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6: 16-33
16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니 17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냐 하고 18 또 말하되 조금 있으면이라 하신 말씀이 무슨 말씀이냐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거늘 19 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21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23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25 이것을 비유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는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26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27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 28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29 제자들이 말하되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유로도 하지 아니하시니 30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 3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32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니 (16)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 강림은 영의 사건이기에 육의 지성으로는 알 수가 없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라는 주님의 말씀을 전혀 알아듣지 못함으로 자신들을 남겨두시고 떠나시는 일에 매우 슬퍼하며 근심과 불안과 두려움에 쌓여 있었다. 육체로 오신 예수님은 제자들과 3년이라는 세월 동안 늘 함께 계시면서 모든 것을 막아주고 지켜주심으로 부족함이 없었으며, 예수님이 행하시는 능력과 기적에 동참하며 제자됨을 자랑으로 여기고 장차 예수님의 좌편과 우편으로 큰 자가 되리라는 희망에 가득 차 있었다. 그리하여 이제 곧 제자들을 떠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의 고통을 감당하셔야 하는 심히 고민하시는 주님 앞에서 그들은 누가 더 높은 지위에 있을 것인가 하는 자리다툼까지 하고 있었다(눅 22: 24). 그런 제자들을 향하여 주님은 자신이 져야 하는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말씀하시며, 또한 ‘너희가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며’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다’(15:19-20)라는 예상치 못한 말씀을 주심으로 제자들은 이내 근심과 불안과 두려움과 허탈함에 잠겨 있었다. 그런 제자들을 위로하여 보혜사 성령을 약속하시면서 성령이 오시면 너희가 곧 기뻐할 것이며, 그 보혜사 성령이 바로 예수님 자신임을 밝히 말씀하여 주신다.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16),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22)라는 확신을 주신다. 첫째는, 이제 멀지 않아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지만 곧 부활하셔서 다시 제자들을 만나게 됨으로 주님과 제자들이 함께 기뻐하게 됨을 말씀하신 것이며, 둘째는, 주님이 이제 성령으로 제자들 마음 안에 들어오심으로 영원히 그들을 떠나지 않고 함께 하심으로 기뻐하신다는 말씀이다.
14: 19-20에서 주님은 좀 더 영적으로 말씀하신다.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주님이 다시 성령으로 오실 때 세상은 그를 보지 못하지만 제자들은 본다는 말씀아다. 왜냐하면 이제 주님이 가시적 육신으로 보이게 오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알 수도 볼 수도 없는 영으로 오실 것이며, 오직 영에 속한 제자들만 성령을 주님으로 알아본다는 말씀이다. 즉 예수님이 육체로 보이게 오시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오직 믿는 성도 안에 뚫고 들어오시며, 이제부터 성도들에게 믿음이라는 새로운 눈으로 영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알고 영으로 믿어 생명에 이르는 성령의 시대가 도래됨을 제시하신다. 육신으로 오셔서 이 땅에서 행하신 기적과 능력을 직접 보았고 죄인을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는 예수를 직접 눈으로 보았지만 그 누구도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 이심을 알지도 믿지도 영접하지도 않았다. 제자들에게도 그토록 반복하여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이제 아버지께로 가셨다가 다시 돌아오신다고 약속하여 주셨음에도 결국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고 실망하여 다시 고기잡이로 흩어진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영의 사건이며, 오직 성령의 계시로만 이해되고 깨닫게 되고 믿게 되는 영으로 체험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반복하여 성령강림을 약속하신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는 영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신다. 우리가 구하여서 주관적 의지로 믿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선택받은 당신의 백성들에게만 들어오시기에 세상은 그를 보지 못하며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신다. 우리에게 보이게 육신으로 오시는 분이 아니시며, 영으로 택함을 받은 자의 심령 안에 들어오셔서 죄로 죽은 우리를 다시 새로운 피조물로 즉 아버지의 아들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잉태시키는 새 창조를 일으키신다. 즉 예수 부활은 죄로 죽은 나를 다시 살리는 영으로 새 생명이 잉태되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늘나라로 이어지는 영원한 생명이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나는 죄인으로 저주의 십자가에서 죽은 상태에 있을 뿐(갈 3:13) 영생하는 생명을 얻을 수가 없다. 그렇게 부활의 영이 우리에게 임함으로 주님은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14:19-20)라고 하나의 연합체로 영원을 살게 됨을 약속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영원한 하늘나라의 존재로 탄생시켜 하나로 연합을 이루는 일을 하시기 위해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신다. 이제부터 눈으로 보고 눈으로 판단하고 육신의 행함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영의 차원에서 사물을 판단하고 영의 계시로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를 영으로 알게 되며, 오직 진실된 믿음을 통하여 실상을 체험하고 소유하는 은혜의 새 시대가 도래된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요 4:23-24)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때문에 영으로 오신 성령의 예수는 오직 영으로만 깨닫고 체험하는 사건이며, “하나님께로 난자”, “위로부터 난자”가 되는 영의 사건이다. 제자들은 비록 처음에는 십자가를 져야 하는 예수님의 의도를 알 수 없어 뿔뿔이 도망하고 흩어졌지만 부활한 그리스도의 영이 그들 안에서 역사하자 새롭게 거듭남으로 비로소 담대함으로 예수 부활을 전하는 참 제자들이 된 것이다. 예수 부활 안에 있는 자는 성령으로 거듭나 영의 차원에서 하늘의 신령한 것을 구하며, 성령의 인도를 따라 영적 삶을 추구하며,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는 자로 더는 자신을 위해 사는 자가 아니요 자기를 부인하는 십자가 삶으로 부활의 예수 생명을 전하는 자로 서게 된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제자들은 여전히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함으로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며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냐”(16:18) 라고 서로 문의하며 주님께 묻고자 하였다. 그때에 주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16:20-21)라는 대답을 주신다. 즉 예수께서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이 되셔서 묵묵히 매 맞음과 멸시와 조롱을 당하시고 무력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을 보게 됨으로 제자들은 슬픈 마음으로 곡하고 애통할 것이지만, 이와 반면에 “세상은 기뻐하리라”라고 말씀하신다. ‘세상이 기뻐한다’는 말씀은, 첫째, 이 세상 권세자의 대표인으로 쓰임을 받은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동족인 유대인들로부터 온갖 핍박과 멸시와 조롱을 당하시고, 결국 그들에 의해 살해당하게 됨으로, 이 세상과 유대인들이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데 성공함으로 “세상은 기뻐하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둘째, 세상과 유대인들이 죽인 예수가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부활하심으로 자신들이 죽인 예수가 진정 하나님이 보내주신 아들이시며 메시아 이심을 알게 되고 깨닫게 됨으로 진심으로 회개하여 다시 하나님 앞으로 나오게 되는 은혜의 복음 시대가 도래됨으로 “세상은 기뻐한다"라는 뜻이다. 죄인이 오직 자신의 죄를 자백하는 회개로 십자가 피의 공로를 믿음으로 아무런 조건도 대가도 행위에 따르는 공로도 없이 오직 “은혜”라는 선물로 구원과 생명이 임하는 복음으로 인하여 세상은 기뻐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이내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니라”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20-21)라고 생명의 잉태로 기뻐한다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당신이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는 일은 이미 정하여진 아버지의 뜻이며, 이는 십자가 구원 성취로 아버지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이며, 또한 예수님 자신이 영광을 얻으시는 일이며, 하나님의 백성이 구원의 영광을 얻는 더없이 기쁜 일임을 제시하신다. 이는 또한 주님이 다시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돌아오심으로 제자들의 근심이 기쁨이 될 것이며, 또한 성령으로 제자들의 마음에 들어오심으로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의 기쁨과 평강으로 채워질 것이며, 그 기쁨은 주님이 주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22).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23 그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그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시고, 또 이내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16:23)라고 이중적으로 말씀하신다. 한마디로 진리의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거나 구하지 않게 되며, 그러나 너희가 곧 내 이름으로 구하게 될 것이며 무엇이든지 구하면 내가 들어 주시겠다는 말씀이다. 즉 성령님의 인도로 성도는 구할 것이 없는 자가 되는 동시에 또한 구하여야 하는 자가 된다는 이중적인 말씀이다. 먼저, “그날에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라는 말씀은, 이제 성령이 오시면 그가 지금까지 너희에게 이른 모든 말을 다 설명하여 가르쳐 주시기에 모든 것이 밝히 드러남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에 관한 많은 의문들과 의혹들이 풀리게 될 것이며, 성령님이 먼저 너희 마음을 헤아리게 됨으로 너희가 묻고자 하는 모든 것들을 진리의 말씀으로 가르치고 설명하여 깨닫게 하여 주신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제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에게 마땅히 구하여야 할 것을 가르쳐 주심으로 ‘너희 이름으로’ 너희 육신을 위한 것들을 구하지 않게 되며, 오직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영원한 생명에 관한 하늘의 신령한 것들을 구하게 된다는 뜻이다. 성령이 인도하시는 기도는 나의 이름으로 나의 뜻을 따라 아버지의 나라를 구하게 될 것이며, 그 기도는 육을 초월하여 영의 신령한 것을 구하는 무한이며 영원한 것이기에 “무엇이든지”라는 아주 중요하고 또한 헛갈리기 쉽고 왜곡되기 쉬운 문구를 쓰신 것이다. 즉 너희 육신을 위한 이 세상의 것을 구하는 “무엇이든지”가 아니라, 너희 영적 생명과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사는 영생에 관한 “무엇이든지”이며, 반드시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여야만이 이룰 수 있다는 약속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무엇이든지”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14:13)라고 말씀하심으로 우리가 구하게 되는 “무엇이든지”라는 무제한을 “아버지께서 영광을 얻게 되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내용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다. 즉 너희 육신이 원하는 이 세상의 것을 구하는 기도가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복음을 위한 기도이며, 그 기도는 “무엇이든지” 다 시행하신다는 약속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바로 하나님의 의와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확실히 말씀하신다(사 43:7,21). 성도는 피조물의 자리에서 오직 하나님의 의와 영광만을 드러내며,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구원과 생명이심을 깨닫고 우리의 영원한 주가 되심을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되는 진리를 증거하는 증인의 삶을 살아내는 자들이다. 주님은 땅 끝까지 하나님의 나라가 전파되는 복음에 우리를 동참시키기 위해 우리에게 “구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며,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그 일을 시행하시는 분은 예수님 자신이시기에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로 인도하실 것이며, 반드시 “아들로 인하여 아버지께서 영광을 얻는” 일로 바꾸어 내시겠다는 의지적 약속을 담고 있다. 그리하여 주님은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25-34), 즉 육신을 위한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있어야 할 줄을 하나님은 알고 계시고 우리의 필요대로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있기 때문에 육신을 위한 세속적인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하늘나라의 백성으로 이 세상을 초월하여 장차 우리가 살게 될 영원한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마땅히 구하여야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잠깐 살다가 없어지는 육신의 원함이 아니라, 우리의 본향인 하나님의 나라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이 하늘나라 백성의 의무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본체가 영광의 왕이시다. 그럼에도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굳이 종의 형체를 입으시고 더럽고 추악하며, 죄인들로 가득 찬 이 세상에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내려오셨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멸시와 박해를 받으셨으며, 죄인들로부터 매 맞는 고난과 조롱과 수치를 다 당하시고 저주의 사형들인 십자가에 못을 박아 피를 흘리는 죽임을 당하셨다. 이사야의 말씀대로, “그가 상처 입은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짓밟힌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며 그가 맞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얻었고 그가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다”(사 53:5). 그렇게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피의 공로로 아무런 대가도 조건도 행위도 없이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십자가 구원을 믿음으로 이 세상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무엇든지 해 주십시오”가 아니라, 나 같은 죄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신 그 위대한 사랑을 마음으로 깨닫게 됨으로 그분의 한없는 아가페 사랑에 나의 모든 것을 그분의 손에 의탁하는 내려놓음과 항복과 신뢰이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 시지만 자기를 낮추어 우리의 육신을 입고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이 세상 원리와 가치관과 완전히 대립되는 방법으로 한 알의 밀이 되어 죽기까지 순종하여 자신을 희생하심으로 우리에게 향한 영원한 사랑을 확증하셨다(빌 2:6-8).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내 안에 임하여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기도는 내 소원이 이루어지는 육신의 원함이 아니라, 반대로 나의 과거 현재 미래까지도 계획하신 하나님께 나의 인생 전체를 맡기고 그분의 의로운 인도에 나를 쳐서 복종할 수 있도록 내 ‘자아’가 죽음으로 내 안에서 그분의 의가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항복과 순종이 바로 영으로 구하는 “무엇이든지”이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이제 이 세상 육신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늘나라 영에 속한 자로 성령의 인도를 받아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게 됨으로 주님의 생각과 뜻과 일치하게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기도를 하게 된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기도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살아내신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십자가 삶이 우리의 삶에서 똑같이 나타나기를 소원하는 기도이다. 육신이 살기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철저히 죽어서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기를 소망하며, 내 뜻이 포기되고 기각되는 항복이며, 오직 아버지의 뜻이 내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기도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결코 내 육신의 원함을 채우는 것도, 내 신앙을 과시하기 위한 것도, 내 열심을 보이기 위한 것도, 사람들에게 잘 보여 자신의 의를 쌓기 위한 것도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내려놓고 자신의 연약함과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하며, 자신의 실수와 잘못을 자백하며, 그분의 용서와 자비를 구하며, 그럼에도 끝까지 사랑으로 참아주시며 용서하여 주시며 긍휼로 굳게 붙들어 주심을 감사하는 것이다. 항상 함께하여 주심을 기뻐하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의 손을 놓지 않게 꼭 잡아주실 것을 구하며, 오직 주님만을 사랑하며 순종하는 자로 믿음을 잃지 않도록, 그리고 진리의 말씀으로 진리가 되어 진리를 외치는 증인의 삶을 살아낼 수 있도록 끝까지 굳게 붙들어 주실 것을 간구하는 것이 바로 막힘과 한계가 없는 “무엇이든지”이다. 그 기도는 반드시 응답하여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리라”(16:23). 사도바울의 고백과 같이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느니라”(갈 6:14), 즉 성도가 구하게 되는 "무엇이든지"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간구이며 그 기도만이 기쁨과 평안이라고 바울은 말씀해 주고 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다
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다시는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25)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계실 때에 항상 비유로 말씀하시고 다시 제자들에게 그 비유를 풀어서 설명하여 주셨지만, 바리새인들과 같은 유대인들에게는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기에,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나님께서 저희들의 보는 눈과 듣는 귀를 막으셨다’(막 4:12, 마13:11)고 말씀하셨다. 천국의 복음은 가시와 엉겅퀴와 돌짝과 같은 이 땅의 존재에게는 허락되지 않았기에 주님은 비유로 말씀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성령이 오시면 더는 비유로 이르지 아니하시고 직접 아버지에 관하여 그리스도에 관하여 모든 것을 밝히 말씀하여 주신다고 하신다(16:25). 그분은 이 세상 모든 인간을 위해 오신 분이 아니며, 오직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아(엡 1:4),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들(엡 1:5)에게만 뚫고 들어오셔서 영의 눈과 귀를 열어 주시며, 숨김없이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모든 것을 다 밝혀 알게 하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날에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직접 구할 것이며 내가 너희를 대신하여 아버지께 구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26 현대인 성경)
성령이 오시면 제자들이 직접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게 됨으로, 이제 더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대신하여 기도하는 일은 없다는 말씀이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로 죄의 담을 무너뜨리고 우리의 죄 값을 몽땅 지불하셨기에 죄에서 해방 받아 의인의 신분으로 아버지께 직접 나아가 아버지께 구하는 길을 열어주셨기 때문이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은혜로)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20).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죄의 대가를 자신의 의로운 생명으로 지불하셨기에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하여져 아버지에게로 나아가는 화목이 이루어진 것이다. 전혀 예상치도 기대하지도 믿기지도 않았던 구원과 영생이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아무런 조건도 대가도 행위도 없이 죄인에게 무상으로 선물로 임한 것이다. 그리고 현재 내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나를 성전 삼고 나와 함께 모든 것을 공유하고 계시는 연합의 상태로 화평을 이루어 주셨다. 그렇게 그분이 지불하신 극심한 고통과 죽음의 대가로 하나님과 화평케 된 자는 죄에서 영원히 해방 받아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의인으로 거듭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직접 아버지께 구하는 자가 된 것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게 하려는 것이다”(요 15:16).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
27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
이제 성령이 오셔서 영의 눈을 열어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으며, 십자가 구원의 의를 성취하셨음을 알고 깨닫게 됨으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그리스도를 믿게 되고 자랑하게 되며, 아버지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를 깨닫게 됨으로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을 사랑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과 의와 선을 나타내시는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 주셨고, 이 세상에서 십자가를 지시고 구원을 성취하여 주셨으며, 성령의 계시와 가르침으로 우리에게 향한 하나님의 뜻과 사랑을 깨닫게 됨으로 믿음으로 구원과 생명을 얻게 하셨다. 즉 구원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출발한다. 죄인을 살리기 위해 하나밖에 없는 사랑하는 아들을 죽이시는 그 사랑이시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 6-8).
사도 요한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로 구원을 이루어주신 그 사랑이 어떠함인지 알고 깨달으라고 ‘이처럼 사랑하여 독생자를 주셨다’고 선언하고 있다.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요일 4: 9-11)라고 우리에게 향한 한없는 사랑을 말씀해 주고 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다고 말하고 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때문에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은 아무 대가도 조건도 행위의 노력도 없는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죄인에게 임하는 사랑의 선물이다. 그분께서는 오직 사랑 하나로 죄인의 희생제물이 되어 피 값으로 우리를 이 세상과 율법의 저주에서 영원히 속량하셨다(갈 3:13). 죄 없고 흠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인들의 모든 죄가 그 치욕적인 십자가상에서 영원히 죽어 없어지는 권능으로 우리에게 향한 사랑을 확증하셨다. 그리고 그 영원한 사랑을 영원히 주시기 위해 주님이 성령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하나로 연합을 이루어 주심으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자로 거듭나게 하셨으며, 아버지의 영원한 사랑 안에서 하나로 영원을 살게 하셨다. 그리하여 주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16:27)라고 아버지의 사랑을 확증하여 주신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랑은 아버지의 아가페 신적 사랑이시며 하늘에 속한 생명을 잉태시키는 영생으로 이어지는 영원한 사랑이시며, 그 사랑을 주신 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이시다.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벌써 왔도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32)
주님은 이제 제자들을 떠나시면서 더는 비유로 말씀하시지 아니하시고, 장차 일어날 일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밝히 말씀하여 주심으로 제자들은 그제야 주님의 뜻을 알고 믿는다고 고백한다. “이제야 우리는, 선생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다는 것과, 누가 선생님께 물어볼 필요가 없을 정도로 환히 알려 주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것을 믿습니다"(16:30 새번역). 그런데 주님은 믿는다고 하는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16:32)라고 너희가 나를 믿는다고 하지만 이제 곧 나를 배신하게 될 것이며 다 흩어져 나를 떠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잠시 십자가 고난의 기간 동안 비록 제자들이 다 떠나고 주님 홀로 남게 되지만 혼자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고 마지막 순간까지 주님은 오로지 아버지 한 분만을 의지하고 그분께 자신을 맡김으로 그분의 뜻에 순종하여 그분의 뜻을 온전히 이루심을 다짐하신다.
제자들은 비록 입으로는 믿는다고 고백하였지만, 육신의 연약함으로 이내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도망가게 됨을 주님은 알고 계셨다. 하지만 이제 성령을 받으면, 제자들이 회개하고 다시 기쁨과 담대함으로 주를 위해 복음을 전파하는 증인의 삶을 살 것이며 주를 위해 순교자가 될 것임을 주님은 또한 알고 계셨다. 그리하여 주님은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 시점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심으로 당신에게 속한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13:1)고 말씀하고 있다. 그 사랑은 영원 전부터 계신 변함이 없는 사랑이었으며,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음으로 우리에게 향한 영원한 사랑을 확증하셨다. 바로 자신을 죽이기까지 사랑한 피의 대가로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기에 구원받기로 작정된 자를 절대로 포기하거나 중도에서 취소하시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하나님의 온전한 은혜의 덮음으로 그분의 공로를 믿고 의지함으로 인간의 모든 가능성을 배제하여 들어가는 나라이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속한 자들을 이 세상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생명을 입혀주시는 자발적인 사랑의 열정이시다. 다만 나를 당신의 자녀로 택하셨다는 그 이유 하나로 나를 이 세상 죄와 죽음의 멸망에서 건져내어 당신의 품에 넣어서 새로운 생명으로 잉태시켜 영원히 당신과 하나로 연합을 이루셨기에 중도에서 우리가 실수하고 죄를 범하였다하여 탈락시키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구원과 생명은 아무런 대가도 조건도 행위의 의로움도 없는, 즉 인간의 그 어떤 요소도 끼어들 수 없는 오직 무상으로 택함을 받았다는 그 이유 하나로 입혀주시는 선물이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엡 2:5).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엡 2:8-9).
우리는 죄인으로 타고난 본능 때문에 끝없이 하나님을 배척하고 반항하고 원망한다. 처음부터 티끌로 만들어진 연약한 육을 입은 무력한 존재이다. 제자들이 삼 년 넘도록 매일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 수많은 기적과 능력을 보고 체험하고 생명의 말씀을 매일 먹고 있었다. 그럼에도 주님이 무력하게 당하는 고난과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모습을 보고 실망하고 주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고 배신하거나 각각 제 곳으로 흩어져 버린 것이다. 이것이 육신을 입은 인간의 한계이며 우리는 항상 실수하고 넘어지며 근심과 불안과 두려움에 노출되어 있다. 매일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며 믿음을 지키려고 열심을 내며 분투하고 있다. 그런데 현실 속에서는 순간순간 주님을 의심하고 주님의 음성에 불순종하며 시험에 닥칠 때 주님을 배신하고 원망하고 불평을 쏟아내며 세상에 마음이 가 있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그렇게 매번 흔들리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후회하고 실망할 때가 또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 주님을 믿을 수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도 더더욱 주님을 사랑할 수도 없는 죄인들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셨다. 오직 아가페 사랑으로 인내하시고 용서하시고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시며 사랑의 품에 끌어안으시고 징계와 환난을 통하여 깨닫게 하신다. 그렇게 사랑으로 은혜를 입혀주심을 깨닫게 하여 모든 환난과 시험을 이기게 붙들어주시는 일이 바로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하시는 행사이다. 우리가 그분을 떠난다고 할지라도 그분은 절대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며, 한 사람도 잃지 않고 끝까지 징계와 환난과 시련을 통하여 당신의 자녀에 합당한 자로 믿음으로 세우셔서 당신에게 속한 자로 거듭나게 하시는 완성으로 강권적으로 끌고 가신다. 때문에 우리는 혼자가 아니며, 늘 그분과 동행하는 삶 속에서 그분이 섭리하신 인생을 살아가며, 모든 일은 주님 안에서 겪는 일이기에 어떠한 시험과 환난도 이긴다고 말씀하여 주신다.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16:33).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주님은 이제 곧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의 고통을 당하셔야 하며, 그토록 사랑하던 제자들이 곧 배신하고 흩어짐으로 홀로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 외로움을 견디어 내셔야 하며, 더욱더 힘든 것은 그분이 모든 죄를 짊어지고 ‘죄인’으로 정죄 받음으로 아버지께서 등을 돌리시고 아들을 저주와 죽음의 사형 틀인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시고 죄에 대한 심판을 아들에게 내리시는 그 버림을 받아내야 하는 고통이었다. 그렇게 피를 흘려야 하는 죽을 수밖에 없는 십자가 고난이 전제된 상황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오히려 기쁨과 평강과 담대함을 말씀하여 주신다. 전혀 기쁨과 평강이 없는 오직 멸시와 조롱과 채찍과 수치를 당하셔야 하는 그 힘든 십자가 고난을 앞에 두시고 오직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고 아버지의 영광이 천하에 나타나고 사랑하는 당신의 백성들이 죄와 사망에서 올라오는 그 영광을 바라보면서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과 평강을 줄 것이며’ 담대함으로 세상에서 환난을 이기게 해 주신다고 약속하신다.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16:22),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16:33). 즉 이 세상에서 비록 육신으로는 환난을 당하지만,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주님 안에서는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을 누리게 될 것이며,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안으로 환난을 이기게 됨으로 담대하라는 말씀이다. 주님이 주신 말씀대로 제자들과 사도들 그리고 믿음의 선배들이 주님이 주신 그 기쁨과 평강과 담대함으로 자신의 생명을 이 세상에 내놓고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평안’은 하늘나라의 영원한 평안이며, 그 평안은 오직 평강의 왕이신 예수그리스도에게만 속한 영생의 평안이기에 주님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한다"라고 말씀하신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 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33). 주님이 말씀하시는 평안은 환난이 없어지고, 근심과 두려움이 없어지는 평안한 상황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셨던 것과 같이 곧 닥칠 십자가 고난과 핍박과 죽음을 앞두고도 아버지에게 향한 믿음을 잃지 않고 온전한 순종으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성취에 대한 확신에서 오는 그 평안과 기쁨을 말한다.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십자가 삶을 살아내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평안과 기쁨을 체험하며,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분의 뜻과 능력을 신뢰할 때에 내 힘과 의지적 노력이 아니라 그분이 입혀주심으로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한 하늘의 평안과 기쁨을 누리게 된다.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것이기에 영원한 것이며 참된 것이며 변함이 없는 그 기쁨과 평안 자체이다.
우리 주님은 이 세상에서 평안과 기쁨을 누리는 삶을 사신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 기쁨과 평안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당신 자신은 오히려 세상과 유대 동족들로부터 온갖 미움과 배척과 멸시와 조롱과 박해와 같은 온갖 고난을 받으셨으며 기꺼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셨다. 점도 흠도 없으신 평강의 왕이신 주님이 이 세상에서 살아낸 삶은 참으로 비참한 삶이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기를 기뻐하셨으며 자신의 희생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기쁨과 평안을 주시기를 그토록 원하시고 기뻐하셨다. 주님은 당신이 한 알의 밀이 되어 죽으심으로 당신의 백성들이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아 천국으로 향하는 그 생명의 열매를 바라보는 것이 당신에게는 평안이 되고 기쁨이었던 것이다. 똑같이 우리 성도를 대표하는 사도 바울과 제자들도 이 세상에서 감당하기 힘든 박해와 학살을 당하였으며 세상적으로는 평강과 기쁨을 누리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하나같이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과 고난과 시험과 핍박을 당하나 담대하라, 기뻐하라, 감사하라, 즐거워하라, 인내하라,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격려하여 주고 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있어서 담대함과 기쁨과 평안은 환난과 고통의 상황을 씩씩하게 싸워서 꿋꿋하게 이기는 강인한 의지와 힘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두렵고, 떨리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주님의 약속을 붙들고 주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믿음을 잃지 않고 끝까지 견디어 내는 인내심을 말하며, 내 의지나 힘으로가 아니라 그때마다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말씀을 붙들고 말씀 속에서 평안과 기쁨을 누리는 오직 성도에게만 주어지는 은혜를 말한다. 그렇게 힘들고 고통스러운 상황과 현실을 능가하여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여 주신 완성된 천국이 바로 우리 앞에 펼쳐져 있다는 그 실상을 믿음으로 한발 한발 이끌려가는 것이 담대함이며, 그 담대함에서 격발된 믿음으로 기쁨과 평안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반드시 하나님의 자녀로 신부로 완성의 자리에 서게 하신다. 그분의 열심으로 이루어 가시는 그분이 입혀주시는 담대함이며, 평안이며, 기쁨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외치기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38-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