이 들어오자 두려워하여 그 자리를 빠져나갈 정도로(갈 2:12) 초대 교회 당시 할례자와 무할례자에 대한 편견과 차별과 같은 팽배로 은혜의 복음 전파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하여, 바울은 명백하게 확실하게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복음의 본질적 핵심을 강력하게 주장한 것이며, 유대인들이 구원 받은 선민으로 인정하는 유일한 증표로 믿고 있는 할례를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을 등장시켜 철저히 부수고 있었다. “아브라함이 할례라는 표를 받았는데, 그것은 그가 할례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이미 얻은 믿음의 의를 확증하는 것이었습니다”(4 :11 새번역). 즉 ‘할례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확증하는 표’라고 확실히 제시하여 잘못된 유대 율법주의를 완전히 깨고 있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그렇다면, 믿음으로 의롭게 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왜 할례를 명하셨는가? 구원을 주시기 위해 할례를 명하신 것이 아닌가?’ 라고 질문할 것임을 미리 알고, 다음 구절에서 그 답을 내놓은 것이다.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 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에게도니라”(4:11-12).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 합 2:4)함과 같이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함을 확증하는 언약의 표징으로 할례를 주셨다는 선고이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창 17:10-11). 그런데 유대인들은 할례가 가리키는 십자가 복음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할례를 의롭게 되는 증표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우월성을 자랑하는 방패로 삼고 은혜의 복음을 욕되게 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또 다시 반복하여 아브라함은 할례의 조상이 아니라 믿음의 조상이며, 때문에 그의 후손들도 오직 은혜의 덮음으로 오직 십자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 받아 믿음의 후손이 된다고 선포한 것이다. 이는 또한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며 답이다. 즉 성도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면 왜 굳이 이 세상에서 할례라는 인생을 경험하게 하시는가?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명하신 것은, 그 구원의 현실이 하늘의 묵시에서 이미 이루어진 뜻이기 때문이며; 절대로 변개될 수 없는 반드시 십자가로 성취되는 완료적인 현실임을 확증하는 표지로 할례를 주셨음을 확실히 제시하고 있다. 장차 하나님 자신이 십자가에서 쪼개지셔서 반드시 당신의 백성을 이 세상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주시겠다는 언약의 성취를 보장하는 일방적인 언약의 표시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쪼갠 제물 사이로 아브라함을 남겨 두시고 홀로 지나가심으로, 장차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홀로 쪼개지는 할례로 구원의 언약을 성취하여 주실 것임을 할례의 언약으로 확증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세우신 언약에 할례라는 도장을 찍어주심으로 이는 중도에서 포기되거나 멈추거나 변경 될 수 없는 반드시 성취되는 영원한 언약이라는 의미에서 도장을 찍는 역할로 주신 것이 바로 할례이다. 그래서 바울은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구약시대 할례는 십자가 구원 성취를 언약하는 신약시대의 복음을 제시하는 의식이었다. 이는 또한 내 옛사람 죄인이 예수와 함께 죽고, 하나님의 자녀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새로운 창조가 일어나는 성령 거듭남의 표시였으며, 이 세상 부정한 자들로부터 즉 마귀의 자식과 구별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거룩한 성에 들어감을 구별해 주시는 표시였다. 그리고 신약 시대에 와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으므로 할례가 담당한 역할이 완성되었기에, 이제 더는 할례가 아니라 오직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 받아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다. 율법과 할례는 복음을 나타내고 확증하고 주시기 위한 모형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율법적 행위로가 아니며, 할례나 무할례나 상관없이 오직 십자가에서 할례를 받으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은혜를 입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임을 바울은 집요하게도 반복하여 외친 것이다.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4:11).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 암이라”(갈 2:16). 바울은 율법과 할례와 제사를 맡았다고 자고하며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우월성을 악용하여 ‘나’에게 유익한 종교를 만들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갈취하며 자신들의 의와 자부심을 지키는 유대 율법주의 자들을 향하여, 너희 자신들이 행한 악행으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도 제사도 할례도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지 않았는가? 그러니 너희들이 어찌 할례의 유익이 있다고 말하며, 율법을 맡았다고 우길 수가 있으며, 하나님의 선민이라 감히 말할 수가 있겠는가! 라고 일갈한 것이다. 율법과 제사와 할례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고 해서 너희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일은 하나도 없었으며, 오히려 예수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데 걸림돌이 되었고, 너희 마음이 돌같이 강퍅하여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으니 할례가 너희에게 무슨 유익이 있으며 율법을 지켰다고 우기는 너희가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이루게 하였다(4:15)라고 사정없이 질책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명하신 의도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나이 거의100세에 이삭을 주시겠다는 약속과 할례를 명하신 것은, 하늘의 뭇별처럼 많은 후손을 주시겠다는 그 후손은 인간의 생식기능으로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생식기능을 상실한 상태에서 하나님이 준비하여 놓으신 당신의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후손으로 보내주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다는 것을 나타내시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이 자신의 생식능력으로 만들어 낸 이스마엘을 제외시키고 13년 동안 침묵하신 후, 생식기능이 완전히 끊어진 상태에서 하나님이 준비하신 이삭의 탄생을 알리심과 동시에 할례를 명하신 것이다. 그렇게 먼저 아브라함을 고자로 만드신 후 이삭을 주심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됨을 나타내셨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뭇별처럼 셀 수 없이 자손을 주신다고 하신 그 자손은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가리킨 것이다. 이를 바울이 증거하기를,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갈3:16).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자손은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별처럼 확장되는 하늘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되는 복음을 제시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그 믿음의 혈통으로 예수님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셨으며, 마찬가지로 생식기능과 상관없이 성령으로 잉태됨으로 장차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육신의 혈통으로나 할례나 율법적 행위로가 아니라 반드시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며, 이를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전제 조건은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낳아 주시는 것, 그리스도의 영으로 새로운 창조가 일어나는 성령거듭남을 말씀하고 있다. 요한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을 배제하여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니라”라고 선포함으로, 하나님께서 먼저 나를 택하셔서 낳아주셨기에 그분이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나는 그분의 아들이 된 것이며, 그분이 나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당연히 그분의 믿음으로 당신의 자녀에 합당한 가르침으로 기르시며, 모든 삶을 주관하시는 동행으로 하늘나라로 인도하신다. 아기가 엄마를 선택하여 태어날 수가 없는 것과 같이 우리의 선택으로 하나님을 믿어주어서 자녀가 되는 일은 절대로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 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 창세전부터 우리의 영이 예수그리스도 생명 안에서 이미 의로운 자로 있었다고 말한다. 인간이 열심히 노력하여 율법을 지켜 행하는 행위의 의로움으로 또는 혈통으로 또는 할례와 같은 것으로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르기를,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라고 정확하게 은혜의 복음을 선언하고 있다.
두 번째로, 할례로 피를 흘리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말로만 하시는 언약이 아니라 피의 언약이며,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과 생명이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이 구원을 받은 것은 오직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쪼개시는 할례를 받으심으로 그분의 의로운 피로 모든 죄가 사하여짐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아 죄인이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게 되는 화평을 할례의 언약으로 제시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죄인이 구원받아 의롭다 여기심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은 것은 전적으로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는 믿는 믿음뿐임을 할례로 제시한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아브라함이 할례라는 표를 받았는데, 그것은 그가 할례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이미 얻은 믿음의 의를 확증하는 것이었다(4:11)라고 확실하게 말해주고 있다. 예수님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 8:56)라고 말씀하셨다. 즉 아브라함은 자신이 독자 이삭을 제물로 드린 것과 같이, 이천년 후에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희생 제물로 받으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뭇별처럼 많은 후손들이 십자가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과 생명을 얻게 되는 은혜의 복음 성취를 미리 바라보고 기뻐하였다는 말씀이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의 인생은 하나님의 은혜의 덮음으로, 하나님의 믿음으로 ‘복의 근원이 되는 의’를 입혀주시는데서 출발한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4:9)라고 아브라함의 복의 근원은 ‘하나님의 믿음으로’ 의롭게 여겨주심에서 출발한 것임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의 인생 전체가 바로 할례 받은, 즉 세상에서 구별된 자로 하나님의 믿음으로 이끌러가는 나그네의 고난의 삶이었으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열심으로 믿음의 조상이 되었음을 제시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라고 친히 아브라함의 인생과 동행하시며 그의 삶을 주관하여 주실 것임을 약속하셨다. 그분은 지금 이 순간에도 성령으로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심으로 그분과 하나로 동행하는 그 삷 자체가 바로 복된 자의 행복이다.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이라
12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 뿐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에게 도니라 13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바울이 ‘아브라함이 할례로 조상이 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조상이 되었다’라고 반복하여 믿음을 강조하고 할례를 부수면서도, 아브라함이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다”(4:12)라고 말하는 진정한 의미는 다음과 같다.
첫째,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인 동시에 할례자의 조상임을 인정하는 것은 그가 할례를 받은 첫 조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할례로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았음’을 확증하는 표시로 할례를 받음으로 장차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할례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 구원의 의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것을 확증하는 의도에서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라고 부른 것이다.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4:11). 그러므로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없이 오직 독생자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의 의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되며 의롭다 여김을 받는 영적 할례를 제시한 것이다.
둘째, 아브라함이 할례자의 조상이 된 것은, 예수그리스도께서 할례를 받은 아브라함의 혈통을 따라 오심으로 예수그리스도는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의 메시아가 아니라 창세전 택함을 받은 당신의 백성들을 이 세상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분이심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즉 당신의 백성을 이 세상과 구별하시는 성별의 의미에서 할례를 주셨기에 그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은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된 것이다. 즉 당신의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쪼개서 희생 제물로 받으심으로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들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쪼개짐에서 살아나게 되는 하나님의 의를 제시한다.
마지막으로, 아브라함의 혈통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저희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홀로 쪼개지는 할례를 받으심으로, 땅 끝까지 흩어져있는 당신에게 속한 자들을 이 세상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어 당신의 품안으로 끌어 모으시기 위함이기에 그리스도는 만백성의 구원자이심을 나타내셨으며, 오직 십자가에서 할례를 받으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다.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4:13). 즉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모델로 사용하여 인간의 모든 죄악을 폭로하고 하나님의 심판아래 놓여있음을 깨닫게 함으로, 구원은 오직 십자가에서 쪼개진 예수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믿음으로 은혜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에게” 임하는 복음임을 제시한다. 즉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가릴 것 없이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율법도 제사도 할례도 아니며, 혈통과 사람의 의지나 노력으로 되는 것
도 아니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를 믿는 믿음으로만이 성취됨을 확증하는 역할로 할례를 주셨기에 그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이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됨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제부터 하나님의 구원이 유대인 민족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땅 끝까지 이방 민족 가운데 하나님이 정하여 놓으신 영적 백성이 영적 할례인 성령거듭남으로 이루어짐을 제시한다.
바울이 말하는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이라는 의미는, 할례자나 무할례자나,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 없이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살았던 믿음의 노선을 따라 믿음으로 사는 자만이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복음을 제시한다. 예수님도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요 8:39)라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랑하면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아 살았어야 생명이 있는데 너희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전혀 본받지 않고 오히려 진리인 나를 죽이려고 한다고 말씀하셨다.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요 8:40).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마귀의 특징대로 정확하게 마귀의 행사를 하는 죄의 종으로 있었기에(요 8:44), 절대로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 거할 수없으며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수 없다고 선고하셨다.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요 8:35).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마 23:33). 이에 바울도 확실하게 율법과 할례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을 쫓아 오직 믿음으로 후사가 된다고 밝힌 것이다.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4:13).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은 율법의 의도 할례의 표도 아니며, “오직 믿음의 의”뿐이라고 선포한다.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14절 )
바울은 율법적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바로 율법에 속하여 ‘율법의 종노릇하는’ 저주 아래 있는 자들임을 반복하여 지적하고 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갈 3:10-11). 그들에게는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라는 복음이 필요 없음으로 구원의 약속이 페하여 졌다고 말하고 있다.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4:14).
“믿음이 헛것이 되고 약속은 페하여 졌다”라고 말하는 것은, 믿음의 대상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아무런 효력을 발생할 수 없게 됨으로 구원의 언약이 그들에게는 페하여 진 것이며 아브라함의 후사가 아니다 라는 충격적인 말씀을 던진 것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후사는 율법 지킴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르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3:28). 분명히 믿음의 후사는 은혜를 입어 하나님의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일이기에 인간들의 그 어떤 행위도 보탬이 될 수가 없다는 선언이다. 만약에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은혜와 믿음에 인간의 행위를 보조로 보탠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의로운 구원에 죄인의 죄를 덧붙이는 짓이며 은혜를 욕되게 하는 용납할 수 없는 짓이기에 바울은 반복하여 율법적 행위를 부정하고 부수고 구원이 없다고 선포한다. 그리하여 주님은 율법적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유대 율법주의자들을 향하여 그 율법적 행위가 바로 “마귀 행사”이며 너희는 마귀의 자식이며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요 8:44, 마 23:33). 이를 바울은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믿음 외에 율법적 행위를 복음이라고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고 경고한 것이다 (갈 1:7-9).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맺은 구원의 언약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행위를 배제하여 오직 하나님의 믿음과 열심에 의해 성취됨을 아브라함의 후사에게 나타내어 보여주시기 위해, 율법을 주시기 전에, 할례를 명하시기 전에, 먼저 아브라함에게 ‘의롭다’는 도장을 찍고, 하나님의 믿음에 합당한 조상으로 빚어내신 것이다. 아브라함은 평생 살아있는 동안 율법을 받지 않았음에도,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불신과 실수투성이로 아무것도 내 놓을 수 없는 무지하고 불가능한 연약한 자였지만, 하나님의 믿음이 그를 붙들고 그의 삶을 주관하셨기에,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리라”(창 26:5)라고 율법을 지켜 행한 자로 인정하여 주신 것이다. 이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그의 믿음을 쫓아 율법의 완성자로 오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의 의를 믿는 믿음으로 동일하게 율법을 지킨 자로 인처 주실 것이며 의롭다 여겨주실 것임을 미리 계시하여 주셨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을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받치는 믿음의 절정까지 끌고 가심으로 장차 예수그리스도의 회생 제물로 그의 후손들이 오직 은혜를 입어 믿음으로 구원받게 됨을 몸소 체험하게 하신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믿음이 독자 이삭을 희생 제물로 드리는 절정으로 이끌고 가심으로,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서 드리는 독생자 예수그리스도의 희생 제물로 이루어짐을 아브라함이 더디어 깨닫고 믿게 되었음으로, 이를 하나님은 율법을 다 이룬 자로 말씀하신 것이며, 이를 바울은 ‘믿음으로 율법을 세운다’(롬 3:31)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으로는 절대로 하늘나라 상속자가 될 수 없으며, 만약 그렇게 된다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4:14)라고 말한 것이며, 그렇게도 반복하여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는 복음만을 외친 것이다. 사도 요한도 이 원리를 이렇게 설명해 주고 있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요일 3:22-24). 율법이 가리키는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믿음이 곧 율법을 지켜 행한 것이라고 말한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홀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믿음이시기에 구원의 언약과 약속이 주어졌고, 그 언약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보장으로 할례를 주셨으며,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쪼개지는 할례를 받으심으로 당신의 백성을 율법의 정죄와 심판에서 구원하여 주셨다. 그러므로 십자가로 성취하신 예수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믿음이 곧 성도가 구원과 영생을 얻게 되는 믿음이며, 그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새롭게 태어나는 성령거듭남을 체험하며, 그렇게 새롭게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는 오직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천국의 백성으로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게 된다. 이와 같은 성도의 믿음 여정을 아브라함의 전 인생으로 상세히 그러주셨으며, 아브라함의 인생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믿음에 의해 끌려가는 인생이었고, 그 과정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내 놓은 모든 행위, 가능성, 열심과 의지를 부셔버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불가능한 자로, ‘없음’으로 99세가 되었을 때 13년 동안 침묵하시든 하나님이 그에게 독자 이삭을 주셔서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주신 것이다.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16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한다”는 말씀은, 율법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지킬 수 없는 법을 지킬 수 있다고 하나님의 은혜에 도전하는 죄인의 행위를 내 놓기 때문이며, 율법이 가리키는 예수그리스도를 믿은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자신들의 율법적 행위로 쌓아놓은 의와 업적을 지키기 위해 은혜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대적하고 핍박하여 십자가에 못을 박는 악행까지 가게 됨으로 스스로 하나님의 진노를 자초하였기 때문이다. 즉 율법은 구원의 역할로 주신 것이 아니라, 반대로 죄인은 하나님의 의로운 법을 지킬 수 없음으로 행위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으며, 율법으로는 정죄와 심판과 멸망의 대상임을 깨닫고 인정하라는 의도였다(신 28:58-65). 모든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나 죄만을 생산해내는 철저한 죄인이기에 정죄와 심판의 대상임을 인정하는 기능으로 주신 것이다. 그래서 율법을 받은 모세의 직분을 '정죄의 직분'(고후 3:9)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렇게 죄인이 하나님의 의로운 율법을 지켜 행할 수 없어 정죄와 심판아래 놓여 있었기에, 예수님이 율법의 완성자로 오셔서 죄인을 대신하여 율법의 정죄와 심판을 십자가에서 받아 내신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지심을 '율법의 저주'를 담당한 것이며(갈 3:13), 그분이 곧 “은혜와 진리”임을 제시한 것이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7).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라는 말씀은, 아브라함이 그의 평생을 율법에 묶인 종으로 산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의 원리에 따라 법이 없이 자유한 자의 삶으로 ‘믿음의 조상’이라는 칭함을 받은 것임을 말한다. “법이 없으면 법을 어기는 일도 없게 됩니다. 법이 있으면 법을 어기게 되어 하느님의 진노를 사게 마련입니다”(4:15 공동번역). 마찬가지로 노아는 율법도 할례에 대한 규례도 받지 않고 살았던 사람이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의인'으로 인정되어(창 6:9) 온 인류가 전멸되는 홍수 심판에서 구원을 받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에녹도 노아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냄으로(창 5:24),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히 11:5)라고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죽음의 권세를 물리친 삶을 살았다고 증거하고 있다. 그들이 의인으로 또는 완전한 자로 칭함을 받은 것은 율법적 판단에 따른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이 동행하여 주시는 은혜의 덮음과 하나님의 믿음 때문이었다. 이를 가리켜 바울은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4:15)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 뜻은, 율법아래 있는 자는 율법의 정죄와 심판의 대상으로 구원이 없는 멸망이지만, 율법이 없는 은혜 아래 있는 자는 영원한 구원과 영생이 주어짐을 제시한다. 즉 율법에 묶여서 죄의 종으로 사는 자는 멸망과 심판이요 은혜 아래 있어 믿음으로 사는 자는 구원과 영생임을 제시한다. 그리하여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이루게 하는 율법아래 있지 말고 율법을 완성하여 주시고 또한 페하여 주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은혜 안에 거하라고 말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5:1-2).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 5:4-6). 그러므로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4:15)라는 결론을 내 놓은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라는 말씀은, 혈통으로 따지면 아브라함은 유대인의 조상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의롭다 여기심을 받아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된 것은, 혈통도 아니고 율법도 아니고 할례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믿음의 원리로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 주셨기에, 아브라함의 후손도 동일하게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 후사가 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4:16)라고 혈통을 초월한 은혜의 복음을 제시한다. 우리가 믿음의 후사가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속하여 있었기 때문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함몰되어 영생을 사는 은혜를 입혀주시기 위하여 ‘믿음’을 주셨기 때문에 오직 믿음으로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된다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믿음의 후사가 되는 일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죄인에게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입혀주시기로 정하셨기에 그 사랑의 은혜를 죄인에게 입혀주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정죄와 심판을 죄인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받아내시고, 십자가로 성취하신 구원의 의를 믿는 믿음을 주셔서 후사가 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즉 구원에 이르는 은혜를 입혀주시기 위해 먼저 아브라함을 믿음으로 부르시고 모든 사람의 조상으로 세워주셨으며, 그러한 의미에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일컫는 것이며, 따라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쫓아 믿음으로만이 아브라함의 후사라고 일컫을 받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4:16)함과 같이, 율법을 받은 유대인이나, 율법을 받지 못한 이방인이나 차별 없이 오직 십자가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됨으로, 바울은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고 “우리”라는 표현으로 믿음의 원리를 따르는 모든 족속을 포함한 믿음의 공동체로 말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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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5:1-2) [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1) | 2023.09.12 |
로마서 (4:21-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0) | 2023.08.06 |
로마사 (4: 1-8) 하나님의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아브라함과 다윗 /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의 복 (0) | 2023.06.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