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의 깊은 영적 의미

요한복음 (요 12:12-19) 예수님은 왜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셨을까?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2025. 4. 18. 09:12

요 12:12~19

12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 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14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시니 15 이는 기록된바 시온 딸아 두려워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16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인 줄 생각났더라 17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거 한지라 18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 이러라 19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 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없다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 하니라

예수님은 이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시게 된다. 하나님은 마리아를 통하여 예수님의 머리와 발에 기름을 부어드림으로 우리 주님이야말로 진실한 왕이시며 구원자이시며 참 제사장이심을 나타내셨다. 동시에 마리아는 우리 성도를 대표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동참하는 신부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전부를 상징하는 어마한 향유를 몽땅 예수님의 머리와 발에 쏟아붓고 구원의 아름다운 발에 입 맞추고 자신의 머리를 풀어 닦아드림으로 신랑으로 영접하는 성도의 믿음을 나타낸 것이다. 마리아의 향유 도유는 하나님의 섭리로 행하여진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함께 죽는 연합을 의미하기에 주님은 마리아의 행함을 ‘믿음’이라고 칭찬하여 주셨으며, 마리아의 행함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을 반영하였기에, 주님은 ‘복음이 전해질 때 이 여인의 이야기가 함께 전해지게 될 것이라’라고 복음으로 제시하셨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향유 도유의 예고대로, 이제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을 이 세상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신부로 맞이하기 위해,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몽땅 쏟아부어주시는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구원의 발길을 옮긴 것이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다

9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보기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10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11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났다는 소문으로 사람들은 예수님과 나사로를 뵙기 위해 베다니로 몰려왔다.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에 예수님에게 모여들었고 나사로의 일로 예수님을 믿게 된다. 이에 유대인의 종교 지도자들은 시기와 질투로 예수님을 미워하며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기득권과 특권에 위험을 느끼게 된 것이다. 이들은 공회를 열어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고 나사로까지 죽일 모의를 하고 있었다.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12:10-11).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고, 그 몸에서 썩은 냄새가 나는 사람을 다시 살려 내심으로 예수님은 참으로 생명의 주관자이시며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분명한 증거로 나타났음에도 오히려 이 일로 예수님과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한 것이다. 분명히 살아있는 부활의 증인을 보면서도 질투심으로 자기들의 이익과 영광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쇠사슬로 묶어 놓아도 감당이 안 되는 광인처럼 예수님을 살해하는 데에 미쳐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들의 악함을 이용하여 도리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만인을 위한 속죄 제물로 삼으심으로 만인을 구원하고자 하는 구원의 뜻을 선으로 의로 성취하신다.

예루살렘의 입성과 무리들

12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14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마21:7

예수님은 이제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 희생양, 속죄양이 되어 스스로 죽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 반면에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예루살렘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그럼에도 예수님은 자신을 환호하는 무리들의 행렬과 함께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고 있었다. 그 당시 로마 사람들의 기록에 의하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모여든 사람은 약 270만명이 되었다고 하며, 유월절 제사를 드리기 위해 한 번에 죽인 양의 숫자가 18만 6천 마리나 되며, 당시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그 유월절에는 무려 25만 6천5백 마리의 양을 죽였다고 하는데 메시아 대망의 간절함이 극치에 도달하여 있음을 보여 준다. 참으로 한탄스러운 일은 그들이 그 많은 양을 잡아서 제사를 드리며 그토록 대망하는 메시아, 참 유월절 어린 양으로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이 바로 그들의 눈앞에 나타나셨음에도 예수를 메시아로 그리스도로 영접하지 않고 여전히 양을 잡는 제사를 드리며 오히려 참 제물로 오신 예수를 죽이려고 한 것이다.

예수님의 입성과 무리의 환영

공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어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어린 나귀를 끌고 오라고 하신다. 그 나귀를 가지고 온 제자들은 자신들의 겉옷을 그 위에 올려놓고 예수님을 태우며 예루살렘을 향할 때 많은 무리들도 자신들의 겉옷을 길가에 펼치며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12:13)라고 외치며 예수님과 제자들을 열렬히 맞이하였다. ‘호산나’의 뜻은 ‘지금 구원하소서’이며, 시편 118:25절 “여호와여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를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의 말씀과 스바냐 3:15절,“이스라엘 왕“의 말씀을 인용하여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치며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환영한 것이다. 즉 예수님을 ‘약속된 메시아’로 구원자로 인정하는 외침이었다. 예수님은 이태까지 자신이 바로 메시아이시며 왕이시며 구원자 이심을 완전히 드러내지 않으셨다. 그러나 이제는 온 세상이 예수님이 바로 구원자시며, 메시아시며, 왕이시라고 외치는 그때가 온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도 그들의 외침과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길에 펴고, 또 자기들의 겉옷까지도 내어 펴며 ‘호산나,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고 외치며 예수님을 열렬하게 환영함을 막지 않으심으로 무리의 환호와 이스라엘의 왕으로 영접하는 행렬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심으로 무리의 외침으로 자신이 바로 만왕의 왕이시며 만백성의 구원자 이심을 온 천하에 선포하신 것이다.

예수님을 열렬하게 환영했던 이유: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이 세상 죄와 사망의 저주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보내 주셨고, 이제 때가 되어 아들을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입성시켜 십자가를 지게 하심으로 구원의 뜻을 이루시게 하신 것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기대하는 메시아는 백마를 타고 오시는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오셔서 맹렬한 진노로 유대인들을 억압하는 대적자들을 물리치시는 세상 왕이었다. 항상 이방인들의 압제를 당해온 유대인들은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아의 도래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사렛 예수라는 청년이 이적과 기적으로 각종 질병을 고치시고, 오병이어로 하늘에서 내린 떡을 먹이시며,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는 능력을 행하시는 소문이 퍼지자, 유월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큰 행렬을 지어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를 외치며 열광하고 있었다. 그들은 로마로부터의 자유와 가난으로부터의 탈출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기에 능력과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이야말로 유대 민족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하며, 부와 명예와 존귀를 가져다줄 메시아임이 틀림없다고 인정하고 믿었던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의 간절한 소망은 하루속히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는 해방이며 세상을 지배하는 화려한 다윗 왕국을 이루어주는 메시아를 영접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장막절에 흔드는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예수님을 정치적, 군사적 메시아로 인식하고 ‘호산나 호산나’ ‘지금 구원하소서’를 외치며 예수님을 민속 메시아로 환호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좋아하는 민족이었기에 표적과 능력을 행하시는 예수님이 로마제국을 뒤엎고 세계를 지배하는 강국을 건립하는 세상 왕이 되어주기를 기대한 것이다. 오병이어의 표적이 있은 후에도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 왕이 되어주기를 간청한바 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큰 표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이 자신들의 욕구를 채워줄 정치적 경제적 메시아에 적합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오해가 예수님을 외롭게 하셨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여’(마 1:21) 영원한 생명을 입혀주시는 하나님의 나라의 입성을 위하여 이 세상에 내려오셨으며, 유월절 희생양으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실 진정한 왕으로써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것이다. 세례 요한은 일찍이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요 1:29)이라고 증거하였으며, 그 증거대로 예수님은 유월절 희생양으로 당신의 백성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발걸음을 옮긴 것이다. 예수님은 비록 열광하는 무리의 환호로 이스라엘 왕으로 외치는 무리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지만, 실상은 그 누구도 십자가 고난과 죽음의 길을 홀로 외롭게 가셔야 하는 그 무거운 마음을 알지 못하였다. 제자들마저 예수님의 죽음을 앞에 두고 누가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 경쟁을 한 것을 보면 예수님이 얼마나 외로우셨을지 알 수 있다.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반응

10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눅16:31) 11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19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 하니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같은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많아지자,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12:19)하며 세상이 자기들이 아닌 예수님을 좇는 것에 절망하였고 결과적으로 진실을 말한 셈이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12:32)라고 친히 말씀하신 대로 실제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들려 올려 지자 온 세상이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하는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된 것이다. 이와 같이 자신들이 예수를 대적하여 죽이기로 계획하고 추진하는 모든 일들이 아무런 효과를 내지 못하게 된 것이다. 대제사장들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좇는 일에 당황하였고 시기와 질투로 자신들의 누리는 기득권과 지도자의 특권과 영광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예수님을 죽이기로 공회를 모아 결의하고 예루살렘에 올라오실 예수님을 붙잡아 죽이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예수님을 향해 ‘호산나’를 외치며 환호로 맞이하는 무리들은 기적을 일으키시는 예수님을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가난에서 벗어나 이 세상 복을 가져다주는 왕으로 삼으려고 열광하고 있었고, 반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은 미친 듯이 예수님을 죽이려는데 혈안 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자신들과 타협하지 않고 오히려 맞서서 자신들의 죄악을 폭로하며 저주의 말씀을 퍼부으며, 자신들이 ‘죄인’이라 정죄해 놓고 배척하는 가난하고 소외된 온갖 질병에 걸린 자들을 기적과 능력으로 깨끗한 자로 고쳐 주시고 그들과 친구가 되는 예수님의 사역이 자신들의 뜻과 어긋나며 자신들의 의와 영광을 세워주는데 전혀 도움을 주지 않고 반대로 ‘마귀의 자식’ ‘독사의 새끼’라고 이들의 외식적 악행을 폭로하셨기 때문이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서로 다른 것 같지만 결국 며칠 뒤 한 편이 되어 ‘호산나’를 외쳤던 동일한 목소리로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외치게 된다.

대제사장들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은 로마를 등에 업고 권력을 행사하며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민란과 혁명을 억제해 주고 로마로부터 자치권을 얻은 자들이다. 이들은 예수로 인한 무리의 열광으로 불안해하였으며, 자신들의 종교적 기득권과 정치적 권력 유지에 예수님이 눈에든 가시처럼 여겨짐으로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뿐만 아니라 나사로까지 함께 죽이려고 모의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영광과 이익을 위해 진리를 외면하며 진리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려고 한 것이다. 나의 가치와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는 하나님마저 죽이려고 하는 마귀의 본심이 드러난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들이 고수하는 전통이나 유전의 가치를 우선시하며,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의 가치보다 자신의 이기적 목적을 우선시하며,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신의 지위나 명예와 칭찬과 인기의 가치를 우선시하며, 진리의 말씀을 왜곡 하서라도 자신의 인간적 가치를 챙기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죄된 본심이다. 그리하여 교회 안에서도 노골적으로 인간의 가치를 높여주고 추구하는 설교로 교인들을 선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

14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마21:7)  15 이는 기록된 바 ㄱ)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슥9:9

유대인들은 다윗의 후손 중에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메시아가 올 것을 대망하여 왔다. 그들은 수많은 기적과 표적들을 행하시며 죽은 자까지 살리시는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서만 나오는 표적들을 보고 들으면서 예수님을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스라엘의 왕’으로 인식하고 ‘호산나’를 외치면서 왕으로 영접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이 세상 왕의 기세로 백마를 타시며 무장한 군사들을 거느리시고 황금마차를 타시는 권세와 위엄으로 행차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당시의 왕의 모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어린 나귀 위에 올라타, 발이 땅에 끌리며, 때로는 어린 나귀가 뒤뚱거리며 넘어질 뻔하는 참 우스운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이다.

주님은 이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정치적 군사적 물질적인 강력한 군주의 모습으로 오신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하나님이시지만 인간의 육체를 입으시기 위해 우리 육신 안에 뚫고 들어오시는 아기의 모습으로 우리 인간과 똑같은 방법으로 한 인간으로 태어나셨으며, 왕궁의 왕실에서 세상이 축복하고 영접하는 가운데서 태어나신 것이 아니다. 반대로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핍박을 당하셔서 애굽으로 피신하셔야 하셨으며, 이 세상 죄악의 더러움을 상징하는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으며, 구유에 눕혀지심으로 자신의 전부를 죄인에게 내어 주셨으며, 30년 동안 평범한 목수의 아들로 가난한 목수의 집에서 자라나셨으며, 그 겉모양도 풍채도 없는(사 53:203), 즉 사람들이 눈을 돌릴 정도였다고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결국 때가 되자 자신의 인생을 상징하는 천하고 겸손하며 연약하고 무력한 어린 나귀를 타시는 모습으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것이다.

왜 예수님께서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야 하셨을까?

하늘나라의 왕이시며 메시아이시며 그리스도이신 우리 주님이 이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데 나귀 어린 새끼를 타신 것이다. 왕은 백마가 어울리지만, 하늘나라 왕이신 예수님은 말이 아닌 나귀 새끼를 타심으로 세상 왕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으며, 그러한 예수님의 입성은 이미 구약에서부터 예언되어 있었다. “기록된바 시온 딸아 두려워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12:15)라고 스가랴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슥 9: 9-12  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10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11 또 너로 말할진대 네 언약의 피로 말미암아 내가 네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 12 갇혀 있으나 소망을 품은 자들아 너희는 요새로 돌아올지니라 내가 오늘도 이르노라 내가 네게 갑절이나 갚을 것이라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시고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고 전쟁하는 활을 끊어 버리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즉 적들과 싸우기 위해 말과 병거와 활로 무장을 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없애버리시겠다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을 구원함에 있어 하나님께서 친히 싸워주시기 때문에 병거와 말은 무용지물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 분이 병거와 말과 활을 끊어 버리신다는 것은, 한마디로 세상 힘이 너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희생 제물로 오신 어린양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이라는 것을 계시하고 있다. 그래서 9:11절에서 오직 언약의 피만이 구원이라고 말씀하신다. “네 언약의 피를 인하여 내가 너의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 그러므로 주님의 나귀 행차는 이스라엘이 원하는 이 세상의 것들을 채워주시기 위해 오신 메시아가 아니라 오히려 이 세상의 것들을 없애 버리는 철저한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십자가 피 흘림으로 구원과 화평이 이루어짐으로 이것이 곧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이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것들을 구하는 것이라면 피로 구원하실 필요가 없게 된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죄와 사망의 저주에서 탈출하여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지는 것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피의 언약으로 성취되는 일이며, 이는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정하신 하늘나라 구원의 법칙이며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피만이 구원이며 생명임을 정하신 진리이다.

말과 병거와 활은 이 세상 용사의 힘을 자랑하는 승리의 상징이다. 주님은 이 세상 힘과 능력을 상징하는 백마를 타시고 오신 것이 아니라 연약하고 힘없고 무력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심으로 이 세상 힘의 원리를 깨뜨리고 하늘나라의 원리로 세상을 이기게 됨을 계시하여 주신 것이다. 시편의 묘사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속한바 기름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 오른손에 구원하는 힘으로 그 거룩한 하늘에서 저에게 응락하시리로다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 하리로다”(시20:6-7). 바로 이와 같은 예언으로 예수님이 백마가 아닌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심으로 당신을 좇는 성도도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지하는 나귀 새끼를 타는 인생으로 끌러 가게 됨을 계시하여 주신 것이다. 즉 이 세상 힘의 원리가 아니라 하늘나라의 원리로 어린양 희생제물이 되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사도 요한은 이 전체의 내용을 단 한 절로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12:13)라고 요약하여 스가랴의 예언을 인용함으로 예수님의 나귀 행차는, 자신들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인정하지 못할 뿐 아니라 이 세상의 힘을 얻어 화려한 다윗 왕국의 재건을 꿈꾸는 유대주의와 이 세상 권세를 부수고 세상 끝까지 흩어져 있는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러 오시는 참된 하늘의 왕으로 겸손한 나귀 새끼를 타시는 언약의 피로 그 일을 이루실 것임을 제시하고 있다.

세상의 힘을 상징하는 군왕들은 당연히 보잘것없는 나귀를 탄 연약한 예수님을 멸시하며 쉽게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고 비웃으시며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마지막 때 백마를 타시고 성도를 거늘이시며 그들에게 철장으로 부시는 심판을 내릴 것이다. 바로 약함이 강함을 파하는 형국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땅 끝까지 승리로 이르게 됨을 바리새인들의 입을 통하여 인정하게 하신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 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없다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요12:19)라는 구절이 붙어있다. 하나님은 바리새인들의 입을 통하여 시편 2편 8절의 말씀,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에 의해 온 세상이 정복당할 것임을 예언하게 하신 것이며, 온 세상 당신의 백성들이 나귀를 타신 예수에게 다 돌아오게 될 것임을 제시한 것이다. 그렇게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셔서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의 이야기는 창세기에서부터 예언이 되어 있다.

창 49:10~11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 하리로다 11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야곱이 자기의 아들 유다에게 유언을 남기는데, 그의 후손으로 실로. 즉 메시아가 오실 것임을 예언한다. 그런데 메시아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옷을 포도주와 포도즙에 빨 것이라 한다. 즉 메시아는 포도의 피에 자신의 옷을 빨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하여 다른 복음서에서는 새끼 나귀가 전부 매여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포도나무에 매여 있는 나귀는, 다른 말로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시는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의 모습은 자신의 피로 자신의 옷을 붉게 물들이는, 십자가를 지는 모습을 미리 계시하신 것이다. 우리 주님이 죄와 허물로 주홍같이 물든 저주의 옷을 몽땅 입으시고 십자가에서 모든 저주와 심판을 다 받아내어 죽으심으로 우리에게는 자신의 피로 깨끗해진 새하얀 세마포 옷을 입혀주심을 계시록에서 계시하고 있다(계19:11-16). 즉 예수님은 자신의 인생을 상징하는 어린 나귀를 타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자신의 피를 몽땅 흘려주심으로 그의 보배로운 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도말하여 주셨음을 계시하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점도 흠도 없는 의로운 생명으로 우리를 신부로 잉태시켜 하나로 연합을 이루어 주셨다. 때문에 그분 안에서 구원받은 성도는 그분을 따라 나귀 새끼를 타는 겸손과 순종으로 한없이 자신을 부인하고 자아가 죽는 십자가 삶을 지향하게 되며 살아가게 된다.

그러므로 주님은 자기의 백성을 구원함에 있어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병거와 말과 활을 끊어 버리신다. 즉 지금까지 힘과 존재 가치로 쌓고 붙들고 있었던 이 세상의 것들을 끊어 버리신다는 말씀이다. 그것이 끊어져 나갈 때마다 당연히 고통이 따르게 된다. 주님은 네 손과 발과 눈이 범죄하면 잘려버리고 뽑아버려 차라리 장애인으로 사는 것이 유익하다고 말씀하신다. 즉 너 자신과 이 세상의 것들을 다 버리고 주님만을 좇으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구원과 생명의 길을 제시하여 주셔도 이 세상의 것을 버리지 못하여 스스로 멸망을 자초한 부자 청년의 이야기에서 이 세상에 대한 집착이 자신의 생명보다 더 중독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내 ‘자아’가 죄와 멸망으로 끌고 간다. 이 세상의 것들을 의지하여 백마를 타는 왕자의 결국이 바로 멸망과 지옥이라는 것이다.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길은 이 세상의 것을 의지하는 것들을 몽땅 끊어 버리고 겸손의 자리로 내려가는 나귀를 타고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십자가를 지는 것임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 주님이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하신 일이 바로 세상 권세자에게 잡히시고 세상 권세의 힘과 맞서 싸운 것이 아니라 묵묵히 아무 능력도 기적도 행하지 아니하시고 자신을 몽땅 세상 권세에게 내어주어 채찍에 피가 나도록 맞고 춤 뱉음으로 멸시당하고 벌거벗은 모습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시는 철저한 희생이었다.

만왕의 왕이시며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피조물 인간에게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고 그들이 행하는 악행에 아무 말도 대항도 없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으로 모든 고난과 핍박을 다 감당하신 것이다. 그렇게 무력하게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지만 그가 흘린 피가 구원의 피로 우리를 모든 죄에서 구원할 수가 있었으며 죽음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권능과 능력으로 부활하셔서 승리하셨다. 주님은 이때를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3-24)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한 알의 밀알로 죽으심이 인자가 영광을 받는 길이며, 이것만이 당신의 백성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영생을 입혀주는 길임을 제시하여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고 말씀하셨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모든 언약을 이루시기 위함이며, 그분 안에 있는 우리도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옛사람 죄인이 죽고, 그가 부활하실 때 그의 모든 백성 또한 그와 함께 부활에 참여하게 됨을 계시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세상에서 백마를 탄 거인으로 왕자로 우뚝 서는 자의 삶을 추구하는 자가 아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선이시며 의이시며 사랑이시기에 그분의 나라에 합당한 백성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존재하는 연약한 양과 어린 나귀의 삶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비천하고 가난하고 애통하는 약자로 자신을 부인하고 내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자기 죽음의 십자가 삶을 살아가게 된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굶주리고 목마른 양으로 목자 없이는 살 수 없는 양으로 무력한 약자로 세상 사람들에게는 미련한 자로 천대받는 자의 삶으로 비친다. 그 삶이 바로 이 세상의 것 하나도 가지지 못하고 세상에 버림을 받아 거지로 살아가는 나사로와 같은 삶임을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그림처럼 그러주신 것이다.

그렇게 옛사람이 비워지고 부인이 되어야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잉태되는 함몰로 진정한 하나로 하늘나라에서 영원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성도는 이 악한 세상에서 악한 자들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약자로 서는 자기 죽음의 훈련을 통과하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 앞에서의 강한 자, 거인, 네피림, 용사, 유명한 자(창 6:4)들을 심판하시는 사건들을 통하여 육신의 삶을 버리고 보이지 않는 하지만 실상인 영원한 하늘나라를 사모하는 영의 사람으로 전환하게 하신다. 그러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가 오늘 본문에서 먼저 예수님의 어린 나귀의 입성으로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도살장으로 끌러 가는 어린 양으로 무력하게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희생제물이 되어 당신의 백성을 이 세상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생명을 입혀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심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님은 하늘나라 왕이시며 구주이시다

예수님은 성경의 예언대로 어린 나귀를 타시고 십자가에 죽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다.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12:15). 예수님은 하늘나라 왕의 보좌에서 이 천하고 죄악된 세상에 인간의 육신을 입고 내려오신 참 왕이시며 구주이시다. 예수님은 아버지에게 향한 철저한 순종으로 어린 나귀의 모습으로 겸손과 순종의 삶,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십자가 삶을 먼저 살아내심으로 성도의 삶이 바로 예수님이 살아내신 어린 나귀와 같은 겸손과 순종의 삶임을 보여주셨다.

많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로마를 제압하고 다윗 왕국을 회복하는 이 세상 왕으로 생각하고 환영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리의 기대와 달리 고난의 메시아로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하나님과 화평케 하시기 위해 오신 구원의 왕이시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 45). 즉 하나님의 백성이 범한 죄를 씻는 속죄에 관한 피의 언약을 따라 자기 백성을 저회들의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려 오신 하늘나라의 왕시며(마 1:21), 새 창조를 일으키시는 생명을 주관하시는 왕으로 당신의 백성에게 영생하는 생명을 입혀주시기 위해 오신 영생이시며 진리이시다.

예수님의 겸손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심으로 겸손의 왕으로 오셨음을 계시한다. 세상의 왕들은 자신의 위엄과 영광을 과시하기 위하여 백마를 타며 나팔을 불며 호위하는 군사들로 위풍당당하게 입성하지만, 우리 주님은 어린 나귀를 타고 발이 땅에 닫는 초라하고 무력한 모습으로, 겸손하고 연약한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것도 겸손인데 이제 나귀를 타고 가심으로 다시 한번 참 왕으로서의 겸손과 순종의 모습을 보이셨다. 나귀는 겸손과 평화를 상징한다. 따라서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셨다는 것은 권위적으로 군림하며 힘과 무장으로 강제적 억압으로 다스리는 세상의 왕들과 달리, 사랑과 화평으로 자신이 희생제물이 되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즉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는 목숨을 버리는 희생으로 당신의 백성을 이 세상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는 참 평화와 겸손으로 오신 하늘의 왕이심을 나타내셨다. 예수님의 그토록 자신을 낮추시는 ‘인자’의 모습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어린 나귀는 겸손과 순종과 고난을 당하시는 자신을 철저히 비우시는 어린양 예수의 모습을 상징한다. “그는 곤욕을 당하며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53:7).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기까지 자신을 비우시고 낮추셨다. 즉 예수님을 태운 나귀 새끼는 마치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예수님은 자신을 태우고 힘들어하던 나귀 새끼처럼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길을 걸으셨다. 500년 전에 선지자 스가랴가 한 예언대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에게 향한 순종과 우리에게 향한 구원을 베푸는 겸손으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것이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어린 나귀니라”(슥 9:9). 즉 예수님은 왕적 메시아로서 만물을 다스리는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시지만 겸손한 왕으로 순종의 왕으로 어린 나귀를 타시고 어린 나귀가 되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목을 이루신 평화의 왕으로 오셨음을 계시한다.

예수님의 순종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소문이 온 성내에 퍼지고 예수를 좇아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무리는 로마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원했고 예수님에게서 그런 희망을 기대하여 ‘호산나 우리를 구원해 주소서’라고 외치면서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환호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로마제국을 대표하는 본디어 빌라도에게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것이다. 그리고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은 본격적으로 예수님을 잡아 죽일 구체적인 계획을 세움으로 주님은 유월절의 어린 양으로 돌아가시는 하나님의 뜻이 정확하게 성취된다. 예수님은 스스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기꺼이 자신을 종교 지도자들의 손에 잡히게 하셨으며, 로마 제국에 넘겨짐으로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는 길을 택하셨다. 그리하여 ‘호산나 우리를 구원하소서’를 외치며 예수님을 좇던 무리들은 실망을 가지게 되었고, 이내 “예수를 못 박으라"라고 외치는 성난 군중으로 돌변하게 되었으며, 유대인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를 살해한 살인자가 되었고, 우리에게는 구원의 길이 열린 것이다.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계획대로 섭리하신 선한 뜻이기에 주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을 영광의 때라고 말씀하신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12:-23-24).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 죽음으로 많은 생명을 살리시게 될 것임을 제자들에게 제시하셨다. 세상의 정복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켜 자신이 영광을 얻으나 예수님은 도리어 자기 백성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당신의 백성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시는 아버지의 영광을 나타내신 것이다. 예수님 한 분이 죽으심으로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이와 같이 우리 주님은 아무런 능력도 기적도 행하지 아니하시고 자신 전부를 이 세상에 내어 주심으로 묵묵하게 도살당하는 양이 되어 죄인들의 채찍과 멸시와 춤 뱉음과 온갖 수모를 다 당하시고 벌거벗은 모습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죄인들의 창에 찔려 피 흘리시면서 돌아가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가 받으시는 또한 원하시는 독생자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이었으며 희생제물이셨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아버지의 뜻대로 생명의 권능과 능력으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여 만왕의 왕으로 온 세상의 심판주로 통치자로 우뚝 일어서서 하나님 아버지의 오른편 보좌에 앉으셔서 이 세상을 통치하시고 심판하시고 계신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님의 이름 앞에 꿇게 하셨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시고”(빌2:8-11).

제자들의 깨달음

16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눅18:34, 요 7:39, 행 9:5, 요 14:26).

제자들은 예수님과 예루살렘 입성에 동행하면서 이 사건의 시종을 목격한 증인들이지만, 예수님이 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을 들어가시는지, 그리고 왜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깔면서 호산나를 외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뒤에 그 모든 것이 구약 성경 말씀이 성취된 것임을 깨닫게 된다.

제자들은 삼년동안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면서 바로 곁에서 예수님의 모든 사역을 지켜본 증인들이지만, 예수님은 단순한 선지자나 선생이나 기적을 행하는 사람으로만 알고 있었다. 영적으로 우둔한 제자들은 예수님이 이제 희생제물이 되어 자기 백성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죽으려 가심을 깨닫지 못하였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실 때 제자들은 예수님의 그 애통한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여 잠이 들었던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로마군에게 잡혀가자 이내 예수님을 모른다고 예수님의 제자임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였고,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두려워서 도망가고 말았다. 제자들은 무지하여 예수님이 하시는 일과 그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 애통하시는 마음을 알지 못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길을 가지 못하게 만류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예수님은 당신을 향한 구약의 예언을 하나하나 이루어 내시기 위해 외로이 십자가의 길을 홀로 가신 것이며 홀로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심으로 영광을 얻으셨다. 그리고 제자들은 더디어 오순절 날 성령 강림이 이루어졌을 때 비로소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승천하시며 성령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신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깨닫게 된 것이다. 제자들은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라"라는 말씀 그대로 아름다운 복음의 발이 되어 복음의 선구자로 자신들의 생명을 내놓는 순교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