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2:1-8
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 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 하더라 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 이러라 7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 26: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 여인 마리아에 대하여 4복음서가 모두 기록할 만큼 중대한 사건이지만 기록들이 조금씩 서로 다르기에 두 번 일어난 사건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향유를 붓은 여인이 베다니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두 여인으로 추측하기도 하고, 시간, 장소. 향유를 부은 위치가 서로 다르게 묘사되어 여러가지 해석들이 있어서 헛갈리는것 같지만,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한 가지 사건을 각자 다른 측면에서 좀 다르게 기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장례를 위한 향유 도유는 한번 일어난 사건이며 두 번 일어났다고 말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예수님이 어떻게 두 번씩이나 장례를 치를 수가 있겠는가. 마리아의 향유 도유는 하나님의 계획 하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섭리이기에 한번 일어난 사건이며, 다만 다른 각도에서 강조하고 싶은 부분을 다르게 표현하였을 뿐임을 염두에 두고 4복음서 저자들이 우리에게 전하고 싶어하는 영적 말씀에 초점을 두는 것이 더 중요할 것이다.
향유를 부은 여인?
향유를 예수님에게 부은 여인은 정확하게 나사로의 동생 베다니의 마리아라고 신분을 밝히고 있으며, 다른 복음서에서는 모두 “한 여자”라고만 말할 뿐, 막달라 마리아 혹은 창녀라는 말은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황당한 오해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 들린 것을 예수님이 낫게 해주신 여인(눅8:2)이며, 나사로의 동생 베다니의 마리아와는 완전히 다른 여인이다.
요 12: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11:2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마 26:7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막 14:3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여자가매우값진향유곧순전한나드한옥합을가지고와서
눅 7:37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와서
시기: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모두 유월절 이틀 전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요한복음에는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님이 베다니에 도착하였다고 기록하고 언제 잔치에 참여하셨는지는 밝히지 않고 있다. 향유사건 이후에(이튿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것으로 보아 유월절 이틀 전임을 알 수 있다.
장소: 마태복음과 마가복음과 누가복음 모두가 베다니에 사는 시몬의 집이라고 기록하고, 요한복음에서도 ‘베다니’라고만 기록되어 있지 나사로의 집이라는 기록은 없다. 때문에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잔치가 열린 것이며 나사로의 집이 아니라는 것이 확실하다.
부은 위치: 요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사실을 부각시키고 있고 머리에도 기름을 부은 사실이 생략되어 있다. 반면에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것이 부각되고 발에 부은 것을 생략하고 있다. 요한복음과 누가복음은 향유를 발에 부어 머리로 발을 씻는 마리아의 겸손과 헌신과 사랑과 순종을 강조함과 동시에 예수님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인자’이시며 하나님이심을 부각시키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반면에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예수님이 메시아이시며 왕이시며 대 제사장이심을 강조하기 위해 머리에 기름을 부어드림을 강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4복음서의 저자들이 한 가지 사건을 서로 보는 관점과 강조하려고 하는 핵심으로 인하여 기록상 차이점이 생길 수 있음을 염두에 두고 그 사건을 통하여 우리에게 계시되는 복음이 무엇인가에 초점을 두는 것이 더 중요할 것이다.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복음만을 계시하고 있다
예수님은 유월절을 맞이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12:1) 베다니에 다시 들리셨다. 이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마지막 여정이었다. 그리고 베다니에 사는 시몬의 집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벌어지고, 나사로의 동생 마리아가 비싼 향유 옥합을 가지고 예수님에게 나아와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로 그 발을 씻겨 드린 것이다. 이것이 유명한 ‘향유 옥합’의 이야기다.
마리아의 향유 도유 사건은, 값비싼 향유 옥합을 깨뜨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쏟아 붓는 마라아의 헌신을 본받아서 우리도 우리의 가장 귀한 것을 몽땅 하나님께 또는 교회에 갔다 받치면 하나님께서 복을 채워주신다는 선동의 소재가 아니다. 이 이야기는 마리아의 향유 도유가 어떻게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되는가를 설명하는 복음에 관한 그림이다. 그리하여 이야기의 시작이 예수님이 유월절을 맞이하여 다시 베다니로 돌아 오셨는데 그 베다니가 바로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고 밝히고 있음으로 이제부터 일어나게 되는 일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연관이 있음을 힌트하고 있다. 때문에 마리아의 향유 도유를 예수님은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하는 일이라고 친히 말씀하신다. 지금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나사로가 있는 베다니에서 죄인을 상징하는 바리새인이었던 문둥이 시몬의 집 (마26:6; 막14:3; 눅7:36)에서 잔치가 벌어지고, 마리아가 향유 옥합을 들고 예수님에게로 나온 것이다. 마리아는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신’ 것이며,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계시하는 복음이며, 또한 하나님의 섭리로 일어난 사건이기에 예수님은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마 26:13)라고 향유 도유를 복음의 계시로 말씀하신 것이다.
2절에 보면, 죄와 허물로 죽었던 나사로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나서 예수님과 함께 앉아 있다고 기술함으로 장차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로 당신의 백성들이 예수님 안에서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그리스도의 영으로 부활하여 예수님과 함께 영광의 보좌에 앉게 됨을 나타내는 하늘나라 혼인잔치를 그리는 그림과 같은 장면이다. 즉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들이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부활하여 함께 하나님 나라 보좌에 앉게 되는 그 구원의 이야기가 그려져 있다. 바로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과 같은 내용이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5~6). 사도 요한은 매 구절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제시하고 있다. 죽은 나사로가 살아난 사건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살아나심의 부활을 계시하시기 위하여 일어난 하나님의 뜻이기에 이어서 유월절을 맞이하여 하늘나라 혼인잔치를 상징하는 기쁜 잔치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앞두고 진행된 것이며, 그 잔치에서 나사로의 동생 마리아가 향유를 가지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의 장사를 위해 머리와 발에 부어드리는 복음을 계시하는 이야기가 등장한 것이다
성경에서 향유 또는 기름 부음은, 구약시대에서 제사장과 선지자, 그리고 왕에게 기름 붓는 의식을 통해 특별한 권위를 부여했다. 특히 장례식 때 시신 위에 부어서 장사를 지내는 것은 필수였다(요19:40). 이와 같이 구약시대부터 기름부음은 특별한 행위로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위임과 구별과 정결을 상징하는 독특한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 마리아가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와 발에 부은 것은,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시며 메시아이시며 대제사장이심을 증명하는 거룩한 의식이었으며, 예수님이 이제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짐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천하에 나타내시는 십자가 죽으심의 장사를 위한 거룩한 기름 부음이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향유 도유가 예수님 자신의 장사를 준비하는 하나님의 섭리이기에 복음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마 26:13).
왜 복음인가?
요 12:7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마 26:12-13 (막 14:8-9)
12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 이니라 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왜 복음을 전파할 때마다 마리아의 향유 도유 이야기도 함께 전해진다고 말씀하셨으며, 왜 이 이야기를 복음으로 제시하셨는가? 하지만 우리가 복음을 전해듣거나 전할 때 마리아의 향유 도유 사건도 함께 전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마리아의 향유 도유도 함께 전해진다’고 말씀하신데는 깊은 복음의 영적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마리아의 향유 도유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 구원과 하나님의 나라를 계시하고 있다는 말씀이며, 마리아의 헌신이 초점이 아니라 그가 계시하는 십자가 복음이 핵심이라는 말씀이다. 놀랍게도 이사야에서 이미 예수님의 기름부음이 어떻게 우리에게 복음이 되는가를 상세하게 알려주고 있다.
사 61:1-3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이사야의 예언대로, 지금 잔치 집에서 마리아에 의해 예수님께 부어지는 향유는 예수님이 유월절 희생양으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의가 성취됨으로, 죄와 허물로 상한 자가 고침을 받고, 죄의 사슬에 얽매여 포로된 자가 자유를 얻게 되며, 죽음에 갇힌 자가 구원받아 다시 살아나게 되는 은혜의 복음이 온 천하에 전파됨을 계시하고 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메시아이시며 그리스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심과 왕이심을 증명하여 선포하는 ‘희락의 기름’이 기쁜 잔치 날에 마리아의 향유 도유를 통하여 나타난 것이다. 예수님의 장사를 위한 죽은 시체에 부어지는 그 향유가 예수님이 살아계시는 동안 먼저 부어짐으로 우리 주님이 죽음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부활체로 우리 안에 성령으로 뚫고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영생의 ‘희락’을 누리게 되는 천국혼인으로 이어질 것임을 계시하여 온 집안에 향유의 향기가 가득하더라고 표현하고 있다(12:3). 이와 같이 유월절을 맞이하여 굳이 죄인을 상징하는 바리새인 문둥이 시몬 집에서 기쁜 잔치가 열리고, 예수님의 장사를 위한 향유 도유가 등장함으로 이 모든 일이 십자가 구원과 생명이 임하는 은혜와 희락의 향유가 되는 복음을 제시하고 있다.
마리아의 향유 도유가 계시하는 우리에게 쏟아지는 예수님의 기름 부음
향유 옥합은 당시 처녀들이 결혼을 위하여 준비한 시집 밑천과 같은 가장 소중한 것이었다. 그렇게 소중한 향유를 마리아는 300데나리온이나 되도록 준비한 것이다. 당시 하루 품삯이 1 데나리온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1년치 연봉에 해당하는 가치였다. 그 귀한 향유, 여인으로서 신랑을 맞이하기 위하여 준비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몽땅 붓고 자신의 머리로 예수님의 발을 씻겨드린 것이다. 마리아의 도유는 가치를 따지는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가룟유다와 제자들의 말대로 낭비이며 어이없는 일로 보인다. 하지만 예수님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계시하는 예수님의 장사를 준비하는 거룩한 낭비이다. 이는 예수님이 이제 사랑하는 마리아와 제자들과 그리고 당신의 백성을 이 세상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살려내시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아낌없이 몽땅 쏟아 부어주시는 구원의 복음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행하여지는 또한 반드시 몽땅 부어져야 하는 거룩한 도유이다. 즉 마리아의 거룩한 도유 낭비가 바로 예수님의 거룩한 죽으심의 ‘낭비’를 보여주는 그림이다.
마리아는 자신의 전부를 가지고 예수님에게 나아와 예수님을 참 신랑으로 맞이하는 진실한 마음을 향유의 도유로 표현하였지만, 실상은 예수님이 우리를 정결한 신부로 삼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우리에게 쏟아 부어 주실 십자가 죽으심을 제시한 것이다. 이제 십자가에 달리셔서 마지막 끝까지 자신의 피를 몽땅 흘리시고 “다 이루었다”라고 선언하심으로 자신을 아낌없이 드리는 예수님의 기름부음이 우리에게 쏟아 부어짐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부로 탄생되는 성령 부으심을 상징한다. 즉 자신의 의의 생명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자신에게 속한 영원한 신부로 잉태하여 주시는 성령의 기름 부음이다. 그래서 마리아의 향유 도유를 복음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주인공은 예수님이시며 핵심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다. 즉 마리아의 향유 도유 이야기를 등장시킨 것은, 그 향유의 도유가 제시하는 뜻이 바로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이며, 이제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심으로 우리를 신부로 삼아주실 것임을 계시하여 유월절 절기에 죄인을 상징하는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향유 도유가 진행된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바로 직전에, 최후의 만찬에서 ‘나의 피를 마시고 나의 살을 먹으라’고 말씀하시고, 우리를 신부로 삼아주시기 위해 친히 신랑이 되셔서 무릅 굽고 신부의 발을 씻겨주셨다. 하나님이시며 영광의 주이신 그분이 자신을 몽땅 비우시고 가장 비천한 자세로 가장 더러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것이다(요 13:1-11). 그리고 우리의 모든 죄를 뒤집어쓰시고 죄인의 비참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자신의 피를 몽땅 흘리셨다.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요 19:34). 그 물이 나의 죄를 씻기셨고, 그 피가 나의 죄를 대속하여 주셨다. 그분의 손과 발, 이마와 옆구리는 당신께서 살려주시려는 죄인들의 못과 채찍에 찔려서 피가 흐르는 고통을 당하셔야만 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주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에 기꺼이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고 오셨으며, 우리를 위해 십자가 고난을 당하셨으며, 자신의 전부를 우리에게 쏟아 부어 주시는 죽음으로 우리를 사랑하셨으며, 사랑하는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기 위해 자신의 권능으로 다시 부활하셔서 성령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점도 흠도 없는 의로운 생명으로 새 신부로 잉태하여 주셨다. 향유 도유가 바로 이 복음의 진리를 계시하기에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마 26:13)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우리가 당해야 할 그 죄의 고통과 수치를 그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담당하여 주셨다(사 53:1-12). 십자가를 져야 할 주님의 그 고통을 시편에서는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시 22:14) 라고 처절하게 묘사하고 있다. 십자가의 사랑은 바로 우리 주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몸으로 온갖 고통과 수치와 수모를 모두 당하시고,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가장 쓰디쓴 대가를 지불하신 희생이다.
요한은 예수님이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요 13:1)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 사랑의 절정은 우리의 죄를 자신에게 전가시켜 우리를 대신하여 모든 죄의 고통과 죽음을 당하시고, 우리에게는 영원히 사는 생명을 쏟아 부어주시는 은혜이다. 즉 그분이 십자가상에서 우리를 위해 피와 물을 몽땅 쏟아내심으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요 6:56)함과 같이 우리를 신부로 맞이하여 영원히 하나가 되게 하셨다. 이것이 주님이 당신 신부를 위해 자신의 피를 몽땅 흘리신 사랑의 결합이다. 그리하여 장사에 쓰이는 또한 결혼식 신랑에게 뿌려드리는 향유 옥합을 든 마리아가 잔치에 등장한 것이다. 주님의 거룩하신 피 흘림과 기름부음으로 우리를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것을 화목하게 하여 아들이라 신부라 칭하여 주시는 그 은혜로운 복음을 계시하고 있다(롬5:10). 이와 같이 마리아가 자신을 상징하는 향유 옥합을 깨뜨리고 아낌없이 주님에게 부어 드리는 믿음의 행위로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이야기를 설명하고 있다.
마리아의 향유 도유가 계시하는 성도의 헌신적 복음
마리아는 300데나리온이나 (현재 환산으로 2-3만불) 되는 노동자 일년치 품삯에 해당되는 향유를 예수님께 아낌없이 몽땅 부었다. 굳이 여기서 향유의 값을 거론한 것은 마리아가 가지고 있는 전부를 예수님에게 바쳤음을 계시하며, 이 한때를 위해 오랫동안 준비하여 온 예수님에게 향한 마리아의 진실된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첫째, “예수의 뒤로 그 발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눅7:38)
예수님에게 향한 마리아의 마음을 누가복음에서는 좀 더 세심하게 표현하고 있다. 마리아는 향유를 붓기 전에 ‘예수님 뒤로 발곁에 서서 울고 있었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마리아는 자신의 그 모습 그대로 감히 얼굴도 들지 못하고 비천한 죄인임을 인정하는 심령으로 내려가 예수님 뒤로 물러서서 애통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마리아는 자신의 오빠 나사로를 죽음에서 다시 살려주신 그 생명의 은인되시는 예수님에게 너무나도 감사하는 감격으로 예수님 뒤에 서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을 것이며, 자신과 같은 죄인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이제 십자가를 지셔야하는 예수님의 죽음에 동참하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눈물을 흘렸을 것이며, 죄인에게 향한 구원과 사랑의 마음을 마리아는 영으로 헤아리고 있었기에 그 은혜를 갚을 길이 없는 한없이 감사한 마음과 오직 예수님만이 자신의 전부임을 고백하는 그 진실된 마음으로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둘째,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12:3)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눅7:38)
마리아는 자신의 인생 전부를 상징하는 향유를 소중히 가지고 나와서 아낌없이 주님의 발에 몽땅 부어드렸다. 그리고 굽혀 엎드려 자신의 머리로 예수님의 발을 닦으면서 그 발에 입 맞추는 겸손과 사랑으로 예수님에게 향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마리아의 겸손한 자세는 자신이 바로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는 비천한 죄인임을 인정하는 가난한 심령과, 예수님의 자비와 긍휼과 죄 사함을 구하는 애통에서 터져 나온 마음이었기에 눈물을 흘리며 그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않은 것이다. 발은 몸 전체에서 가장 불결한 부분이다. 그런데 마리아는 그 불결하고 천대받는 예수님의 발에 가장 소중한 입을 맞춘 것이다. 자신이 바로 불결하고 천대받는 죄인임을 마리아는 알고 있었기에 가난한 심령으로 내려가 애통하는 눈물로 예수님의 발에 입맞춤함으로, 여인의 불결함이 예수님에게 전가됨으로 깨끗함을 얻게 되는 구원의 복음을 누가복음에서 강조하고 있다.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눅 7: 48-50).
마리아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발은, 불결함을 정결케하는 가장 청결한 발이며, 죄인이 있는 곳에 구원의 발길이 닫는 향기를 가져다주는 은혜의 발이며, 죽은 자를 살려내시는 생명의 발로 영접하는 믿음으로 가장 거룩한 입맞춤을 한 것이며 가장 소중한 향유를 발에 부은 것이다. 이사야는 예수그리스도의 탄생과 구원의 복음을 아름다운 복음의 발로 선포하고 있다.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사 52:7). 즉 좋은 소식을 가져오는 발이며, 평화를 공포하는 발이며, 복된 소식을 가져오는 발이며, 구원을 공포하는 발이며,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복음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이라고 선포하고 있다. 본문에서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되는 기쁜 소식이지만, 궁극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가장 기쁜 소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구원을 공포하는 십자가 복음이다.
셋째,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막 14:3)
마가복음에서 특별히 마리아가 옥합을 가지고 나와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자신의 전부를 상징하는 옥합을 깨뜨렸다는 것은 바로 마리아의 육체가 깨진 것을 의미하며, 더 나아가 예수님의 육체가 십자가에서 깨지는 그 십자가 죽음에 마리아 자신도 동참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복음이다. 바울이 지적한 봐와 같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십자가의 사건은 예수님이 혼자 죽으시고 혼자 부활하신 사건이 아니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갈 2:20) 사실이며,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롬 6:6)사실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즉 나의 모든 죄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영원히 없어지고 옛 죄인은 완전히 죽었다는 사실이며, 동시에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 2: 12),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산”자 (벧전 2:24)가 된 사실이다. 즉 옛사람 죄인은 예수와 함께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기 때문에 죽은 사람이 죄를 짓을 수 없으며, 또한 그리스도의 영으로 새로운 하늘나라의 의인으로 태어난 자를 다시 율법으로 죄인이라 정죄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 주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몽땅 우리에게 쏟아주는 구원과 생명의 십자가를 지셨지만, 우리가 지는 십자가는 내 옛 사람 죄인이 완전히 죽어서 죄가 완전히 도말되는 자기 죽음의 십자가이며, 다시 새 생명으로 영원한 신부로 태어나기 위한 새 생명의 부활을 위한 죽음이다. 이것이 바로 육체의 죽음을 상징하는 옥합이 깨지는 진정한 의미이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성도의 죽음에 대하여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춰졌음이라”(골3:3), 즉 성도의 죽음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으로 새롭게 태어나기 위한 귀중한 죽음이기에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춰졌다’고 말씀한 것이다. 우리가 창세전 예수 생명 안에 하나로 있었기에 그분의 죽음에 우리도 함께 연합되는 동참을 제시한다. 감추어져 있다는 것은 겉으로는 보이지 않게 무엇인가에 담겨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마리아가 옥합을 들고 나왔지만 그 옥합 안에 있는 향유가 예수님에게 몽땅 부어지기 위해서는 옥함을 깨뜨려야한다. 그리하여 굳이 옥합을 깨드려서 향유를 예수님에게 부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옥합의 깨짐은, 첫째는 예수님의 육체가 깨지는 십자가 죽음을 뜻하며, 예수님의 육신이 깨짐으로 십자가 구원과 생명의 향기가 온 세상에 전파되는 복음을 계시한다. 그래서 향유의 향기가 잔치 집에 가득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다(12:3). 둘째는 마리아 육신이 깨지는, 즉 성도의 십자가 죽음을 계시하고 있다. 마리아 자신을 상징하는 향유 옥합이 깨짐으로 바로 옛 죄인의 육체가 완전히 깨지는, 자신을 몽땅 예수님에게 부어 드림으로 예수님을 진정한 신랑으로 영접하는 마리아의 헌신을 말한다. 온 정성과 마음을 다하여 오직 주 예수그리스도 한분에게 혼인하는 믿음을 의미한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우리도 동참하여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함을 계시하고 있다. 마리아의 향유 옥합은 바로 이 한 때에 깨지는 허비를 위해 준비하여온 것이다. 예수님 앞에 자신이 완전히 깨지는 옛 사람의 죽음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동참하게 됨으로 함께 부활하여 생명의 충만함을 얻게 됨을 계시한 것이다. 그렇게 마리아 육체가 깨지고 자신의 마음을 몽땅 예수님에게 쏟아 붓자, 이내 마리아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는 성령의 충만함과 생명의 충만함을 얻게 되어 향유의 향기가 온 집안에 가득하더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마리아 향유 도유가 복음이다.
넷째,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12:3)
마리아는 자기의 몸 중에 가장 영광스러운 머리를 이용하여(고전11:15) 가장 더러움을 상징하는 발을 닦은 것이다. 유대인들은 머리를 소중히 여겨 남자들은 머리에 “키파”라는 빵 모자같은 것을 쓰고 다니고 여자는 머리에 스카프를 쓴다. 내 머리위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의미이다. 탈무드에 보면 여자들은 오직 자기 남편 앞에서만 머리를 풀어야 하고 다른 남자 앞에서 풀면 이혼사유가 될 정도였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소중한 머리를 풀고 그 머리로 예수님의 발을 닦은 것이다. 예수님에게 향한 최고의 헌신과 사랑이었다. 오직 예수님만을 신랑으로 삼고 평생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예수님만을 의지하며 자신의 마음 전체를 드리겠다는 스스로의 다짐과 마음을 드리는 헌신이었다. 마리아는 주위 사람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고 오직 예수님에게만 초점을 두고 자신의 마음 전체를 드린 것이다. 마리아의 헌신은 우리 성도가 지녀야 할 신앙의 자세이며 복음의 삶이다. 사실 유대인 여인에게 있어서 향유는 시집을 가는 여인의 필수 품목이며 신랑의 머리에 향유를 떨어뜨리고 “나의 신랑은 오직 당신뿐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의식이 있었다. 마리아의 향유 도유와 머리를 풀고 그 발에 입맞춤하고 발을 닦은 것은 “예수님은 나의 영원한 신랑입니다”라고 내 인생 전부를 드리는 사랑의 고백이며, 모든 찬양과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라는 고백이며, 예수님이 나의 죄로 인하여 십자가에 대속의 제물로 죽으셔야 하는 장사를 위한 가장 고귀하고도 아름다운 거룩한 행위였다.
이와 같이 마리아는 예수님에게 향한 진실된 존경과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가장 값진 향유 옥합을 깨뜨렸고, 거룩하신 예수님의 발에 부었으며, 사랑과 절대적 순종의 표시로 그 발 앞에 꿇어 앉아 자신의 머리를 풀고 그 머리로 발을 닦아드린 것이다. 마리아는 물이 아닌 자신의 눈물로 발을 적시고 수건이 아닌 자신의 머리로 가장 불결한 발을 아름다운 구원과 생명의 발로 입맞춤 하였으며, 이는 오직 ‘당신만이 나의 신랑임’을 고백하는 성도의 신앙 자세와 복음을 계시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이다. 그래서 이와 반대로 인식하고 판단하는 제자들의 비난과 가룟유다의 비판이 등장한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오직 마리아에게만 허락하신 영감이기에 마리아는 다른 이들이 보지 못하는 가장 소중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자신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주시는 은혜의 복음으로 보게 된 것이다. 이 복음은 오직 하나님이 그 영을 열어주셔야만 보게 됨으로 영이 닫힌 제자들과 가룟유다는 마리아의 향유 도유를 낭비라고 비난하고 분개한 것이다 (마 26:9 / 요 12:5). 왜냐하면 오직 마리아에게만 그 영을 열어주셔서 예수님의 십자가 장사를 위해 준비시키시고 유월절을 맞이하여 행하도록 하나님께서 섭리하셨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의 남편을 죽이는 살인죄까지 범한 파림칙한 죄인이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영을 열어주시자 다윗은 재를 뒤집어쓰는 통곡의 회개 대신, 자신의 죄가 영원히 도말되어 죄에서 영원히 벗어나는 십자가의 구원을 구한 것이다. 다윗은 자신이 모태 중에서 죄인으로 잉태되어 나왔기에 죄인으로 태어나 죄를 짓을 수밖에 없는 불가능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그 죄의 뿌리를 완전히 제거하는 영원한 죄 사함을 구한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이 열어주시는 영감으로 본질적 죄를 없애주시는 어린 양의 십자가 구원을 보았고,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시 51:7)라고 십자가에서 흘리시는 피로 나를 정결케 해달라는 십자가 복음을 외친 것이다.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라고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못을 박으신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을 영으로 깨닫고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시 51:7-8)라고 복음을 찬양한 것이다. 이 엄청난 복음을 깨달은 다윗은, 하나님은 매번 드리는 짐승의 제사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은 ‘상한 심령과 통회하는 마음’을 원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아니하시리이다”(시 51:16~17).
마찬가지로 마리아는 하나님이 열어주시는 영감으로 자신과 같은 죄인을 죄에게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함을 알고 있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시는 보배로운 피로 모든 죄가 영원히 도말되는 그 십자가 죽으심에 자신도 동참하게 됨을 알고 있었기에 예수님의 장사를 위해 일년 노동자의 임금에 해당되는 귀한 향유를 준비한 것이며, 유월절 예수님이 곧 잡혀가기 직전에 향유 옥합을 들고 예수님에게로 나왔으며, 옥합을 깨뜨리고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면서 그 구원의 아름다운 발에 입맞춤을 한 것이며, 자신의 가장 소중한 머리로 예수님의 발을 닦음으로 예수님을 신랑으로 맞이하는 신부의 역할을 우리 성도를 대표하여 담대한 믿음으로 진행한 것이다.
마리아는 평상시에 항상 예수님의 발아래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청종함으로 예수님에게 초점을 맞추고 예수님의 마음과 제일 가까운 편을 택하였다고 예수님은 칭찬하여 주셨다. 주님은 한끼 식사 대접보다 그분의 말씀에 청종하며 그분을 알기를 원하신다. 마리아는 평소에 예수님의 말씀을 사모하였으며 그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예수님과 가까이 있었기에 예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며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온 마음과 사랑을 담아 그 많은 값 비싼 향유를 준비하였으며, 때가 되매 향유 옥합을 들고 예수님에게 나아와 자신에게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에게 자신의 전부를 드리고 싶은 마음으로 예수님과의 거룩한 혼인을 의미하는 향유를 아낌없이 신랑 되실 예수님에게 부어드린 것이다. 이것이 성도에게 계시되는 복음이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 이러라
마 26: 8-9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마리아가 300데나리온, 즉 한 노동자의 일년 품삯에 해당되는 향유를 몽땅 예수님의 발에 붓는 일로 제자들과 가룟 유다는 분개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마리아의 값비싼 향유 도유는 사치와 낭비였고, 그 큰 액수의 돈이 그렇게 허비되는 일에 그들은 화가 난 것이며, 그 향유를 비싼 값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이 옳다는 것은 하나의 구실이었다. 하나님께서 영적 계시를 주지 아니하면 마리아의 향유 도유가 계시하는 십자가 대속 복음을 알 수가 없는 일이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마리아의 향유 도유를 다만 마리아의 물질적 헌신으로만 해석하여 마리아를 본 받아 자신의 가장 귀중한 것을 아낌없이 하나님께 드리면, 한 방울씩 정성껏 모아서 교회에 목회자에게 갔다 받치면, 하나님의 그 헌신과 충성에 축복하여 넘치게 채원 준다고 강도와 같은 설교를 하고 있다.
마리아의 향유 도유의 이야기는 교회에서 양들에게 헌금과 교회 봉사를 강요하는 선동에 없어서는 안 되는 아주 적절한 소재의 설교로 등장하고 있다. 즉 돈을 좋아하는 삯꾼 목자들이 가난한 양들의 것을 도둑질하고 빼앗아 가는데 곧잘 애용하여 “마리아를 본 받아 자기가 가진 것을 남김없이 교회에 바치라”라는 주제로 둔갑하고 있다. 그래서 주님은 이들 거짓 목자들은 처음부터 ‘삯꾼이요 목자가 아니며 양도 제 양이 아니기에 양을 물어가고 또 헤치며’ (10:12-13),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10:10)라고 명백하게 거짓 삯꾼들의 특징을 지적하셨다. 이들은 심지어 ‘불쌍한 과부를 돌봐준다는 명목하에 과부의 가산을 정리하며 빼돌리는 도둑이다’(막 12:40)라고 이들의 가식적 강도짓을 폭로하셨다.
똑 같은 방법으로 지금 가룟유다는 ‘값 비싼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야한다’는 아주 선한 구제의 구실을 갔다 대지만, 실상은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12:6) 라고 명백하게 도둑의 본심을 폭로하고 있다. 이는 가룟 유다를 통하여 오늘날 유다와 같은 거짓 선지자 거짓 목자들의 절도와 강도의 본심을 폭로하여 구별시키는 아주 중요한 교훈이다. 이들이 어떠한 수단과 방법으로 양들의 돈을 뜯어 가는지를 예수님은 아주 명백하게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다. 예를 들면, 이들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마 23:16)라고 노골적으로 양들의 돈을 뜯어내기 위한 악랄한 규칙을 정해 놓은 것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성전과 금을 따로 분리했고 제단과 예물을 분리하여 하나님께 제사 드린다는 구실로 노골적으로 금과 예물을 강요한 것이다.
지금 현재 교회에서 똑같이 예배로, 집회로, 절기로, 건축으로, 특별헌금과 같은 여러가지 구실로 돈을 끌어모으는데에 수단과 방법을 총 동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의 말로 바꾸어 말하면, “누구든지 자신 안에 계신 예수그리스도에게 향한 믿음과 약속은 지키지 않아도 되지만 십일조와 같은 헌금에 관한 약속은 반드시 지켜서 내야 한다”는 억지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이들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는도다”(마 23:25),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27-28)라고 적나라하게 이들의 악한 외식을 폭로하신 것이다.
마찬가지로 제자들과 가룟 유다는 지금 가난한 처녀가 어렵게 모은 향유를 예수님 발에 한 번에 몽땅 부은 것이 낭비이며, “그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12:5)라는 그럴듯한 구실을 갔다 붙인 것이다. 이들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다는 구실로 예수님보다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이익에 관심을 쏟고 있었다. 즉 이들의 마음은 예수님에게 향한 것이 아니라 금전에 가 있었음이 스스로의 말로 드러낸 것이다. 이와 반대로, 마리아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금전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향한 진실된 사랑이었다. 마리아의 마음은 항상 예수님에게 향하여 있었고 말씀을 사모하는 믿음이 있었기에 자신의 마음을 담아서 정성껏 300 데나리온, 한 노동자의 일년 품삯에 해당되는 향유를 이날 한때의 허비를 위해 긴 시간동안 준비한 것이다.
믿음의 장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히 11:4)함과 같이 하나님은 아벨이 드린 그 예물에 대해 증거하신다고 말씀하고 있다. 아벨이 하나님께 드린 예물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것으로 정해진 양의 첫 새끼와 기름이었다(레 3:16 ; 27:26). 즉 아벨은 자기 소산에서 구별하여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려 드린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아는 하나님에게 향한 마음을 믿음으로 보셨다는 말씀이다. 즉 하나님은 첫 새끼와 기름을 바치는 아벨의 믿음을 보신 것이다. 그리고 본문 하반 절을 보면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라고 죽은 자가 믿음으로 우리에게 말을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아벨은 죽었으나 첫 새끼와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그 믿음이 여전히 살아서 우리에게 그 첫 새끼의 제물과 아벨의 순교가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을 말해주고 있다는 말씀이다.
마찬가지로, 마리아는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영적 계시를 받은 복된 여인으로 제자들이 알지 못하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미리 알고 있음으로 미리 장사를 위해 향유를 준비한 것이다. 마리아는 자신과 같은 죄인들을 죽은 오빠 나사로를 살려낸 것과 같이 죄와 죽음에서 살려내시기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셔야함을 알고 마지막 잔치에 예수님의 마지막을 위하여 준비한 향유 옥합을 들고 나왔으며, 애통의 눈물을 흘린 것이며, 예수님이 이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걸어가셔야 하는 그 십자가 지심의 아름다운 구원의 발에 입맞춤으로 자신의 사랑과 경배를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도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 죽음에 동참하는 진실된 마음을 담아서 자신의 가장 소중한 머리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림으로 자신의 전부를 예수님에게 의탁하여 예수님의 사랑에 함몰되는 그 마음을 주님은 믿음으로 받은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눅 7:50)라고 말씀하셨으며, 마리아의 믿음으로 행하여진 향유 도유가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마 26:13) 라고 복음으로 제시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마리아의 향유 도유는 믿음으로 행하여진 십자가 복음을 계시하는 ‘거룩한 낭비’였다. 하지만 믿음이 없는 제자들과 가룟유다에게는 돈으로 그 값어치를 계산함으로 마리아의 도유가 쓸데없는 ‘낭비’로 보였으며, 분개하여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12:5; 마 26:8-9)라는 구실로 마리아를 비난한 것이다. 이들의 마음은 오직 자신들에게 돌아올 이익만을 계산하는 금전에 가 있었던 것임이 여실히 드러난 것이다. 온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아낌없이 드리는 십자가 지시는 스승 앞에서 제자들은 온 몸과 마음을 다하여 예수님의 장사를 지내는 마리아의 거룩한 허비를 가난한 사람을 구제한다는 구실로 예수님의 트집을 잡은 것이다. 이들은 마리아의 거룩한 낭비가 곧 예수님 자신을 우리에게 몽땅 허비하는 예수님의 거룩한 낭비를 계시하고 있음을 알리가 없었던 것이다. 이들 모두가 예수님을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다만 예수님이 가지고 있는 능력과 힘을 얻어 자신들의 탐심의 배와 명예의 욕망을 채우려는데 목적이 있었음을 이들이 뱉은 말로 스스로 증명한 것이다.
특히 가룟유다는 처음부터 마귀였기에 그가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12:6) 라고 유다의 마귀 본심을 지적하고 있다. 유다는 처음부터 예수님의 참 제자가 아니었다는 것을 “도둑”이라는 말로 폭로한 것이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의 그 사악함이 유다에게 그대로 나타난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이익만을 계수하는 유다는 이제 예수님이 자신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게 되자 예수님을 흠집하며 결국 예수님을 배신하고 은 30냥에 팔아넘기는 마귀로 드러난 것이다.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이 말한 ‘돈으로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이 세상 물질적 구제를 훨씬 초월하여, 당신의 생명으로 당신에게 속한 가난한 백성들을 이 세상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영원한 생명을 주시며 영원한 천국에서 함께 영원을 살기 위해 십자가를 지셔야 하셨다. 그리하여 주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요10:11)고 말씀하신 것이다. 주님은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꺼이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고 우리를 찾아와 주셨으며, 우리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이 땅에서 허비하신 것이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목숨을 아낌없이 주시는 죽음으로 우리를 사랑하셨고, 사랑하는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기 위해 자신의 권능으로 다시 부활하셔서 점도 흠도 없는 의로운 생명으로 새 신부로 우리를 잉태케 하셨다. 그분의 거룩한 인생의 허비로 말미암아 우리의 생명과 삶이 풍성해진 것이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옥합이 깨지고 그 향기가 온 집안에 가득 채워진 것 같이 그가 지신 십자가 구원의 향기가 온 세상에 복음으로 전파된 것이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7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마리아의 향유 도유를 낭비라고 분개하는 제자들을 향하여 마리아의 향유 부음을 방해하지 말라고 권고하시면서 마리아의 도유는 예수님의 장례를 예비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신다.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12:7). 마리아는 이 한 때, 즉 예수님의 거룩한 장사를 위해 그 많은 향유를 귀하게 보관하여 왔으며, 이는 마리아를 통하여 복음을 계시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이다. 그리고 그 비싼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을 나눠주어야 한다는 제자들과 가룟유다의 말에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12:8)라고 말씀하신다. 즉 너희는 장차 나의 증인이 되어 땅 끝까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을 하게 됨으로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은 것 같이 너희도 이제 가난한 자들과 늘 함께 할 것이라는 말씀이다. 장차 제자들이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목숨을 다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십자가 복음을 전파할 것임을 계시하신 말씀이다. 비록 제자들은 돈으로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인식하고 있었지만, 주님은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장차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들고 가난한 영혼들을 하나님에게로 인도하는 십자가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게 됨으로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가난한 자를 위한 복음전파에 순교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은, 이제 예수님은 그동안 육신적으로 제자들과 3년 넘게 동고동락함으로 예수님의 품안에 있던 그들을 잠시 떠나 홀로 십자가를 져야하는 그 고독과 외로움을 표현하신 것이다. 이제 얼마 남지 않는 유월절을 맞이하여 사랑하는 제자들을 두고 홀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로마군에게 잡혀가 육신으로 당하셔야 할 그 고난과 고통을 생각하시면서 이제 ‘나는 너희와 항상 있지 아니한다’고 미리 말씀하여 주신 것이다. 주님은 이제 제자들을 떠나서, 더더욱 힘들었던 것은 항상 하나로 한 번도 떨어진 적 없는 아버지와의 영적 단절로 홀로 십자가의 고난과 고통을 감당하셔야 하셨다. 인간의 육신을 입고 육신으로 당하셔야 할 그 고민과 고통의 마음이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서 역력히 보여주고 있다.
주님은 다가오는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수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마 26:38)고 말씀하시고, 다가오는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앞두고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셨다(눅 22:44). 예수님은 아버지와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인간적으로 십자가 고난과 죽음이 너무나 고통스럽지만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를 원하셔서 그 뜻에 순종하시기 위해 생명의 진액을 다 바친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셔야하는 그 고통스러운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고, 조금이나마나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위로가 되기를 원하는 마리아의 애통하는 마음으로 행하는 향유 도유를 낭비라고 비난하며 화를 낸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은 하나님이 주시는 영의 계시 없이는 하나님을 알지도 그 주시는 말씀을 깨닫거나 하나님을 찾지도 아니하며(롬 3:11),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롬 8:8)고 사도바울은 말씀해 주고 있다.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의 계시를 통하여서만이 아버지의 진정한 뜻과 마음을 읽을 수 있으며, 그분의 사랑의 은혜를 깨닫게 되며, 예수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받아들이는 믿음을 가지게 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수시로 반복하여 하나님 아버지께서 정하신 뜻,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특히 나사로의 죽음과 살아나심의 실제사건으로 보여주고 말씀하여 주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과 3년이나 동고동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에 대하여 확신이 서지 않았으며, 예수님이 십자가 죽으심에 대한 말씀을 이해하지 못함으로 오히려 마리아의 거룩한 기름부음을 비난하고 분개한 것이다. 비록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을 이해하지 못함으로 실망하여 뿔뿔이 도망갔지만, 오순절 날, 성령의 체험을 통하여 성령의 계시와 인도로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는 증인이 되었다. 그것은 성령님이 제자들의 마음 문을 열어 주셨기에 성령의 계시로 아버지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낸 참뜻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무궁한 사랑을 깨달은 제자들은 비로소 나를 성전 삼고 좌정해 계시는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목숨을 다하는 순교로 부활의 예수 생명을 전하는 참다운 제자들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마리아의 향유 도유 사건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질과 행위, 노력과 열심으로 업적을 이루어 하나님의 일에 보탬이 되거나 도움이 되여 그 대가로 이 세상에서 형통하는 복을 기대하는 물질과 육신적 헌신에 관한 이야기가 절대 아니다. 반대로 나의 인생 전부를 하나님 앞에 내려놓는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무릎 꿇는 순종의 삶을 의미하며, 한마디로 예수님의 안에서 하나가 되어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함께하는 동참을 의미한다. 즉 우리 주님이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여 기뻐 받으시는 순종의 제물로 자신의 전부를 드린 그 영광스러운 하늘의 제사에 나 같은 부끄러운 죄인이 오직 은혜의 덮음으로 그 영광스러운 십자가 죽음에 끼어 들어감으로 그분과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게 되는 연합을 계시한다. 이것이 마리아의 헌신이며 십자가 복음이다. 이와 같이 마리아의 헌신적 믿음으로 행하여진 향유 도유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 죽음에 동참하여 자신의 옛 사람이 죽고 예수와 함께 새 사람으로 잉태되는 성령의 기름부음이 예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쏟아 부어지는 예수님이 기름부음이 되는 은혜로운 복음을 계시하고 있다. 이보다 더 은혜로운 기름부음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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