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4:1-8
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5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7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바울은 3장에서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적 행위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을 믿는 믿음에 근거함을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롬 3:22, 28). 이를 증명하기 위해, 바울은 율법 없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믿음으로 믿음의 조상이 된 아브라함과, 율법 아래 놓인 다윗이 행위가 아니라 십자가 구원의 의를 믿어 죄 사함을 받았음을 제시하여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복음을 증거하고 있다. 즉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이스라엘 왕인 다윗도 모두가 행함이 아닌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증거이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4:1-8).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믿음이 아브라함을 의로 여겨주셨다
아브라함이 의롭다함을 받은 것은 창세기 15장 6절의 말씀대로 ‘믿음’ 때문이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낸 여호와로라”(창 15:6-7). 하나님께서 먼저 아브라함을 찾아가 갈대아 우르에세 이끌어내심으로 그의 인생은 하나님의 믿음으로 출발한 것임을 바울은 제시하고 있다.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롭게 되었더라면, 그에게는 자랑할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그것을 의로움으로 인정하여 주셨다" 하였습니다” (롬 4:2-3 새번역). 즉 아브라함이 자신의 행위와 의지로 하나님을 믿은 대가로 의롭다고 인정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믿음이 그를 세상에서 불러내어 구별하시고 의인이라 여겨주셨다는 ‘이신칭의’를 제시하고 있다. 그리면, 믿음은 과연 인간 측에서 어떤 행위나 노력이나 열심으로 발휘되는 것인가? 아니면 전적으로 하나님의 믿음으로 의롭다 여겨주심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것인가에 대하여 바울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왕 다윗을 등장시켜 설명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하여 하늘의 별처럼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아 의롭다 여김을 받을 실 것이며, 하늘의 복을 누릴것임을 보여주고 가르쳐 주시기 위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 ‘복의 근원’이라고 불러주신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1 2:2),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12:3). 복을 내리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그분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그의 자손들에게 복을 내려주신다는 언약을 선포하신다. 믿음의 조상이 되는 복의 근원은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시작됨으로 그 출발점은 아브라함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아브라함을 찾아가 주셔서 갈대아 우르(바벨론)에서 불러내시는 출 갈대아에서 믿음의 여정이 시작된다.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우상을 섬기는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찾아가 불러내심으로 세상을 탈출하는 믿음의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처음부터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이 세상을 신으로 섬기는 완전히 불가능한 죄인의 상태에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믿음으로 시작된 것임을 확실히 밝히고 있다.
아브라함은 이 세상을 신으로 삼고 살아가는 모든 죄인의 불가능한 표본으로 등장한 임물이다. 하나님을 떠나 이 세상을 신으로 섬기는 완전 타락한 죄인이지만, 당신이 택한 백성이기에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든, 선하게 살든, 악하게 살든, 상관없이 오로지 택함을 받은 당신에게 속한 자라는 그 이유 때문에 결코 이 세상 죄와 사망에서 불러내어 구별된 자로 믿음으로 세우심을 보여주신 것이다. 이는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믿음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았다”(히 11:8) 라고 말한 것이다. 즉 하나님의 믿음이 아브라함을 부르셨다는 말씀이다. 아브라함이 먼저 하나님을 믿어서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아브라함을 찾아오셔서 불러내심으로 그 불러내심에 순종하는 겨자씨 같은 믿음을 주셨기에 믿음의 출발점은 하나님이심을 밝히고 있다. 그렇게 하나님의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의 여정이 시작된 것이기에 아브라함은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믿음에 이끌려 갈대아 우르를 떠났다고 말하고 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고, 장차 자기 몫으로 받을 땅을 향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했지만, 떠난 것입니다”(히 11:8). 이와 같이 어디로 갈지 알지 못하는 아브라함의 손을 잡고 친히 동행하여 주시는 믿음의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인간의 의지와 노력과 행위에 근거한 인간 소유로 발휘되는 것이 아니라, 전혀 그러한 믿음이 없는 완전 불가능한 무지의 상태에서 부르심을 받은 것이며, 완전 가망이 없는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에서 하나님의 믿음이 먼저 찾아와 불러내시는 은혜의 덮음으로 비롯되는 것이며, 단번에 ‘주어지는’ 선물임을 바울은 확실히 밝히고 있다 (엡 2:8-9).
더 확실한 믿음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구원을 성취하여 주시고 그 구원을 입혀주시고 확신을 주시기 위해, 친히 우리 안으로 뚫고 들어오셔서 당신의 의로운 영인 성령으로 거듭나는 새로운 창조를 일으킨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거듭나는 새 생명의 창조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이시며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죄와 허물로 죽은”(엡 2:1) 상태이기에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불가항력적 은혜로 우리 안에 먼저 뚫고 들어오심으로 그분의 의로운 자녀로 탄생된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굳이 인간의 육체를 입으시고 굳이 인간 몸 안으로 들어오셔서 성령으로 잉태하여 아기로 탄생하시는 과정으로 우리를 찾아오셨다. 그렇게 그분은 처음 시작부터 우리 죄인의 심장으로 뚫고 들어오셔서 자신을 계시하시고 자신을 믿게 하시는 “믿음”이라는 주체로 우리의 전 인생을 통치하신다. ‘죄와 허물로 죽은’ 죄인을 찾아오셔서 겨자씨 같은 믿음을 심어주시며, 싹이 나고, 자라고, 열매를 맺도록 농부가 되셔서 열심히 가꾸어 주시며 그 과정이 바로 믿음생활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씨 중에 가장 작은 눈에 뛰지 않는 거의 없음에서 싹이 나는 겨자씨를 우리의 믿음으로 표현하시고, 우리를 아무것도 할 수 없이 포도나무에 붙어있음으로 열매를 맺게 되는 가지로 표현하시고, 그 포도나무를 가꾸시는 농부를 하나님 아버지로 표현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죄인 측에서의 모든 행위가 배제된 상태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시작되고 주도되고 완성이 되는 하나님의 믿음과 열심이다. 선지자 하박국은 구원에 대하여 율법적 행위로 정의를 내린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로 말미암는 믿음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으며(합 2:4), 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더욱 확고하고 확실하게 복음으로 정의하여 준 것이다.
하나님의 믿음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4:3)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창15:6)
이 구절만 보면 마치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어주었고, 그 믿음을 근거로 하여 그가 의로운 자가 된 것으로 읽게 된다. 하지만, 성경은 아주 구체적으로 아브라함의 전 인생을 통하여 하나님의 믿음이 어떻게 우상을 섬기는 아브라함을 불러서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 주셨는가를 그려냄으로, 인간이 먼저 하나님을 알고 믿은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믿음이 당신의 백성을 이 세상에서 불러내어 굳게 붙들어 주시는 동행으로 전 인생을 주관하여 믿음을 세워주심을 보여주고 있다. 더 큰 그림으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예수그리스도를 모형하는 모세 안에 집어넣고, 세상 애급에서 탈출시켜 40년 동안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먹이시고 입히시고 구름기둥으로 불기둥으로 지켜주시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는 동행으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오직 하나님만을 믿는 믿음으로 세워주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불순종하고 거역하고 대적하며 온갖 죄악들을 행하는 추악하고 패역한 자들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자들로 드러났지만, 그 모든 죄악들을 간과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인내와 용서와 사랑을 나타내시어 하나님의 믿음과 열심으로 죄인이 구원받아 의롭게 됨을 보여주시고 증거하여 주셨다. 그렇게 하나님의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믿음의 여정이 시작됨을 아브라함의 인생으로 이스라엘의 역사로 그러내어 보여주신 것이다.
아브라함의 여정은 시작부터 하나님의 믿음으로 출발하고 진행되고 완성되었음을 성경은 확실하게 제시하고 있다. 우상을 섬기는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믿음이 아브라함을 찾아가서 불러내시는 출발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의 생애가 시작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아브라함은 끊임없이 실수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의심하고 배신하며, 불안과 두려움으로 떨고 있었다. 예를 들면, 창세기 15장 시작에서, 하나님의 지키심과 약속을 의심하며 두려워 떨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을 계시하여 위로해 주시고, 오직 당신만을 믿고 의지하고 붙드는 ‘믿음’을 세워주시는데 그 믿음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었다.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동방의 4개 연합군들을 318명의 가신들을 이끌고 가서 승리하여 많은 전리품들을 희득하였다. 하나님께서 싸워주신 전쟁이었음에도 두려움으로 떨고 있었고, 거기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하늘의 별처럼 많은 후손들을 주시겠다는 언약에 대한 불신으로 더욱 불안하고 두려움이 커진 것이다. 그런 아브라함의 불신과 나약한 모습을 나무라지 아니하시고, ‘내가 바로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다.’ 그러니 오직 나만을 믿으라고 말씀하셨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도록 믿음을 세워 주시고, 아브라함이 믿은 것으로 여겨주심으로 의롭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창 15:1,6). 아브라함의 믿음의 여정은 그렇게 하나님께서 친히 그와 동행하시는 지킴과 인도와 장악이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나는 너의 방패이고 상급’이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에게 향하여 ‘나에게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나에게는 자식도 하나 없지 않습니까?’라고 하나님을 의심하는 불평을 내 뱉은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은 믿음이 없는 아브라함에게 밤하늘의 뭇별들을 보여주시고 아브라함의 후손이 그 별들처럼 많아질 것이라고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다시 상기시켜 주신다.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창15:5).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서 자손을 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믿든 안 믿든 상관없이 하늘에서 이룬 뜻대로 하나님께서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믿음대로 아브라함의 인생을 장악하여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시겠다는 하나님 자신의 의지를 보여주신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뭇별처럼 셀 수 없이 자손을 주신다고 하신 그 자손은 오직 한분 의인이신 예수그리스도를 가리킨 것이다. 이를 바울이 증거하여 이르기를,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갈3:16).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자손은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별처럼 확장되는 하늘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되는 복음을 제시하신 것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은 창세전에, 아직 아브라함이 나기도 전에, 하늘나라에서 이미 묵시로 이뤄진 하나님의 의로운 뜻이기에 아브라함이 믿든 안 믿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늘의 뭇별처럼 확장됨을 아브라함에게 미리 제시하여 주신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제물을 둘로 쪼개라고 하시고는 언약의 당사자인 아브라함을 남겨 두시고, 홀로 쪼갠 제물사이를 지나가심으로 아브라함과 맺은 자손의 언약은 아브라함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리에서 오직 하나님께서 홀로 이루어 가심을 지켜보며 수응하며 받아들이고 증거함을 ‘믿음’으로 여겨주신 것이다. 이는 장차 당신의 백성들이 오직 십자가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되는 복음을 아브라함을 통하여 계시하여 주신 것이다.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동행과 지켜주심과 언약과 약속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의심하였고 약속을 믿지 않았으며, 언약을 어기고 자신의 의지와 열심으로 종 하갈을 끌어들여 후손을 만든 것이다. 그렇게 불신하는 아브라함에게 반복하여 언약의 자손 이삭을 약속하신 것이며, 아브라함은 여전히 믿지 않았고, 사라와 비웃었으며, 자신이 만들어낸 이스마엘이나 축복해 달라고 말한 것이다. 바울의 말씀대로 ‘아브라함이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전혀 의라는 것을 찾아볼 수 없는 완전히 불가능한 죄인 그 자체이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관점에서 믿음이 없는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입혀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어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으로 인정하여 주시고, 그렇게 세워 가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그의 모든 허물과 죄를 덮으셔서 의롭다 “여겨주시기로” 창세전에 정하여 놓으셨기 때문이다. 의로워서가 아니라 전혀 의롭지 않는 철저한 죄인이기에, 저희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주시기로 정하신 뜻이기에,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덮어서 그 죄를 간과하시고 예수그리스도의 의로운 피에 근거하여 의롭게 여겨주시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는 사람을 죽이고 살기 위해 부듯이 애급을 떠나 도망간 신세가 되었음에도, 히브리서 믿음장 11절에서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예수그리스도를 위하여 능욕을 받는 것을 애급의 모든 보화보다 더 낫게 여기고 애급을 떠났다’라고 하나님의 시각에서 예수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 의롭게 여겨주셨음을 기록하고 있다. 왜나하면, 그 출발점을 하나님의 믿음으로 시작하시고 하나님의 믿음으로 완성하시기에, 그 과정에서 인간의 행위가 어떠한지를 보시지 않고, 오직 십자가 은혜의 덮음으로 의롭게 여겨주시며, 우리의 믿음으로 우리가 한 것으로 인정하여 주시기로 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이 의롭게 되는 길은 율법을 받아서도 율법을 지키는 행위서도 아니라, 하나님이 준비하신 또 다른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강력하게 주장한 것이다.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4:1-2), 즉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 그 자체이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용지물이다는 말씀이다. 아브라함이 한 일이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불신과 죄와 실수밖에 없으며, 때문에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믿음이 그를 불러주시고 세상에서 끄집어내시고 의의 길로 인도해주시고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믿도록 동행하여 그의 인생을 장악하여 주셨기에 하나님의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성경은 이와 같이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한 일이란 실수밖에 없기에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다고 증거하고 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율법을 주시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지켰다고 인정하여 주신다.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네 자손(예수그리스도 갈3:16)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리라”(창 26:5). 이는 아브라함이 율법이 가리키는 진의, 즉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피의 공로를 믿는 믿음으로 믿음의 조상이 될 것임을 말씀하신 것이며, 그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받치는 믿음의 절정까지 끌고 가심으로, 예수그리스도의 회생 제물로 그의 후손들이 오직 은혜를 입어 믿음으로 구원받게 됨을 몸소 체험하게 하시고, 그 절정을 순종과 율법지킴으로 인정하신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믿음이 독자 이삭을 희생 제물로 드리는 절정으로 이끌고 가심으로, 구원은 오직 하나님 자신이 친히 준비하신 독생자 예수그리스도의 희생제물로 이루어짐을 아브라함이 더디어 깨닫게 되었고 믿게 되었으며, 이를 하나님은 율법을 다 이룬 자로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으로 율법을 세운다’(롬 3:31)라고 말한 것이며, 믿음이 율법을 세운다는 그 뜻을 아브라함의 믿음과 다윗이 깨달은 복음으로 더 상세히 설명한 것이다. 이 원리를 사도 요한은 이렇게 설명해 주고 있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요일 3:22-24). 그러므로 율법대로 산다는 것은, 바로 율법이 가리키는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며,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제물로 구원과 생명을 얻었음을 믿는 것이며, 아무것도 할수 없는 인간의 무능함과 무지를 깨닫는 자각이며, 죄인이 실체를 뼈저리게 깨닫고 자기를 부인하는 자리로 내려가 오로지 십자가 피만을 의지하는 믿음을 굳게 세우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율법을 지킨 자로 인정하여 주시는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이다. 이르기를,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리라”, 즉 하나님이 내신 계명과 율례와 법도가 아브라함의 인생을 장악하고 전체 삶을 주관하여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을 믿는 믿음을 주셔서 결코 당신의 의에 합당한 자로 완성하셔서 하나로 함몰시키시는 전체 과정을 말씀하신 것이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을 한 사람은 품삯을 받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에 그가 받는 품삯을 은혜로 생각하지 않고 보수로 여기며, 그는 일한 대가로 이 세상에서 이미 자기 상급을 받았기에 구원에 이르는 은혜에서 제외됨을 뜻한다(4절). 그러므로 구원은 아무것도 한 것 없이 경건치 아니한 죄인의 그 모습 그 상태에서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을 배제하여, 오로지 하나님의 열심과 믿음으로 입혀주시는 선물이며,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의 의를 믿는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신 의로운 믿음이기에 반드시 의롭다함을 얻게 되며, 의로운 자에 합당한 인생으로 인도하시며, 오로지 하나님 아버지만을 의지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의만을 믿는 믿음으로 세워주심을 제시한다(5절). 그러므로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 할지라도” 하나님의 믿음이 죄인을 의로운 자로 거듭나게 하는 새 창조를 일으켜 주시기에 비록 겨자씨 같은 믿음이지만 반드시 열매를 맺는 의로운 자로 완성하신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25:31-46절에서, 예수님은 오른편에 있는 양과 왼편에 있는 염소의 비유를 들어, 일한 것을 삯으로 여기는 자와 아무것도 한 것 없이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의롭다 여기심을 받는 자들에 대하여 상세히 설명하여 주시고 있다. 예수님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고 말하는 오른편 양을 향하여,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25:34)라고 말씀하시고, 자신들의 노력과 업적으로 삯을 요구하는 왼편 염소를 향하여서는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25:42)라고 분리하여 말씀하신다. 왼편 염소들은 하나님을 열심히 공양하였다고 자신들의 공로와 업적들을 주님 앞에 내어 놓고 보수를 원한 것이다. 그러자 주님은 “너회는 나를 위해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라고 그들이 내놓은 행위를 전면 부정하시고, ‘불법적 행함’ 이라고 말씀하신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7:23). 이와 같이 염소들은 자신들이 행한 일을 의와 공로로 쌓아두어 하나님 앞에 따지고 사람들 앞에 자랑하며 이를 방패로 자신들의 이름을 높여 영광을 챙겨가지더라는 것이다. 주님은 그들에게서 나오는 행함과 공로와 업적들에 대하여,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며, 외식과 불법이 가득한 회칠한 무덤’(마 23: 25-28) 일뿐이라고 폭로하신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향하여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33).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마 25:41) 라고 그들의 종말을 선포하신 것이다.
그런데 오른편 양들은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고 자신을 부인하는, 즉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죄인의 상태에서 오직 십자가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음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우리가 어느 때에 그런 일을 하였나이까” 라고 극구 자신의 실체를 깨닫는 부정으로 내려가더라는 것이다. 주님은 그들을 향하여 ‘내가 배고프고 목마르고 벌거벗고 병들고 옥에 갇혔을 때 친히 와서 돌봐 주었다’라고 주님이 양을 위해 하신 모든 일들을 양이 한 일로 전가시켜 주신 것이다. ‘목마르고 벌거벗고 병들고 옥에 갇힌’ 그러한 질병과 사망의 증상들을 가진 분이 그분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들이다. 우리가 굶주리고 목마르고 병들고 어둠에 갇혀 저주와 죽음에 처해 있을 때, 그분이 친히 찾아와 주셔서 생명의 양식을 먹여주시고,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를 마시게 하시고, 각종 질병들을 고쳐주시고, 한없는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은혜를 입혀주셔서 죽음에서 살려내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신이 하신 일들을 양들에게 전기시켜 양들이 한 일로 인정하여 주신 것이다. 오른편 양들은 자신들이 바로 주님이 나열한 그 질병의 증상들을 가진 사망에 던져져 있었던 자들이며, 예수그리스도께서 친히 찾아와 주셔서 그러한 죄의 증상과 사망에서 구원 받았음을 인정한 것이며, 그것을 믿음으로 여겨주시고 의롭게 여겨주신 것이다. 아무것도 한 것 없이, 자격도 조건도 대가도 없이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와 공로를 의지하는 믿음이다. 이를 바울은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4:6)라고 말한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피조물에게 은혜를 입혀주셔서 하나님의 생명력으로 살아가도록 붙으시는 하나님의 믿음을 말하며, 그 믿음으로 은혜를 입어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로 함몰되어 절대적 의존적 존재로 살아가는 연합을 말한다. 바울은 바로 그 의를 설명하고 있으며 (4:5-6), 의인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복음의 핵심을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
이를 증거하기 위해, 바울은 율법을 받기 전에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아브라함과 율법을 받았어도 율법대로 살지 못한 다윗이 오직 십자가 예수의 피를 의지하여 의롭다 칭함을 받았음을 예를 들어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는 복음의 진수를 증거한 것이다.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4:1-3). 즉 율법지킴은 율법의 세목들을 지켜내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율법이 가리키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의를 믿는 믿음임을 확실히 밝혀주고 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인간의 행위와 의지와 노력과 열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믿음이 죄인을 찾아와 주셔서 이 세상에서 불러내시고 이끌어내심에 항복하고 수응하는 순종을 말한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만 심겨주신 그 겨자씨 믿음이 하나님의 부리심으로 싹이 트고, 자라고, 열매 맺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로운 창조가 일어나는 그 모든 과정을 말한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이 예수그리스도를 모형 하는 독자 이삭을 가지기 까지 100세라는 세월이 필요했던 것이고,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이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기까지 4000 여년 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던 것이며,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출 애급하는 지도자로 서기 위해 40년 동안 광야에서 양을 치는 목자의 세월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의 모든 행위를 배제하여 오직 하나님의 믿음이 당신의 백성들의 모든 삶을 장악하고 통치하여 믿음의 백성으로 세워주시기에 은혜이며 복음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그 다음구절에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4:5-8). 즉 천국은 죄가 없어서 가는 나라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의’가 덧 입혀지는 은혜의 덮음으로 의롭다 여겨주심으로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믿음으로 가는 천국임을 제시한다.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7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시편 32:1-2
잘못을 용서받고 하나님이 죄를 덮어 주신 사람은 행복하다! 마음에 거짓된 것이 없고 여호와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
바울은 다윗의 시편 32편 1-2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십자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복’을 세 번씩이나 반복하고 있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4:6-8).
다윗은 충신 우리야의 아내를 겁탈해서 임신을 시켜놓고, 그 사실이 드러날까 두려워서 충신 우리야를 교살한 살인죄를 짓고도 아무런 죄책감이 없이 왕의 삶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 다윗을 하나님은 긍휼과 은혜를 입혀주시기 위해 선지자 나단을 시켜서 그의 실제 모습을 들여다보게 하시고, 십자가 구원을 제시하여 주심으로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는 복음을 붙들 게 하셨다. 다윗은 모든 인간은 모태에서부터 죄인으로 태어났기에 죄만을 생산해내는 악한 죄인이며 행위로는 절대 의로울 수가 없다는 죄인의 본능을 깨닫고, 그 죄의 뿌리를 제거하여 주시는 십자가 구원의 의를 믿은 것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4-5)라는 고백과 같이 자신의 모든 죄는 오직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보혈로만 깨끗하게 도말되어 의롭다함을 얻음을 깨닫고 복음을 붙든 것이다.
그 전까지 다윗은 의인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있었다. 그는 용감한 자로 물맷돌 5개로 이스라엘의 원수 거인 골리앗을 물리친 소년이었으며, 백전백승으로 백성들의 환호와 칭송을 받고 있었으며, 사울 왕에게 핍박을 당하여도 하나님을 찬양하며 자신을 죽이려고 쫓아온 그를 두 번씩이나 살려준 의로운 자로 보여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한 사건을 터뜨려 그의 내면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던 죄의 실체를 완전히 폭로하신 것이다. 다윗은 자신의 실존을 들여다보고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간음죄와 살인죄로 죽어 마땅한 자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으며, 아무리 회개하고 아무리 의로워 지려고 열심을 부려도 죄가 자신의 마음을 도사리고 있기에 죄를 피할 수 없는 인간의 본능을 드려다 봄으로,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그 마음이 심히 거짓되고 부패하고 추악하기에 죄만을 생산해내는 철저한 죄인임을 고백한 것이다. “악인들은 뱃속에 있을 때부터 잘못되었으며 태어날 때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말을 하는구나 그들은 뱀처럼 독살스럽고 귀먹은 독사 같으니”(시 58:3-4).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
다윗은 자신의 죄를 돌이킬 수도, 부정할 수도, 원래의 상태로 돌려놓을 수도, 죽은 우리야를 살려낼 방법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며, 자신의 모든 죄를 도말하여 주시고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십자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되는 복음을 붙든 것이다. 이르기를, “잘못을 용서받고 하나님이 죄를 덮어 주신 사람은 행복하다! 마음에 거짓된 것이 없고 여호와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시 32:1-2 현대인 성경)라고 죽어 마땅한 그가 십자가의 피로 가려서 죄 없다 인정을 받은 것이며,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 의롭게 여겨주심으로 복된 자가 되는 은혜의 복음을 영감으로 깨닫게 된 것이다. 다윗이 의인답게 살아서 의인이라 인정받은 것이 아니다. 다윗은 복음을 깨달은 후에도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였으며 말년에는 죄인 답은 죄인으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다윗은 자신의 고백과 같이, 모태로부터 죄인으로 잉태된 죄인의 몸에서 끊임없이 죄가 터져 나와도 그 죄에 따른 심판을 당신의 자녀에게 내리지 아니 하시고, 당신의 아들 예수에게 내리심으로 아들의 피로 죄를 덮어버리고 죄 없다고 인정하여 주심으로 십자가 피의 공로를 믿는 자가 복이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죄를 짓고 있음에도, ‘주께서는 그 죄를 끊임없이 용서하여 주시고 덮어주시고 죄 없는 의인으로 인정하여 주신다’는 복음을 다윗이 찬양한 것이다. 이를 바울은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4: 6-8)라고 복된 복음을 찬양하고 있다.
하나님을 믿는 복
인간이 필사적으로 추구하고 쟁취하는 ‘복’이란, 이 세상에서 육신이 원하는 탐심과 욕망으로 잘 먹고 잘 사는 안일과 형통함이며, 나 ‘자아’ 주체성 건설과 확장으로 신으로 군립하려는 욕망이 성취되는 일이다. 하지만, 복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정해진 저주와 죽음으로 채워진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며, 끝임 없이 “가시와 엉겅퀴”와 같은 악을 도모하는 인간들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입혀주시는 “복”은 죄와 허물이 없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으로 사랑이 충만한 영생을 사는 하늘나라이며, 그 영원한 하늘나라의 복을 상속 받은 자는 죄인의 모든 죄를 도말하여 주시고 죄 없다고 인정하여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자이며,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를 믿는 자에게 임하는 것임을 바울은 확실하게 제시하여 주고 있다. “아무 공로가 없어도 경건치 않은 사람을 의롭다고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그의 믿음이 의로운 것으로 인정을 받습니다”(4:5 현대인성경). 즉 일한 것 없이 아무런 공로 없이 조건도 대가도 없이 오직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아 하늘나라의 복을 누리는 자가 행복하다는 말씀이다. 죄인으로 태어난 본능으로 계속 불법을 행하고 있음에도,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죽을 때까지 계속 죄를 짓고 있음에도,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분명 죄인으로 정죄 받아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음에도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4:6-8) 라고 바울은 은혜의 복음을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이 입혀주시는 복은 죄인이 죄의 대가로 심판을 받아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그 죄인을 하나님께서 은혜로 감싸주시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깨끗한 의의 옷을 입혀서 의인으로 여겨서 당신과 하나가 되어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사는 영생임을 제시한다.
그러므로 성도가 지향하는 복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나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만물의 주체이시며 나의 ‘주’이심을 인정하고 피조물의 자리에서 창조주의 말씀에 순종하며 입혀주시는 은혜와 긍휼과 생명력으로 그분의 것으로 존재하며, 그분의 뜻과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며, 오직 그분만을 찬양하는 기쁨으로 살아가는 것이며, 그것이 성도가 살아가는 이유와 목적이 되는 것이다. 이 역사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며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선한 하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미 묵시 속에서 완성하여 놓으신 묵시대로 펼쳐지고 있기에, 인간은 하나님의 원대한 뜻과 역사를 저항할 수도 막을 수도 없다. 인간이 아무리 열심을 내어 자신들의 원하는 것을 건설하고 발달시키고 확장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다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일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입김으로 훅 불면 말려서 초개처럼 사라지게 되는 것이 바로 역사이며 인생이다.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말 4:1).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 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벧후 3:7).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을 때만이 존재가 되는 것이다. 아무리 쓰레기 같은 인생이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예수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와 하늘나라의 복을 누리는 복된 자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오른 옆에 매달린 강도가 천국으로 이끌려 간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덮음이었다. 그 강도는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그 어떤 자격도 공로도 업적도 없는 평생 강도짓을 한 악한 죄인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저주받아 죽어 마땅한 목숨이었다. 그런데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가는 예수가 자신을 구원하는 천국으로 보이는 영이 열려지자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예수를 구원자로 믿는 믿음이 주어짐으로 천국으로 이끌려가는 복을 받은 것이다. 이를 바울은,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4:6-8)라고 복된 복음을 선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