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의 깊은 영적 의미

요한복음 (요 17:1-5)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소서 / 영생은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2025. 4. 16. 09:49

요 17: 1-5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5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앞서 16장에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3-24)라고 말씀하시고, 제자들이 구하게 되는 그 “무엇이든지”의 내용이 어떠한 것인지를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로 가르쳐 주신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완전하고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직접 올리신 기도이다. 첫째는 예수께서 이제 십자가를 지심으로 아버지의 영광을 천하에 나타내는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시는 구원 성취에 대한 기도이며(1-8), 둘째는 제자들을 위한 기도이며(9-19), 마지막은 우리 성도를 위한 기도로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복음의 핵심이 담겨 있는 기도이다(20-26).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첫 기도는 자신의 십자가 죽음으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시는 간구이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17:1-2). ‘영화롭게 하다’는 말은 사람들로부터 높임 받고 숭배받고 섬김 받는 세속적인 칭찬과 명예와 이름의 명성과 같은 것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반대로 이 세상에서 멸시와 천대와 핍박을 받으시며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시는 일이 곧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일이며 자신이 영광을 얻는 때라고(요12:23) 말씀하셨다. 그 때를 이루시기 위해 아버지께서 자신을 보내셨으며, 이제 때가 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고 아버지의 영광이 천하에 나타나 사랑하는 당신의 백성들이 죄와 사망에서 올라와 아버지께로 나오는 화평이 이루어짐으로 그것이 곧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일이며 동시에 자신이 영광을 얻는 일이라고 동일하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첫째, 주님이 말씀하시는 “영광”은 곧 자신의 십자가 죽음이며 이는 창세전부터 정하신 뜻이며 보증된 승리의 영광이다.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 이러라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요13:30).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17:4). 주님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묵시 속에서는 완성된 반드시 성취되는 일이기에, 즉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그 자체가 바로 하늘에서 이룬 뜻이 이 땅에서도 반드시 성취되는 보증된 승리이기에 주님은 자신의 십자가 지심을 항상 일어난 사실로 영광을 받으신 일로 말씀하셨다. 둘째. 아버지가 말씀하시는 “영광”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요12:28). 아버지는 아들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온갖 멸시와 조롱과 핍박을 받은 그 고난의 삶을 가리켜 영광을 받으신 일로 말씀하시고, 이제 눈앞에 닥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가리켜 “네가 또다시 나를 영광스럽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가 아들에게서 받으시는 십자가 영광이다.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 이로소이다 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5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주님은 자신이 아버지께서 주신 일을 이루심으로 아버지를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셨고,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심으로 창세전 주님이 지니셨던 하늘의 영광으로 아들을 영화롭게 해 달라는 간구를 하신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17:4-5). 그리면 아버지께서 주님에게 주신 일은 어떠한 일이며, 창세전에 주님이 아버지와 함께 가지셨던 그 영광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첫째, 주님은 아버지에게 향한 철저한 순종으로 영광의 자리에서 종의 형체를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죄인들을 섬겨주셨다. 그분은 전지전능하신 권능으로 각종 질병에 묶여있는 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을 긍휼과 은혜로 고쳐 주셔서 정결한 자로 자유한 자로 만들며, 죽은 자를 부활시키며,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하늘의 떡을 먹이시는 수많은 능력들을 행하셨으며,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셨다. 이는 예수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목적과 의도가 바로 하나님 아버지를 온전히 계시하며, 그분의 영광을 세상에 나타내시며, 그분의 위대한 사랑과 충만한 은혜를 보여주시며,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우리에게 임하는지를 보여주어 알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죄인들로부터 온갖 멸시와 조롱과 박해를 받으셨으며,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자신을 십자가에 못을 박음으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셨다. 그리하여 주님은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셨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둘째, 아들이 십자가를 지시는 일은 창세전 하늘나라 묵시에서 이미 완성된 일이며,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해 오셨으며, 이제 그 뜻을 홀로 이루시는 그 고난과 그 고통의 길에 아버지의 권능으로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로 승리하게 아들을 끝까지 붙들어 달라는 간구가 바로 ‘창세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를 이루게 해달라는’ 기도이다. 한마디로 주님이 창세전에 지니셨던 그 영광을 이 땅에서도 이루시기 위해 담대함과 승리로 십자가에 죽게 해달라는 간구이다. 죄인들로부터 당하는 채찍과 춤배팀과 조롱과 수치를 오직 사랑의 십자가로 다 받아내시고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세상에 내어줄 수 있도록 끝까지 붙들어 달라는 그 애절함이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의 간구이다. 왜냐하면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영광은 창세전부터 정해진 일이기 때문이다. 즉 창세전 하늘의 묵시에서 완성된 영광은 바로 순종과 죽음으로 죄인들을 저희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며, 그 일로 아버지의 한없는 사랑과 용서와 자비와 긍휼과 오래 참으시는 선하심과 의로우심이 만 백성에게 전달되는 일이다. 예수님의 순종과 십자가 죽음으로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드러나게 됨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세상에 계시되고, 당신의 백성들이 그 영광의 하나님을 믿음으로 영화롭게 되는 일이 바로 영광이라는 뜻이다. 이는 또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히 순종하여 그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는 반사적 영광을 드러내는 하나님 절대적 의존자로 지어졌음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 향한 하나님의 의로운 구원으로 영광을 받으시는 일은 창세전 묵시 속에서 이미 이루어진 일이며 절대로 변경되는 일이 없기에 주님은 십자가 영광을 이미 일어난 사실로 과거사로 말씀하신 것이다. 이 세상에서 전개되는 모든 일은 이미 하늘나라에서 이루어진 묵시대로 펼쳐지는 섭리이며, 이와 같은 예정론을 성경에서 주장하는 근본 원인과 이유가 바로 하나님의 본체가 영광과 사랑이시며 선과 진리이시며, 그분은 정하신 뜻대로 역사를 주관하시며 절대로 중도에서 포기되거나 변경되는 일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당신의 영광을 천하에 나타내시기 위해 당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으며, 당신의 백성을 이 세상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당신의 영광을 입혀주는 일로 당신의 백성으로부터 영광을 받으시기로 정하셨다.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사 43:7),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8:17). 하나님은 태초로부터 계시는 영광이시기에 그분의 영원한 속성을 따라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이 바로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는 영화로운 일이며 영원한 것이다. 때문에 그분의 영광스러운 구원 성취에 인간의 그 어떤 주장이나 논리나 노력이나 행위나 의지가 전혀 개입할 수가 없는 것이며, 다만 그분의 영광스러운 선택과 구원에 오직 감사와 찬양과 기쁨의 은혜를 누리는 것뿐이다.

주님이 살아내신 영광의 삶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영광의 삶은 순종과 낮아짐과 종으로 자신을 희생하는 삶이었다. 이는 또한 성도가 추구하게 되는 하늘나라의 삶이며, 아버지가 원하는 삶이며, 그 삶은 이 세상과 완전히 반대되는 삶으로 자신을 철저히 부인하는 순종으로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는 십자가 고난의 삶임을 몸소 보여주셨다. 주님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하늘나라의 왕이시며 창조주이신 하나님이시다. 그럼에도 하늘나라의 영광을 내려 놓으시고 굳이 어린 아기로 죄인의 몸을 빌려서 우리의 모든 죄를 자신에게 전가시키시고 죄인의 육신으로 태어나심으로 죄를 짊어진 육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도말하실 수가 있었다. 주님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멸시와 핍박을 받으셨으며, 죄인의 육신을 입고 죄인으로 취급 받고, 정죄 당하고, 극심한 고문을 받아 내시고 저주의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6-11).

이사야의 예언대로, 그분은 이 세상과 동족인 유대인들로부터 온갖 “미움과 멸시를 받았으며, 아픔과 고통을 많이 겪으셨으며”(사 53:3), “굴욕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였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시고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아무런 대항을 하지 않으셨다”(사 53:7). 하지만 “그가 상처 입은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짓밟힌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며 그가 맞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얻었고 그가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다”(사 53:5). 그리하여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요 6:54-56)라는 말씀과 같이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심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죄와 사망의 파멸에서 구원하여 하나가 되는 영생을 입혀 주셨다. 이것이 예수님이 살아내신 하늘나라 영광의 삶이다.

이와 같이 주님은 자신이 한 알의 밀이 되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세상 끝까지 흩어져 있는 당신의 백성들이 죄와 사망에서 살아 올라오는 구원의 뜻이 이루어짐으로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영광을 얻는 때로 말씀하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17:4-5). 즉 주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배로운 피에 당신의 백성들이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아 영원히 죽지 않는 새 생명이 잉태되는 그 한없는 사랑과 영원한 영광이 깃들여 있다는 말씀이다. 그렇게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하늘과 땅을 통치하시며 심판하시는 모든 권세로 만물을 주관하시고 있음으로 주님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 이로소이다“(17:2),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며”(마 28:16),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요 5:22)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속죄의 십자가요 부활과 함께 영생의 새 생명을 입고 영화로운 아들로 영광스러운 신부가 되는 절정이다.

성도가 추구하게 되는 영광의 삶

성도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로 지음을 받았다(사 43:7). 성도에게 요구되는 영광의 삶이란 바로 우리 주님이 살아내신 십자가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삶이다. 우리 주님은 이 세상에서 영광과 섬김을 받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시며, 또한 세상과 맞서 싸우기 위해 강력한 군주로 오신 분도 아니셨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죽기까지 순종하여 세상 죄를 짊어지신 희생양이 되어(요1:29) 자신을 세상 죄인들에게 내어주어 온갖 고난을 다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사단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여 영생의 주가 되셨다. 그리하여 주님은 십자가 죽음이 바로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17:1) 일이며, 십자가의 때가 바로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때라고 말씀하셨다 (17:1; 12:23). 그리고 우리 성도도 주님이 살아내신 십자가 삶으로 이끌려가게 됨을 미리 말씀하여 주셨다.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로 말미암아 너희가 권력자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그들에게 증거가 되려 함이라”(막 13:9).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눅10:3). 분명 양이 세상 이리 속에 들어가게 되면, 이리에게 잡혀 뜯기고 찢겨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게 되어 있음에도 이리 가운데로 보낸다고 말씀하신다. 구약에서 믿음의 선지자들이 그 길을 갔으며, 신약에서도 주님의 제자들과 사도들이 그 길을 갔고, 우리 믿음의 선배들도 모두 세상 이리에게 잡혀 먹히는 어린 양의 길을 순종으로 받아들임으로 그 피의 씨앗으로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된 것이다. 그렇게 세상에 죽임을 당하는 일이 바로 주님을 증거하는 일이며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라고 말씀하신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롬8:18).

​​​그러므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이란 바로 우리 주님이 살아내신 철저한 순종과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십자가 삶이며, 그 길로 성도를 이끌고 가시기 위해 우리 주님이 친히 성령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의 모든 삶을 주관하고 계신다. 성도는 세상과 맞서서 싸우는 자도 아니요, 또한 빛과 소금의 착하 행실로 세상 부패를 방지하는 정화로, 세상 어둠을 밝히는 빛의 역할로 인정과 칭찬과 모델로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받는 위인이 아니다. 반대로 성도는 썩어지는 세상에서 분리된 썩지 아니하는 소금이며, 이 어둠의 멸망으로부터 구원받아 하늘나라로 입성하는 빛의 자녀이다. 그 빛과 소금의 삶은 세상이 공격하는 모든 고난과 핍박과 조롱과 살해를 감당하는 십자가 삶으로 세상을 무력하게 만드는 하늘나라 원리의 삶이며 주님이 성도에게 원하는 삶이다.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어떤 것도 자랑할 수 없나니 그분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있고 나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라는 삶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삶은, 세상 것이 털리는 가난으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부정하는 애통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온유로, 이 세상의 양식을 끊는 굶주림의 금식으로 옛사람이 죽고 오직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오직 진리의 말씀만을 받아먹는 진리의 아들로 완성의 지점까지 끌려가는 삶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성령으로 오셔서 우리 안에서 하나의 동행으로 모든 삶을 주관하셔서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절대적 순종으로 이끌고 가시며, 그 삶이 때로는 하나님의 징계와 시험과 환난으로, 때로는 이 세상에서 당하게 되는 멸시와 핍박과 고난으로 나타나며, 이는 우리에게 영광을 입혀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선한 의도이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 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즉 성도는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자로 완성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찬송하는 자로 운명되어 있다는 말씀이다. 때문에 성도는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사는 자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존재하며, 그 영광은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환경과 환난과 시련과 징계와 이 세상에서 당하게 되는 미움과 멸시와 천대와 핍박과 죽음을 순종으로 받아들이며, 주님의 성품을 따라 사랑과 용서와 자비와 긍휼과 겸손과 온유로 이웃을 대하며, 자기부인의 삶으로 잘 견디어 내는 것이며, 거기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세상에 밝히 드러남으로 하나님의 뜻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일을 하시기 위해 성령님이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내 의지와 내 노력과 내 열심이 아니라 성령님의 열심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자로 완성하시는 것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주님은 앞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15:7)라고 말씀하셨다. 즉 우리가 예수 안에 예수님이 우리 안에 하나로 동행한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 목적, 목표, 소망이 점차적으로 예수님과 일치하게 됨으로 우리가 구하게 되는 "무엇이든지"라는 첫째는, 예수님이 살아생전에 구하셨던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하나님을 열심히 아는 일이며, 둘째는,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여 자신의 전부를 주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을 열심히 알고 믿음으로 영생에 이르는 일이며, 마지막으로, 우리가 받은 영생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는 사명이다. 한마디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성경 말씀에서 깊이 알고 깨닫는 성령의 계시를 구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영생을 한 마디로 정의해 주셨다. “영생은 공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3). 즉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다는 말씀이다. 하지만 우리는 영생을 장차 하늘나라에 가서 영원을 사는 생명으로만 인식하고 있기에 현재를 사는 일상에는 별로 관계가 없는 것으로 이해하고 실제로 신앙생활에 결부시키지 못하고 있다.

주님은 ‘영생은 영원을 사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아니하시고,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17:3)라고 말씀하신다. 분명 ‘영생’이란 성도에게 있어서 부활하여 아버지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영원히 사는 생명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어떻게 사는가에 초점을 두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초점을 두심으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분은 어떠한 분이시며, 어떠한 대가를 지불하셨으며, 어떻게 그 영생이 우리에게 임하게 되는지를 알고 깨닫고 오직 십자가 예수그리스도만을 믿으라는 뜻에서 ‘아는 것이 영생이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자신을 “예수그리스도”라고 부르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은 그 이름이 바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밝히신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두 번째로, 부활하여 영원을 사는 일은 하나님의 백성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주님은 부활은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며 중요한 것은 어떠한 상태로 어디에서 무엇을 위해 영원을 사는 가로 판가름이 난다는 것이다.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행 24:15).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9). 즉 인간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때부터 영원한 인생이 시작되는데 하나는 영원한 천국에 생명의 부활로 들어가 영광의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는 심판의 부활로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막 9:48) 영원한 지옥 불에 떨어진다는 말씀이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선한 일’은 곧 선한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믿음을 말씀하신다. ‘악한 일’은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육신에 속한 자에게서 나오는 마귀의 행사이다. 주님은 분명히 “죄에 대하여라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다”(16:9)라고 믿지 않는 것이 곧 죄이며 심판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

주님은 영생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하라고 말씀하지 아니하셨다. 열심이 기도하며, 구제하며, 예배에 빠지지 말며, 십일조를 빼 먹지 말며, 의롭게 살며, 죄를 짓지 않도록 분투하라, 이와 같은 현재 교회에서 강요하는 것들을 행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다만 하나님을 알고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너희가 추구하는 영생이며 하나님과 아들이 너희를 위해 하신 일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며 영생을 얻는 일이라고 엉뚱한 답을 주셨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17:3),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 6:29). 왜냐하면 오직 그분 안에만 생명이 있기 때문에 그분을 알고 믿는 것이 곧 구원과 영생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오로지 당신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시며,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의 앞으로 나오게 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유일한 길이 바로 예수그리스도가 이루어주신 일을 아는 것이다. 주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다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14:6-7)라고 말씀하신다. 즉 하나님은 자신을 알고 올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아들로 정하셨기에 그분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알 수도 또한 그분에게로 나올 수도 없다는 말씀이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을 통하여 우리에게 향한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을 알게 되며, 그분은 참으로 용서와 자비와 긍휼과 오래 참으심과 온유와 평강이시며 거룩하시면서도 인애하신 분이심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성도는 오직 십자가 피의 공로만을 의지하여 믿음으로 살아가게 되며, 아무런 의심 없이 이제 아버지의 아들로, 그리스도의 신부에 합당한 자로 완성될 자신의 종말적 실상을 굳게 믿고 목숨을 다하여 주님이 살아내신 순종과 자기 부인의 십자가 삶을 실제로 살아가게 되며, 그것이 곧 믿음으로 영생을 사는 성도의 신앙생활이다.

이 세상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은 성도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로,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으로 거듭나 ‘영생을 얻은 자’로 새로운 하늘나라의 삶으로 인도를 받게 된다. 성도는 성경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와 우리의 고향 하늘나라에 관한 참된 지식을 배우고, 알고, 깨닫고, 이해하며, 자신이 어디에서 구원받았는지를 알게 되며,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그리스도께서 어떠한 희생을 지불하셨는지를 알고 깨닫게 됨으로 오직 주님만을 믿고 의지하며, 아버지의 뜻하신 계획과 섭리를 깨닫게 됨으로 주어진 환경과 허락하신 시험과 환난 속에서 십자가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삶을 담대함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 과정에서 성도는 모든 일에 순종하는 성실한 자로, 믿음에 굳게 서서 진리를 전파하는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오직 십자가 예수그리스도만을 사랑하고 자랑하며, 그분의 영광을 천하에 나타내는 복음 전파에 증인이 되는 완성의 지점에 도달하게 되며, 그 삶이 바로 성령님이 이끄시는 ‘영생‘의 삶이다. 성도는 이미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심으로 영적으로 예수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죄와 무관한 자로 영생을 살아가고 있다. 그리하여 주님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이미 영생을 얻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왜냐하면 성령은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심과 동시에 아버지의 자녀임을 보증하여 주시기 때문에 ‘영생을 얻었다’는 말씀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특별히 내려주시는 영생의 은총이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하시나니”(롬 8:16). 즉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거듭난 아버지의 자녀로 신랑 그리스도와 하나로 연합하여 영생을 누리고 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영생의 본질

예수님은 부자 청년과의 대화와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영생의 본질을 설명하여 주셨다 (눅 18:18-25 / 10:25-37). 주님은 부자 청년의 비유에서는 하나님보다 자신의 의와 가치를 더욱 사랑한 자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라는 율법을 어긴 자로 폭로하시고,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는 율법으로는 절대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눅 10:27)는 율법을 지킬수 없는 자임을 폭로하셨다.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묻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눅 18:18) 라고 영생은 내가 무엇을 해서 얻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율법을 열심히 지킴으로 사람들로부터 의로운 사람이라 칭찬과 인기와 명예를 얻은 자신만만한 사람이었기에 감히 주님 앞에서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 하니이까”(마19:20) 라고 자신의 율법 지킴을 자랑하며,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름으로 ‘나는 지금 영생에 필요한 모든 선한 행위를 다 하였다’고 자신을 선한 자로 여기고 있었다. 주님은 그의 외식적이며 거짓된 율법 지킴을 폭로하기 위하여 직선적으로 “선한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니라”(눅 18:19)라고 말씀하심으로, 선이라는 것은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나오는 것이지 너의 율법적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며, 너는 지금 율법 지킴으로 영생을 얻은 자가 아니라 도리어 죄와 사망의 법에 묶여있는 죄의 종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눅18:22)라는 치명적인 말씀을 던진 것이다. 너 자신의 영광과 영생을 얻기 위해서 이때껏 쌓아놓은 공로와 업적들을 버리라는 말씀이다. 즉 너의 존재 가치와 명예를 지키기 위해 움켜쥐고 있는 모든 소유를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이다. 그러자 부자 청년은 근심하며 영생의 주님을 떠난 것이다. 주님은 그 청년을 “부자”라고 불러주심으로 그가 섬긴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이 세상 맘몬이며, 영생을 얻기 위해 열심히 쌓아놓은 그 의와 업적들이 오히려 영생을 잃게 하는 걸림돌임을 지적하신 것이다. 즉 그의 율법 지킴이 자신의 의와 영광을 얻기 위한 방패였으며, 그는 자신의 의와 가치를 하나님보다 영생보다 더 사랑하였음이 폭로된 것이다. 그러므로 영생은 내가 무엇을 해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나를 위해 쌓아놓은 이 세상의 것들을 잘라 버림으로 세상에서는 무소유인 거지로, 하나님을 향하여서는 은혜와 사랑의 충만으로 영생으로 살아 올라오는 것임을 명쾌하게 제시하여 주셨다.

그리고 주님은 좀 더 구체적으로 영생의 본질과 그 영생이 어떻게 얻어지는가를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상세히 설명하여 주신다(눅 10:30-37). 예수님은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눅 10:25)라고 묻는 율법사에게 율법의 총 강령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율법사의 허위와 외식을 폭로하시며 영생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말씀하여 주신다. 주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주심으로 너는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 영생을 얻은 자가 아니라, 반대로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오히려 율법을 범하고 있는 자임을 먼저 지적하신다. 율법을 지킴으로 ‘율법사’로 불리는 그에게 있어서 ‘이웃사랑’은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개처럼 취급받는 이방 사마리아인이 절대로 그들의 이웃이 될 수가 없으며 또한 세리와 창녀와 질병에 걸린 자들을 부정한 자로 죄인이라 정죄함으로 자신들의 이웃이 될 수 없다고 규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웃사랑을 자신들과 뜻이 같고 자신들을 따르는 자에게만 국한시켰기에 사실 그들은 율법을 범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율법을 지켜 영생을 얻은 것으로 자고하여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눅 10:29)라고 주님께 물음으로 자신은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고 자만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주님은 그에게 유대 땅을 밝은 개처럼 취급받는 이방인 사마리아인과 강도 만나 죽어가는 자를 등장시킴으로 그의 율법 지킴이 얼마나 거짓이며 외식인지를 폭로하신 것이다. 주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율법사에게 ‘너는 지금 누구를 사랑할 수 있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네가 바로 강도를 만나 거의 죽어가는 불가능한 자이며, 누군가가 와서 구해주지 않으면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자이다’라고 그의 실체를 보여주신 것이다. 즉 네가 열심히 지키고 행하여 영생을 얻었다고 믿어온 그 율법이 바로 너를 죽음으로 후려치는 ‘강도’이며, 너는 지금 그 ‘강도’를 만나 참하나님을 잃고 죽어가는 상태이다는 것이다. 그리고 율법으로는 구원이 없음을 확실히 보여주기 위해 주님은 이 비유에서 율법의 권위자인 제사장과 레위인을 등장시켜 그들이 강도 만나 죽어가는 자를 보면서도 구하지 못하고 피하여 지나가는 자로 묘사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목숨으로 지키고 행한 그 율법에는 죽은 자를 살려내는 기능도 역할도 없었기 때문이다.

주님은 이 비유에서 특별히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이라고 밝힘으로 그곳은 성전과 율법을 상징하는 예루살렘 땅임에도 불구하고 강도의 소굴이 되어 있었기에 그 길에 강도에게 맞아서 곧 죽게 된 자를 등장시킨 것이다. 그곳은 성전과 그 성전을 섬기는 제사장들의 거주지임과 동시에 강도의 소굴이었음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리고 강도 만나 죽어가는 자를 눈앞에 보면서도 살리지 못하는 제사와 율법의 권위를 가진 제사장과 율법사를 등장시킴으로 그들도 역시 강도 만난 자와 다름없이 율법에 의해 죽어있는 자들임을 폭로하신 것이다. 그렇게 형식적인 율법과 제사에 목숨 걸고 있지만 실상은 율법에 의해 강도의 소굴이 되어 죽어가고 있는 그들의 실체를 비유로 드러내신 것이다. 그리고 강도 굴로 변한 유대 땅에 원수로 멸시받는 한 사마리아인이 등장하여 자신의 목숨을 걸고 강도 만나 죽어가는 원수를 살려내신 것이다. 그들이 배척하고 멸시하는 그 선한 사마리아인이 바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하고 있으며, 영생은 율법을 지킴으로 네가 선을 행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너는 이 세상 강도에게 맞아 죽어있는 자이며, 선한 사마리아인이 너를 찾아와 주어 그 강도굴에서 구원하여 주심으로 살아난 자이며, 그럼으로 영생은 선한 사마리아인 에게 너 자신을 맡김으로 아무런 조건도 대가도 행위의 의로움 없이 오직 긍휼과 은혜로 무상으로 입혀지는 선물이라는 것을 명쾌하게 설명하여 주신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여 생명을 줄 수 있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가 없다. 우리가 바로 강도 만난 자와 방불한, 즉 죄와 허물로 죽어있는 존재이며 그것이 우리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영생을 묻는 율법사에게 이것이 바로 영생의 본질임을 비유로 설명해 주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하나님을 목숨 걸고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이 세상 강도 굴에서 강도에게 다 빼앗기고 털리고 맞아서 죽어있는 상태에서 아무런 조건도 공로도 없이, 오직 우리 주님이 이 죄악의 강도 굴에 뚫고 들어오셔서 살려주심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다. 강도 만나 죽어가는 자에게 무슨 업적과 명예가 필요하며 꿈과 비전이 있겠는가? 오직 살려달라는 외침과 애걸뿐이다. 그러므로 영생은 행위의 의로움으로 율법 지킴으로 인간의 노력과 의지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죽음의 상태에서 오직 주님이 찾아와 주셔서 이 세상 강도 굴에서 끄집어내어 구원하여 주심으로 불가항력적 은혜로 영생을 선물로 받은 것이다. 그렇게 모든 것이 다 털리고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거지 나사로와 같이, 강도 만나 죽어가는 자와 같이,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탕자와 같이, 자신이 죽었음을 인식하고 오직 구원자만을 갈망하는 그 한 가닥의 희망을 가지고 있는 당신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져서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는 영생을 얻게 됨을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명쾌하게 설명하여 주신 것이다.

영생은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로 주시는 선물이다

성도는 십자가 구원과 성령의 거듭남으로 이 세상에서 영생을 사는 자로 성령의 인도를 받고 있다. 그리하여 주님은 구원받은 성도를 가리켜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눅 17:21)라고 하셨고, 너희는 이미 ‘영생을 얻었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요 5:24)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육신은 영생의 삶과 전혀 다른 죄인의 모습으로 죄인의 삶을 사는 것 같이 보이고 또한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흙으로 지음을 받은 육신은 육체의 욕심을 따라 스스로 쇠하여지는 삶으로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자연의 법칙임을 창세기 3:15절에서 선포하셨다. 하지만 영은 하나님께 속한 영원한 생명이기에 영으로 태어난 자는 아버지와 신랑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로 영원을 사는 자로 정하셨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즉 육의 생명은 육의 죽음과 같이 없어지지만, 아버지께 속한 영의 생명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히 죽지 않는 영생이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6:63).하나님의 본체는 영생이시기에 오직 아버지께로 난자, 성령으로 거듭난 자만이 영생을 살게 되며, 그 생명은 하나님의 속성이므로 아버지가 자녀에게만 사랑으로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다. 이는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선택받은 자에게만 믿음을 주어 영생을 입혀주시는 은총이며 특권이다.

인간은 아담의 타락으로 영이 죽어있는 상태에서 사단의 종이 되어 육체의 탐심과 정욕을 따라 오직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며 자신을 숭배함으로 끊임없이 하나님을 배척하고 대적하는 육적 존재가 된 것이다. 사도바울은 육의 정욕을 따라 사는 자를 “육에 속한 사람”(고전 2:14), “육신”(롬 8:6)이라고 부른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육신이 살아있는 동안 오직 이 세상 것들을 목적으로 추구하며 내 '자아'를 주장하며 자신이 주인이 되어 육의 정욕대로 살아가게 된다. 지적하기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 17) 함과 같이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성도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갈 5:24). 즉 영과 육, 이 두 소욕은 우리가 육신의 몸을 벗지 않는 이상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서로 대적하는 갈등을 겪게 됨을 지적하고 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2-24)라고 외칠 수밖에 없는 것이 성도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실상이다.

성령으로 거듭나 영생의 삶을 산다고 하여 육체의 소욕이 소멸된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말씀과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어느 정도 육체의 소욕을 절제할 수는 있다. 하지만 육신의 노력과 의지대로 되는 일이 아니다. 아무리 제어하려고 노력하고 열심을 부려 도덕적으로 깨끗한 자로, 공로와 업적들을 쌓아서 의인이라 칭함을 받는다고 하여도, 그 ‘의’는 죄인의 몸에서 나온 의로 자신의 이름과 명예를 세우기 위한 이 세상에 속한 썩어짐의 의이기에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들을 ‘죄’로 정하셨으며, 모든 인간은 ‘죄 아래 있음으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으며, 선을 행하는 자는 없다’(롬 3:9-12)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리하여 주님은 영생을 쟁취하기 위해 열심을 부리는 바리새인의 ‘의’는 하나님의 은혜를 망령되게 하는 거짓과 외식이며, ‘너희 아비 마귀의 행사이며’(요 8:41),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난 욕심’(요 8:44)이다고 선언하셨다. 주님은 그렇게 열심을 부러 영생을 얻은 것으로 자칭하는 그들을 향하여 너희는 독사의 새끼, 뱀, 외식하는 자, 회칠한 무덤이며, 토한 것을 도로 먹는 더러운 돼지와 다른 이들을 물어뜯는 개와 이리이며, 양을 해치는 절도와 강도이며, 쇠사슬로 묶어놓아도 감당이 안 되는 군대귀신 들린 광인으로 비유하여 말씀하셨다. 사도 바울도 모태에서부터 전신에 차 있는 인간의 실체가 바로 열린 무덤처럼 죄가 목구멍까지 차고 넘친 상태이며, 그 열린 무덤에서 쏘다져 나오는 것은 오직 추악하고 썩어빠진 시체 냄새가 나는 죄뿐이라고(롬 3:10-18)지적하고 있다. ‘육신 속에서 선한 것이 없이 열린 무덤과 같이 패역하였기 때문에’(롬 7:18 –21)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다” (갈 3:10)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영생은 인간 쪽에서 노력하여 인간의 의지대로 쟁취되는 것이 아니다. 사도 요한은 아주 확실하게 규명하였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예수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와 영생은 혈통도, 육정도, 의지도, 사람의 뜻과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가 있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뜻을 정하셨기에 독생자를 우리에게 보내 주셨으며, 그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심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셨으며, 그 십자가로 이루어주신 구원을 주시려고 우리에게 믿음의 마음을 주셨으며, 오직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당신의 백성에게만 믿음으로 영생에 이르게 하신다는 것이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13:48).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영생은 창세전 하나님에 의해 계획되고 하나님의 손에서 작정된 것이기에 그 영생을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다.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딛1:2). 하나님의 작정이 역사 속에서 실현이 되는 것이 바로 구원이며 영생이다.

영생은 이와 같이 인간의 쟁취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택함을 받은 자에게만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여 주시며,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을 온전히 알고 믿는 믿음을 주시며, 그 믿음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섭리를 알고 그 뜻에 순종하는 삶을 추구하게 된다. 성경은 우리에게 반복하여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하여 주고 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2:16). 호세아 선지자가 율법과 제사를 목숨처럼 여기며 지켜내려 애를 쓰는 이스라엘에게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고 외쳤다는 것은 사람이 율법적 행위로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구원을 얻는 것임을 제시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