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의 깊은 영적 의미

요한복음 (요 11:17-44)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2025. 4. 19. 08:58

요 11: 17-44

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20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28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29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30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맞이했던 곳에 그대로 계시더라 31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33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34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37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마르다의 신앙고백

나사로가 죽음으로 고아와 같이 남겨진 두 여동생은 비통에 잠겨 있었고, 많은 유대인들이 부모 없이 장례를 치르는 이들을 위문하려 왔다. 그리고 속히 오리라고 기다린 예수님은 이틀이나 더 머물다가 도착하신 것이다. 나사로의 죽음은 두 자매에게 큰 충격이었으며, 예수님의 지체함에 더욱 실망을 가졌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비탄에 잠긴 마리아는 예수님의 오심에 맞이하러 나오지 않았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보자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11:21) 라는 섭섭함을 털어놓는다. 마르다는 주님이 곁에 계셨더라면 오빠가 죽는 불행한 일이 없었을 것이라는 고백으로 주님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함을 믿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11:22) 라고 말함으로 비록 내 오빠가 죽었지만 지금이라도 주님이 원하시면 무엇인 든지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마르다의 고백에 예수님은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11:23)라고 확인시켜 주신다. 그런데 마르다는 자신의 고백과 어긋나게 주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예수님은 지금 당장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겠다고 말씀하셨는데 마르다는 현재가 아니라 마지막 날 부활 때로 착각하고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줄을 내가 아나이다”(24절)라고 대답한다.

마르다는 완전히 죽은 자가 당장 살아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더 확실한 믿음을 주시기 위해 내가 바로 죽은 자를 살리는 생명임을 제시하여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26)라고 즉석에서 마르다에게 질문하신다. 그러자 마르다는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내가 믿나이다”(11:27)라고 확신에 찬 신앙을 고백한다. 베드로와 똑같은 고백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주님은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 즉 베드로의 고백은 자신의 진실한 믿음에서 나온 고백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제자들을 대표하여 그에게 귀한 고백을 하게 하심으로 제자들이 장차 교회의 기초가 됨을 알게 하기 위한 의도였음을 말씀하신다. 그 후 베드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가로막음으로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마 16:23) 라는 책망까지 듣게 되며, 충성을 다짐한 그가 예수님이 잡혀가게 되자 이내 두려움으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배신자로 자신의 연약함을 어찌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르다에게 주신 이 고백은 예수님이 그에게 나사로의 살아나심을 통하여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주 그리스도이시며 “부활과 생명”의 주체임을 알게 하는 확신한 믿음을 심어주시기 위하여 귀한 신앙고백을 하게 하신 것이다.

어떻게 보면, 마르다는 과거, 현제, 미래 부활을 포함하여 완벽한 신앙고백을 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와 함께 계셨으면 오빠에게 그런 불행이 오지 않았을 것이며, 지금이라도 주님께서 역사하시면 불가능함이 없음을 믿으며, 또한 장차 오빠가 부활할 것을 믿는다는 고백이다. 그럼에도 죽음 앞에서 이내 믿음을 포기하는 마르다의 불신이 드러난다. 그의 피상적인 믿음을 진실된 믿음으로, 자신의 고백대로 예수님을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는 참 믿음을 심어 주시기 위해 오빠 나사로의 죽음이 필요했던 것이다.

마르다의 불신

마르다는 비록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완벽하게 고백하였지만 죽음의 현실 앞에서는 이내 믿음을 내려놓게 된다. 이미 죽었고 시체가 부패하여 냄새가 나는 모든 것이 다 끝난 그 현실 앞에서 이내 희망이 없다고 포기한 것이다. 바로 우리의 불신앙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주님은 포기하지 않았어도 우리는 시련과 시험과 절망에 놓이게 되면 이내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포기할 때가 참 많다는 것이다. 마르다는 앞서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라고 완벽한 믿음을 고백하였다. 그런데 그가 정작 썩어서 냄새가 나는 시체를 대면하자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고백한 그 믿음이 무너진 것이다. 주께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믿으려고 하는 그 소원과 열망은 있었지만, 현실 앞에서는 그 죽음의 권세가 너무나 압도적이었기에 이내 부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바로 베드로와 같은 상황이다. 베드로도 마르다와 똑같은 신앙을 고백하고 예수님과 함께 죽겠노라고 맹세하였지만 예수님이 진정 권세자에게 잡혀가 십자가에 죽게 됨을 현실로 받아들이게 되자 이내 예수님을 배신하고 부인한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나약함이다.

마르다는 예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서 예수님을 가장으로 여기고 의지하며 사랑하였고, 예수님이 행하시는 많은 이적과 표적의 능력을 친히 보았기에 예수님이 함께 하여 주신다면 무엇이든지 다 해결이 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와 희망으로 예수님을 육신적 메시아로 믿었을 것이다. 즉 주님과 함께 있으면 모든 육신의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그런 막연한 기대였다. 그리하여 그는 예수님을 보자마자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11:21) 라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고백에서,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11:22)라고 주님이 지금이라도 뭔가 하실 수 있다는 긍정적인 고백으로 들리지만, 실제로 마르다는 예수님이 하나님으로서의 능력과 권능으로 직접 기적들을 일으키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구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줄로 믿고 있었던 것이다( (11:22).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나사로의 무덤 돌을 옮기라고 말씀하시자, 마르다는 오빠가 죽은 지 나흘이 되니 벌써 냄새가 난다고(11:39) 말함으로, 썩은 시체가 되었는데 돌을 옮겨 놓아도 소용없으며 이미 늦었다는 원망이 담겨 있었다. 주님은 분명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11:23)라고 말씀하셨고,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11:25-26) 라고 확인까지 주셨다. 그럼에도 마르다는 현재가 아니라 장차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11:24)라고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도 믿지도 않은 것이다. 다르다는 주님이 나사로를 다시 살리실 것이라는 믿음보다 나사로가 죽었는지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나는 전혀 살 가망이 없다는 사망의 현실과 사실이 더 강하게 그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기에 이내 예수님에게 향한 믿음을 잃게 된다. 주님은 마르다의 믿음이 사망에 압도되어 바닥으로 떨어짐을 보시고 이내 마르다에게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11:40) 라고 다시 확인시키는 책망을 하신다.

마르다는 이태까지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표적과 기적들을 보았고 진리의 말씀과 선포로 예수님 자신이 바로 메시아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셨다. 또한 마르다 자신도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11:27) 라는 확실한 신앙도 고백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고백들이 마음으로 깨닫고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확실한 믿음에 선 고백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여전히 주님이 그곳에 함께 계셔야만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고,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들이 하나님으로부터 구하셔서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생각함으로 예수님의 권능과 능력에 확실한 믿음이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에 있는 왕의 신하의 아들이 죽어갈 때 친히 그 현장에 가셔서 고친 것이 아니라 하인에게 말씀을 주어 가나에서 살리셨다. 주님은 영이시기에 시간과 공간의 제약 없이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마르다는 자신이 있는 공간 안에서만 예수님과 함께한다고 이해하고 있었고, 예수님이 바로 전지전능하신 생명의 주관자 이심을 확실히 믿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주님은 무덤 앞에서 나사로를 살리기 직전에 마르다에게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11:40)라고 너는 지금 나의 말을 믿지 않는다고 책망하신 것이다. 즉 예수님이 아무리 많은 기적을 행하셔도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전적으로 믿는 신앙을 가지지 못하면, 예수님의 말씀이 곧 생명임을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가 없다는 말씀이다. 오직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메시아로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그분이 하시는 말씀을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자만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는 말씀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즉 내가 너에게 이른 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11:25-26) 이 말씀을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메시아로 믿으려는 열망으로 막연한 기대와 희망을 믿음으로 붙들고 있었지만 신앙 연단은 부족했던 것이다. 즉 마르다의 믿음은 본질적이고 결정적인 믿음이 아니라, 한계가 있는 인간적인 이성에 멈춰 있었다. 그리하여 주님은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제자들을 포함하여 나사로의 죽으심과 살려내심을 통하여 이들의 믿음을 강건하게 연단시키려는데 주님은 초점을 두고 있었다. 베드로가 말한 봐와 같이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 1:7)함과 같다. 오직 연단을 통하여야만이 예수님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또한 하나님이심을 진심으로 믿게 되며, 그 진실한 믿음으로만이 그분의 이적과 기적을 체험하게 되며, 그러한 표적들이 제시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 그리하여 주님은 마르다에게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11:40)라고 믿음을 확인시켜 주신 것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주님은 죽은 지 나흘이 지나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는 놀라운 표적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행하심으로 부활이 현실로 이루어짐을 보여주신다. 즉 예수님이 바로 생명이요 부활이시기에 그를 믿는 자는 나사로와 같이 죽어도 다시 살아나며,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진리가 현실이 된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11:25-26)라고 물으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물이 창조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이 곧 생명의 근원이시며 생명의 주관자이시기에 그분은 스스로 목숨을 버릴 권세와 목숨을 얻을 권세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10:17-18).

우리 주님은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시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를 지시고 자신의 목숨을 버리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죽음으로 완전히 철저히 도말하여 주셨으며, 우리에게 영원한 새 생명을 주시기 위해 다시 자신의 영으로 부활하신 것이다. 그분이 먼저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살리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를 당신의 영원한 자녀로 신부로 삼기 위해 먼저 부활하셔서 부활의 영으로 우리에게 영생을 입혀주시는 부활의 첫 열매가 되어 주셨다. 바울이 말씀하기를,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죽었다가 부활한 첫 사람이 되셨습니다. 죽음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온 것처럼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왔습니다”(고전 15:20-21). 그렇게 죄 없고 흠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인들의 모든 죄가 그 치욕적인 십자가상에서 영원히 죽어 없어지는 권능과 지혜와 사랑의 절정에 도달하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그분의 선하심과 의로우심이 천하에 나타내어 그분에게는 영광이 되고, 만백성에게는 더디어 구원이 성취되는 부활의 절정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분은 우리의 생명과 부활이 되어 주시기 위해 스스로 자신을 버림으로 십자가를 지셨으며, 또한 새 생명의 창조를 위해 자신의 권능으로 죽음에서 부활하여 주셨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목숨을 아낌없이 버리심과 다시 부활하심으로 ‘내가 곧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신 진의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11:25-26);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요 5:21). 우리 주 예수님은 사랑하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우리를 위해 다시 부활하셔서 우리와 하나가 되는 영생으로 잉태시켜 주심으로 영원히 함께 사는 사랑의 절정이 된 것이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죽을 권세도 살 권세도 가지진 전능하신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부활과 생명’이시다.

믿음의 최고 절정은 예수 부활이다. 만일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그 구원은 생명과 소망이 없는 죽은 구원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라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고전 15:17-18)라고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구원이라는 진리가 있을 수도, 생명이라는 영생이 있을 수도 없으며, 구원받은 증거가 없기에 ‘여전히 죄 가운데 있으며’ 하늘나라는 허사가 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눅 20:38) 라고 주님은 생명이 부활에 있음을 가르쳐주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 라고 부르지 아니하시고,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 11;25)라고 부활의 진리를 선포하셨다. 예수 십자가의 죽으심은 육신에 속한 죄의 사망이요, 예수 부활은 영에 속한 새 생명, 성령의 법을 세우려 하심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히 10:9). 즉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벧전 4:6).

죄로 죽은 인간을 다시 살리는 부활의 영이 내 안에서 새 생명을 잉태 시켜야만이 나는 영생을 소유할 수 있으며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그리하여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부활의 예수, 성령이 실상이다. 즉 부활의 생명 씨를 보혜사 성령이 우리 안에서 태동시키고 잉태시켜 주신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5)라고 부활의 본질을 말씀하신다. 부활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야만 영원히 사는 영생을 누리게 된다. 그러므로 성도의 소망은 부활이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셨으므로 나의 모든 죄가 영원히 도말되었음을 믿으며,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잉태시켜 주신 부활신앙으로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잠시 이 세상을 사는 나그네들이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 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있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벧전 1:3-4) 함과 같다.

하지만 부활의 예수는 오늘날 교회에서 많이 거론되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부활은 영의 사건이기 때문에 육의 지성으로는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육체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는 실체로 보고 기록된 역사의 증거가 있지만, 부활하여 영으로 오신 성령의 예수는 육감으로 보이지도 이해되지도 믿어지지도 않기 때문이다. 즉 부활하신 예수는 영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신다. 우리가 구하여서 주관적 의지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먼저 선택받은 하나님의 자녀여야 하며, 그분이 먼저 내 심령 안에 들어오셔야 만이 비로소 새 생명으로 잉태하는 중생을 체험하게 된다. 즉 예수 부활은 죄로 죽은 나를 다시 살리는 영으로 새 생명이 잉태되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늘나라로 이어지는 영원한 생명이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나는 죄인으로 저주의 십자가에서 죽은 상태에 있을 뿐(갈 3:13) 영생하는 생명을 얻을 수가 없다.

제자들도 처음에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다시 부활하리라 믿지 않았다. 그렇게 열심히 쫓아다니던 주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심으로 모든 것이 허무하게 끝났다고 생각하였고 뿔뿔이 흩어져 다시 고기 잡는 뱃사공으로 돌아간 것이다. 하지만 부활한 그리스도의 영이 그들 안에서 역사하자 부활의 영으로 새롭게 거듭난 그들은 비로소 담대함으로 예수 부활을 전하는 참 제자들이 된 것이다. 예수 부활 안에 있는 자는 생명을 잉태하는 영의 차원에서 성령의 인도를 따라 영적 삶을 추구하는 자가 되며,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는 자로 더는 자신을 위해 사는 자가 아니요 자기를 부인하는 십자가의 삶으로 부활의 예수 생명을 전하는 자로 서게 된다. ​성도는 이제 예수와 함께 내 옛사람이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사람으로 부활하여 하늘나라의 영생을 추구하는 자로 그리스도에게 속한 신부이다. 성도는 십자가의 첫째 부활을 지니고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님께 붙은 자이기에,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배움과 양육의 터로 주신 이 가시적 역사 속에서 그분의 나라에 대하여 배우며, 영원히 함께 사는 아버지와 신랑 되신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배워 아버지의 거룩한 자녀로 그리스도의 영화로운 신부로 지어져가는 삶으로 인도를 받으며, 그 삶은 내가 철저히 부인되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과하는 삶이며,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나에게 주어지는 모든 일에 순종하는 자로 내려가 오직 그분의 영광만을 드러내는 삶으로 정착된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실 것임에도 불구하고 눈물을 흘리셨으며 비통히 여기셨다. 주님은 부모가 없이 남매가 서로 의지하면서 살다가 오빠가 죽음으로 두 동생만 홀로 남겨진 그 비통함과 아픔에 동참하셔서 그들의 슬픔을 자신의 슬픔으로 받아들이셨다. 또한 사망에 사로잡혀 사망의 증상들로 눈물을 흘리고 있는 당신의 백성들의 눈물에 동참하신 것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방관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힘든 인생 전체를 동행하시면서 우리의 고통과 슬픔과 절망과 고난을 함께 체휼하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신다는 말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내려오셔서 우리가 겪는 모든 것들을 겪으시고 체험하시며, 우리를 고아로 놔두시지 않으시며 영원히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고 현재 우리와 함께 계심으로(요 14:16-18),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다”(요14:20)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 주님은 ‘인자’로 육신을 입고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오신 분이시지만 죄만은 없으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그분은 모든 면에서 사람과 똑같은 분으로 오셔서 우리를 이 세상 죄의 고통과 사망에서 건져주시기 위해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난을 육신으로 친히 경험하심으로 우리의 모든 사정을 함께 체휼하신다.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 2:16-18). 그분은 사람으로서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셨다. 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조롱과 천대를 받으셨으며, 배신과 거역과 핍박을 당하셨으며, 매 맞음과 극도의 고통과 죽으심을 당하셨다. 그리하여 우리가 이 세상 육신으로 겪는 고난과 고통, 유혹이나 시험이나, 절망과 실수와 같은 모든 일들을 이해하여 주시고 위로하여 주시며, 용서하여 주시며, 긍휼과 자비로 감싸주시며, 함께 인내하며 이겨나가기를 원하신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11). 우리와 똑같이 육을 입은 그분이 육체로 감당하여야 하는 그 십자가의 고통은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분은 창조주이시며 심판주이신 권능과 권세를 가지신 만왕의 왕이심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창조한 티끌에 불과한 죄인들로부터 멸시와 조롱과 대적과 핍박을 당하셨으며, 도살당하는 양으로 묵묵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셨다. 그분은 이 세상과 악인을 심판하시는 권세를 가지고 계심에도 반대로 악인들에게 연약한 모습으로 심문과 매 맞음과 춤 뱉음과 수치와 조롱을 다 당하셨으며, 영광의 주이신 그분이 실호라기 하나 없이 벌거벗은 몸으로 십자가 위에 매달려 계셨다. 그 모습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위엄도 풍채도 영광도 도저히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약하고 아무 능력 없이 당하는 모습을 본 제사장과 바리새인들과 같은 유대인들은 끝까지 예수님을 비방하고 조롱하고 욕한 것이다.

우리 주님은 그렇게 창조주이시며 통치자이시며 심판자이신 만물의 주가 되신 그 모든 권세와 지위를 내려놓으시고, 우리와 똑같이 육을 입은 육체로 십자가의 고난과 고통을 감당하셨다(사 53:2-7). 십자가를 져야 할 주님의 그 고통을 시편에서는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시 22:14)라고 처절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분께서는 이루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다 당하시고 죄로 죽은 우리를 다시 살리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바치시고 “다 이루었다”(요 19:28)라는 선포로 인간에 대한 극치의 사랑을 성취하시고 확증하셨다. 하지만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다(사 53:6-7).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체휼하심에 대해서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 :15)라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33-35절). 주님이 우신 것은, 사망의 세력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육신을 입고 살아가야 하는 당신의 백성들의 눈물을 이제 자신이 다 짊어지시고 우리를 위하여 고통을 당하셔야 하며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심으로 죄인들의 모든 죄가 그 치욕적인 십자가상에서 영원히 죽어 없어짐으로 다시는 당신의 백성의 눈에서 눈물이 없는 그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임을 생각하시고 사망에 사로잡혀 눈물을 흘리고 있는 당신의 백성들의 눈물에 동참하신 것이며, 당신이 져야하는 그 십자가의 고통과 그 고통으로 당신의 백성들이 살아나 영생을 얻게 되는 감격에 주님은 당신의 백성을 위해 눈물을 흘리신 것이다.

하지만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제자들과 모인 유대인들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사망에 압도되어 슬피 울고 있었다. 사랑을 나누던 존재가 죽음으로 사라진다는 것은 남겨진 사람에게는 마음으로 아직 떠나보내지 못하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다. 그 마음의 고통과 슬픔에 주님이 동참하여 주신 것이다. 우리 주님도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당하셔야 할 그 극도의 고통 속에서 아버지와 헤어져야 하는 그 통곡의 슬픔을 겪으셨다. 육신의 고통보다 더더욱 고통스러웠던 것은 바로 한 번도 떨어진 적 없이 하나로 계셨던 아버지께서 아들이 죄를 짊어지자 그 죄로 인하여 아들과의 교통이 끊어지고 아들의 고통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버지께서 죄인으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에게 완전히 등을 돌리심으로 너무나 고통스러웠기에 “아버지여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막 15:34)라고 영적 소외감과 고독감으로 탄식하며 외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을 외면하는 등을 돌리신 것은 우리를 향하여 사랑과 은혜의 얼굴을 드시고 영광의 빛을 비추어 주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추사"(시 67:1). 하나님의 이 원대한 선한 뜻을 이루시기 위해 예수님은 이제 당신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그동안 죄인으로 고난을 당하셔야 하며, 죄인으로 십자가에 죽게 됨으로 죄로 인하여 아버지로부터 끊어지는 버림을 당하셔야 하는 그 심령의 아픔과 또한 자신이 반드시 십자가에 죽으셔야만 이 이들의 모든 눈물을 닦아주시며 다시는 사망과 애통과 슬픔이 없는 영원한 부활을 주실 것임을 알고 계셨기에 이들의 눈물에 동참하신 것이다.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11:38). 여기서 말씀하시는 ‘비통’은 죽음을 이 세상에 끌어들인 죄를 향해 거룩한 분노를 의미한다. 즉 인간을 처참한 지경으로 몰아넣은 죽음의 실체에 대한 통분이다. 그리고 죽음의 두려움으로 고통받고 있는 인간의 처지로 내려오셔서 그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자를 죽음에 빼앗기고 슬퍼하며 통곡하는 당신 자녀들의 슬픈 심정을 이해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이 겪는 죽음의 공포와 슬픔에 동참하심으로 우리의 모든 아픈 감정을 함께 나누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비통은 사랑하는 자녀들이 죽음 앞에서 겪는 고통에 대한 안타까움 이면서, 인간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죽음에 대한 통분이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고통스러운 상황만을 바라보지 않으시고 그러한 상황을 통하여 죄가 얼마나 사악하고 더럽고 추악하며 그 사망의 권세가 얼마나 잔인한지를 깨닫게 하시며, 왜 우리에게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이 필수적인지를 알게 하시며, 그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기 위해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음을 깨닫고 그분의 품에 안기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당신의 백성들이 죄로 인하여 당하는 사망의 고통과 슬픔에 동참하셔서 한없는 긍휼과 자비와 용서와 사랑으로 품어 주시지만, 또한 당신의 자녀들을 유혹하여 죄와 죽음에 빠지게 하는 이 세상 사단의 권세, 그리고 끝없이 당신의 백성들을 죄의 길로 끌고 가는 삯꾼과 이리 와 같은 강도와 절 도와 거짓 선지자들에 대하여서는 분노하시며 정죄하시며 심판하신다.

우리 주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그렇게 죄와 사망의 권세에 삼켜짐을 분노하셔서 그 죄와 사망의 권세를 멸하시고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여 다시는 죄와 사망이 없는 영원한 의의 생명을 주시기 위해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내어주셨다. 그리고 이제 다시는 죽음이나 슬픔의 눈물이 없는 영원한 천국을 주시기 위해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영으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신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1-5). 우리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여 주심으로 부활의 영으로 잉태된 우리에게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슬픔이 없다’고 사도 요한은 증거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눈물을 보고 나사로를 참 많이 사랑하셨으리라(11:36)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37절에 보면,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라고 비아냥거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나사로를 그렇게 사랑하였다면 맹인의 눈도 뜨게 하는 그 실력으로 나사로를 죽지 않게 할 수가 없었단 말인가, 나사로를 진정으로 사랑한 것이 아니라는 비난이었다. 이들은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아프지 않게 해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무지로 하나님마저 판단하는 자들이다. 육신을 위해 사는 인간이 어찌 영에서 일어나게 되는 그 원대한 계획과 하늘나라의 원리와 영생을 알 수가 있겠는가! 이들이 어찌 썩은 시체가 다시 부활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진의를 알 수가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그 영을 열어주지 않으면 그 부활의 진의를 알 수도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인간은 영의 계시가 없이는 절대로 하나님의 영의 일을 이해할 수도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일에 짐작할 수도 생각할 수도 동참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분은 이 세상 원리가 아닌 하늘나라의 원리로, 육이 아닌 영으로, 인간이 아닌 하나님의 권세와 권능으로 일을 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전부를 그분에게 온전히 맡기고 잠자코 그분이 하시는 일에서 그분을 알아가고 깨달아가며, 항복하고 순종으로 그분이 주시는 은혜와 생명을 선물로 받는 것뿐이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 나사로야 나오너라

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슬픔에 잠겨 눈물을 흘리는 마리아와 마르다를 보시고, 나사로가 묻혀 있는 무덤의 돌문을 치우라고 명하신다. 마르다의 말과 같이 시체는 이미 썩어서 냄새가 나고 있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에게 감사 기도하시고, 나사로 무덤을 향해 “나사로야, 나오너라”(11:43)라고 외친 것이다. 그러자 죽었던 나사로에게 예수님의 말씀이 들어가자 무덤에서 살아 나온 것이다.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나 시신은 부패해서 냄새가 나는 상태였고 그런 나사로를 말씀으로 살려내신 것이다. 우리가 바로 이와 같이 썩어져서 더러운 냄새가 나는 썩어짐의 시체에서 구원받은 것이다. 그렇게 썩어서 냄새가 나는 나사로의 죽음의 상태가 폭로되자 주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빨아들여 그 사망을 품에 안고 십자가에서 죽어 버리심으로 당신의 백성들이 바로 이러한 썩어짐의 사망에서 구원받아 살아 올라오게 됨을 보여주신 것이다.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11:41). 예수님은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우선적으로 아뢰고 감사 기도를 하셨다. 이러한 절대적인 신뢰로 항상 아버지를 공경하셨고 아버지의 뜻대로 아버지가 원하시는 일을 행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아버지에게 향하신 전적인 믿음으로 나사로의 무덤을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라고 말씀으로 명하셨으며, 생명의 말씀이 예수님의 입에서 나와 죽은 나사로의 몸에 들어가자 수족을 베로 동인 채 무덤 밖으로 걸어 나오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주님은 다시 살아난 나사로를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44절) 라고 명하심으로 나사로에게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되는 자유를 선포하신 것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11:25-26) 라고 선포한 말씀이 지금 실제로 죽은 나사로에게 응하여 말씀으로 일으켜 살려내심으로 예수님이 바로 생명의 주관자이시며, 생명의 근원이심으로 인간의 생사가 바로 주님에게 달려있음을 증거로 확실하게 보여주신 것이다. 주님이 말씀하신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11:42)함과 같이 사실과 현실로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참 아들이시며 메시아 이심을 증명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심으로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다.

에스겔 37: 1-10 에서, 죽어있던 마른 뼈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자 진짜로 살아나서 큰 군대가 됨을 읽을 수 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깊은 골짜기로 인도하시는데 그 골짜기에는 수많은 마른 뼈들이 흩어져 있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라고 물으셨다. 그리고 모든 뼈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라고 하신다.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 지어다” 하나님께서 마른 뼈들을 살리시는데 먼저 말씀을 듣게 하신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곧 생명임을 제시하신다. 사람이 죽는 이유가 바로 첫 인간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불순종으로 죽음의 저주가 내려졌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시 말씀으로 생명을 회복시키신 것이다. 분명 죽어서 살은 다 썩어서 없어지고 말라비틀어진 뼈만 흩어져 있는데 그 뼈들이 살아난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며, 더더욱 그 마른 뼈들에게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라고 외치는 것은 참으로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당신의 말씀을 대언하라고 명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이 곧 진리의 영이며 생명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는 듣지만 마음으로 들은 적은 없었다. 그들이 망한 이유가 바로 말씀을 듣지 않고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하고 대적하는 대척점에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되 새벽부터 부지런히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였고 너희를 불러도 대답지 아니하였느니라”(렘 7:13). “내가 불러도 너희가 대답지 아니하며 내가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고 나의 눈에 악을 행하였으며 나의 즐겨하지 아니하는 일을 택하였음이니라”(사 65:12). 하나님은 수시로 선지자들을 보내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셨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청종하지 않았고 거역하여 마른 뼈가 된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다시 말씀을 듣게 하여 말씀으로 살려 내심으로 오직 말씀에 대한 순종만이 생명임을 제시하셨다. 그렇게 마른 뼈들에게 말씀을 들려주시고, 하나님은 자신의 생기를 뼈들에게 넣어주심으로 살아나게 하신 것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겔 37:5-6).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겔 37:10). 마른 뼈가 말씀을 듣고 생기를 받음으로 군대가 되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오직 말씀과 성령으로만이 강력한 군대로 무장됨으로 악한 영을 제거하고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생명으로 살아 올라오게 됨을 계시하셨다. 이와 같이 말씀과 생기, 즉 성령으로 새 생명을 얻게 됨을 보여 주셨다. 이제 당신의 백성은 반드시 말씀을 일용할 양식으로 먹게 되며, 당신의 영인 성령으로 새사람으로 잉태하여 하늘의 백성으로 매일 성령의 주관하심과 인도하심을 받을 것임을 미리 계시하여 주셨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11:40)라고 말씀하심으로 마른 뼈까지도 살려내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고, 주님이 주신 진리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고 믿는다면, 곧 죽은 자가 살아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다. 즉 네가 고백한 그 믿음으로 나를 진정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는 확실한 믿음에 선다면 이제부터 내가 일으키는 기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오직 믿음으로만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같이 믿지 않는 자들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고 하여도 절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가 없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사랑했고 예수님을 따랐고 예수님에게 희망과 기대를 두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예수님의 기적을 믿었고 예수님이 기도하면 하나님이 즉각 응답해 주신다는 것도 알고 있었으며, 종말에 모두 부활할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지금 당장 살릴 수 있다는 믿음은 없었다. 그리하여 주님은 사랑하는 마르다에게 확실한 믿음을 심어 주시기 위해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11:40) 라고 마르다의 믿음을 확인시켜 주신 것이다. 믿음이 온전하지 못하면 나사로의 부활을 보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들은 비록 나사로의 부활한 사실을 눈으로 직접 보고 확인하였음에도, 그 기적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함으로 예수님을 메시아로 하나님의 참 아들로 믿지 못하였고, 오히려 부활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더욱 죽이려고 독사처럼 달려든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만이 그 기적이 나의 기적이 되고, 그 부활이 곧 나의 부활이 되며,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입는 빛의 자녀로 전환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