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회개의 의미: 회개는 구원에 이르는 통로가 아니다. 철저한 회개로 죄가 사하여지는 것이 아니며, 회개가 우리를 의롭게 하는 효능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종교에서도 철저한 회개를 강조하며 모든 인간은 양심으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찔림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회개는 구원과 생명을 동반하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회개하지 못한 죄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면 우리에게는 영원한 멸망일 뿐 살길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육이 사는 동안 매일 생각으로도 마음으로도 말로도 행위로도 죄를 떨쳐버릴 수 없는 육의 탐심과 악한 본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기독교의 회개는 오직 택함을 받은 자에게만 임하게 되는 죄에 대한 깨달음과 용서, 즉 죄를 완전히 도말하여 없애주시는 영원한 사하심과 영원한 생명이 임하는 십자가의 공로를 믿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인간의 주도하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찾아와 주셔서 눈과 귀를 열어주심으로 예수그리스도가 바로 나의 구원자 이심을 알게 되는 것과 나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게 되는 것에서 출발한다. 즉 “나는 누구인가?” “왜 나는 죄인인가?” “누가 나를 이 죄와 사망의 지옥에서 건져줄 수 있는가?” 하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철저한 깨달음이다. 자신의 실체를 인식하는 그 돌이킴은 모든 자에게 일어나게 되는 회개가 아니다. 오직 택함을 받은 자에게만 은혜를 입혀주심으로 깨닫게 되는, 즉 그분이 먼저 이 죄악된 세상에서 나를 찾아와 주셔서 불러내어 주시고, 나의 인생에 개입하셔서 나에게 죄에 대한 깨달음과 의에 대한 진리를 가르쳐 주심으로 죄에서 돌이키는, 즉 옛 죄인이 죽고, 새 생명이 잉태되는 거듭남의 획기적인 전환을 말한다.
둘째, 성령으로 거듭난 자는 성령님의 가르침과 인도로 영적 차원의 삶을 지향하게 된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분이 너흐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요 16:13).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8). 그러므로 회개의 주체는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 측에서 일어나는 인간 주도가 아니라, 그렇게 죄를 짓을 수밖에 없는 죄인으로 태어나 사망의 몸으로 던져진 자신의 실체를 알아보고, 성령님의 가르침과 인도를 따라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며, 하나님 아버지의 불가항력적 은혜의 덮음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되었음을 깨닫고 믿는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믿음으로 이루어짐을 예수님은 비유로 확실히 말씀해 주고 있다.
죄인의 회개란? (눅 15장)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 드라크마, 아들, 이 세가지 비유를 주신후 마지막 결론을 한 죄인의 회개로 말씀하신다. 7절과 10절에서, 잃어버린 한마리 양과 잃어버린 드라크마 하나를 죄인 한 사람의 회개로 말씀하신다: 7절: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10절: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21절, 잃어버린 탕자의 회개: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이 세 가지 비유의 마지막 결론은 ‘회개’이다.
먼저, 잃어버려진 양의 비유에서, 100 마리 중 99 마리는 주인을 잘 따라 길을 잃지 않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주인이 진정 원하시는 양은 99 마리 의인이 아니라 길을 잃은 한 마리 양이었다. 그 한 마리가 본래 주인에게 속해 있었던 양이었기에 주인은 오직 자신에게 속한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선 것이다. 잃어버려진 양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회개하고 스스로 목자를 찾아온 것이 아니며 또한 그렇게 될 수도 없는, 잃어버려진 그 상태로 있는 것이 바로 양의 역할이다. 길을 잃은 양은 목자가 먼저 찾아와 주셨기에 다시 주인의 품에 돌아온 것인데 주님은 그 양을 회개한 죄인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잃어버린 드라크마에서도 드라크마가 스스로 자신이 잃어버려졌음을 깨닫는 회개로 주인을 찾아온 것이 아니다. 드라크마는 자신이 잃어 버려졌음을 알 수도 회개할 수도 찾아다닐 수도 없는 생명이 없는 물체이다. 그 드라크마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물체이지만 다만 화폐라는 값어치가 있는 것뿐이며, 주인에 의해 찾아진 것이다. 주님은 이 두 비유에서 주인이 찾아낸 것을 ‘회개’한 것으로 말씀하고 있다.
이와 같이 양이나 드라크마는 잃어버려진 그 상태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자체이며, 모두가 주인의 열심에 의해 찾아짐으로 주인의 품에 안겨진 것이다. 주님은 우리를 첫 비유에서는 양으로, 두 번째는 드라크마로, 마지막은 방탕한 아들로 배열하시고, 수자도 백으로, 열 개로, 둘로, 이렇게 점층적 개념과 숫자를 동원하여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와 그 은혜를 입게 되는 선택과 주도권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강력하게 피력하고 있다.
이 세 가지 비유에서 주님은 동일하게 ‘잃어버림’이라는 핵심적 문구를 쓰심으로 이들은 처음부터 소유된 소속지가 있었다는 것을 제시한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은 자'(엡 1:4)들이며, 이들은 '그 기쁘신 뜻대로 예정을 입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엡1:5)는 것이다. 즉 우리는 본래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였으며, 다만 창세전 정하신 하나님의 선한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목적으로 잠시 육신을 입고 이 세상 속에 태어났고, 잃어버려진 상태로 방치된 자 같이 보이고, 방탕한 자로 죄와 죽음에 버려진 자와 같이 보이지만, 결코 버려진 자가 아니라는 말씀이다. 우리의 신랑 되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세상 죄와 죽음에 처해 있는 우리를 결코 찾아내셔서 자신의 신부로 맞이하여 주시며, 아들로 아버지께로 돌려보내 주신다는 약속이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내게 맡기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는 일이다“ (요 6:39).
그러므로 주님이 말씀하시는 ‘회개’ 란, 잃어버려진 양이나 드라크마나 잃은 아들 측에서 발휘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냥 잃어버려진 그 자체이며 상태였다. 그러므로 주님이 말씀하시는 ‘회개’ 란, 인간의 주도하에서 자발적으로 나오는 죄에 대한 뉘우침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창세전 선택된 자는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와 은혜를 입혀 주시며, 자신의 정체성을 알아보는 영의 눈과 귀를 열어주심으로 죄를 깨닫게 하는 통회의 마음을 주시며, 구원의 의를 갈망하게 하시며, 생명의 진리를 구하게 하시며, 소유하는 데까지 일방적으로 강권적으로 이끌어 주시는 은혜뿐임을 제시하신다. 즉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의 덮음으로 성령님의 주도하에서 일어나는 ‘회개’가 바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 (고후 7:10)이며, “생명을 얻는 회개”(행 11:18)이다.
그러므로 ‘회개’는 올바른 행실에 관한 그릇됨의 뉘우침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주님은 올바른 행실로 회개할 것 없는 의인을 원하지 않는다고 확실히 말씀하시고 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 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막 2: 17).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눅5:32).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는 주도권이 바로 주님에게 있다고 확실히 말씀하시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열심과 노력으로 율법을 지켜 의인이라고 자칭하는 자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이기에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이 필요 없기에 그들에게는 '회개'의 영을 주지않기로 정하셨다는 말씀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이 비유를 회개와 연결하신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와 주셔서 은혜를 입혀주셔서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서 친히 주도하신 회개이기에 의롭다고 칭하여 주시며, 회개에 합당한 구원과 생명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
그러므로 회개란, (1), 성령님의 임재와 깨우침으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며, "허물과 죄로 죽었다"(엡 2:1)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깨닫음이다. (2),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나에게 임하여 그분의 ‘의’로 말미암아 나의 모든 죄가 이미 용서되었음을 깨닫고 죄인으로부터 의인의 길로 들어서는 방향전환이다. 즉 우리의 모든 죄가 예수에게 전가됨으로 그분이 내 죄를 대신하여 피를 흘리심으로 그분의 피의 공로로 모든 죄가 이미 사하여 졌음을 믿고 그분만을 신뢰하며 그분 안에 거하는 믿음이다. (3), 회개는 율법으로 죄를 깨닫는 것과 성령의 법으로 새 생명으로 거듭나는 획기적인 변화를 일으킨다. 즉 하나님께서는 회개라는 방법을 주셔서 죄를 깨닫고, 죄를 자백하게 하신다. 이르기를,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4),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하여 졌음을 선포하여 주시며 동시에 새로운 영을 주셔서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게 하신다. “그런즉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 5:16-17).
그러므로 회개와 믿음은 인간의 주관적 의지에서 노력하는 행위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친히 우리 마음 안에서 역사하시는 의로운 일, 즉 그분이 입혀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그분의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선물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회개라는 방법으로 우리에게는 죄를 깨닫게 하시며, 그분은 우리에게 긍휼과 은혜를 베풀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시며 그분의 사랑의 품에 안기게 하신다. 그러므로 회개는 단지 죄인이라는 것을 시인하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구약에서는 회개를 입증할 수 있는 일정한 행위나 의식적인 행동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이미 자신의 십자가 죽음으로 구원을 성취하여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게 하여주셨다. 과거, 현재, 미래의 죄까지 몽땅 도말하셨다. 그리고,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셨다. 즉 회개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나의 모든 죄가 십자가의 보혈로 깨끗하게 도말되었음을 믿는 믿음을 말한다. 회개의 전제조건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자신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할 수 없음을 고백하며, 나를 구원해 줄 수 있는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받아들이는 믿음 안에서의 회개이다. 다윗의 예를 보자.
복음 안에서 의롭다 함을 받은 다윗
다윗은 밧세바의 사건에서 자신이 범한 죄에 대하여 회개로 통곡하거나 금식하는 방법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나단이 율법을 가지고 다윗의 죄를 정죄할 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다윗에게 성령의 법, 곧 죄가 사하여지는 복음을 계시하여 주셨다. 그리하여 다윗은 비록 자신이 빗어낸 죄는 인정하였지만, 통곡의 금식과 회개 대신 오히려 하나님은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기에”(시 51:16), 제사 없이 자비와 긍휼과 은혜의 덮음으로 자신의 죄가 도말 되여 깨끗하게 된 복음(시 51: 1-2) 믿고 기뻐하며 찬미하였다. 다윗은 영의 계시로, 나단이 주는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고,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자신의 죄가 이미 십자가의 보혈로 완전히 사하여졌음을 마음으로 깨달은 것이다. 말하기를, “내가 주께만 범죄 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 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 51: 4). 다윗은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나 자신을 죄인이라 정죄하지 않고 오히려 ‘의롭다하고 순전하다’고 하시는 복음을 의지하여 은혜로 말미암아 죄에서 해방 받은 자유와 평강과 기쁨을 체험한 것이다.
다윗은 간음하고 살인하는 엄청난 죄를 짓은 죄인이다. 그가 철저한 회개로 죄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께서 그에게 궁휼과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에 죄를 늬우치고 십자가를 의지함으로 그의 모든 죄가 사하여지고 ‘의롭다’함을 받은 자가 된 것이다. 자신이 할 수 없는 의를 주께 구하였기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의롭게 여기고 은혜를 입혀주심으로 죄 중에 잉태된 밧세바의 아들 솔로몬을 택하여 평화의 왕으로 세워주셨다. 이것이 바로 영으로 복음을 깨달은 은혜를 누리는 의인의 회개이다. 이와 같이 다윗은 자신이 할 수 없는 의를 그분에게 구하는 복음을 의지하여 그리스도 십자가 구원이 성취되기도 전에 자신의 모든 죄가 이미 사하여지고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게 됨을 영의 계시로 깨달은 것이다. 참으로 복된 깨달음이다. 복음을 깨달은 그의 삶은 오직 하나님께서 입혀주시는 은혜를 드높이 찬미하는 기쁨과 감사와 평강이 넘치는 찬양이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시 34:1)의 고백과 같이 다윗은 감사와 기쁨과 찬양의 삶을 하나님께 드렸다.
의인의 회개
율법은 한마디로 저주와 죽음의 법칙이다. 오직 평화의 복음 안에서만이 자유와 화평과 기쁨을 소유할 수 있다. 다윗은 복음 안에서 의인의 신분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유와 기쁨으로 자신의 모든 죄가 완전히 사하여 졌음을 찬미하였다. 의인의 회개는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이미 나의 모든 죄가 용서되고 없어졌음을 깨닫는 자유이며 진리를 깨닫는 기쁨으로 그분의 생명 안에 거하는 일이다. 특히 사도 요한과 바울은 예수 생명 과 빛 안에 있는 자는 이미 깨끗한 의인이기에 ‘회개’ 를 강조하기 보다는 예수 생명 안에 거하는 하나됨을 강조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이미 죄 사함을 받은 전제하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의인의 회개로 감사와 기쁨과 찬송의 삶을 지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에서는 여전히 철저한 육적 회개로 의로워지고 회개로 구원에 이른다고 가르치고 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발을 씻길때 베드로가 온몸을 씻는 목욕을 간청하였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요 13:10)고 말씀하셨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그분의 성품을 따라 깨끗한 자요 의롭다 함을 받은 자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를 때 “회개하고 나를 따르라”라고 하지 않으시고, 첫마디에 “나를 따르라"라고 부르셨다. 간음한 여자에게 "회개하라"라고 하지 않으시고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라고 죄에서 자유하게 하셨다. 마태를 부를 때 세금을 떼먹은 죄를 회개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바울을 부를 때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그가 얼마나 엄청난 죄를 짓고 있는가를 깨우쳐주시는 궁휼과 자비로 부르셨다.
그분은 내가 실수하였다 하여 잘못하였다 하여 나를 죄인으로 정죄하고 심판하거나 벌을 내리시는 분이 아니시다. 나를 죄인으로 정죄하고 하나님을 두렵게 하는 마음은 사단이 다시 우리를 하나님과 분리시키는 미끼다. 사단은 끊임없이 죄를 미끼로 우리를 ‘죄인’이라 정죄함으로 죄인과 회개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우리는 이미 모든 죄에서 깨끗함을 받았다(요일 1:7). 그러므로 죄의 문제로 인하여 마음에 갈등과 괴로움으로 자신을 죄인이라 정죄하는 일은 그쳐야 한다. 아버지는 당신의 아들의 피로 이미 우리의 모든 죄를 영원히 사하셨다. 그의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를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 10:12). 그러므로 “저회 죄와 저회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히 10:16)라고 죄에서 자유하게 하셨다.
의인의 회개는 죄에서 이미 구원받은 자유인의 회개이므로 이미 내 죄를 사하여 주신 전제하에서 내 죄를 하나님께 고백함으로 다윗과 같이 용서받은 기쁨과 자유와 평강과 감사가 주어지며 찬양으로 화답하게 된다. 의인의 회개는 자신의 죄를 자백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과 은혜가 나를 넘치도록 감싸주심으로 내 영이 죄를 싫어하며 미워하며, "주님을 기쁘시게 할 일이 무엇인지 살펴보며"(엡 5:10), 의인에 합당한 믿음과 사랑과 성령의 열매를 추구하게 된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의의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말미암아 자신의 모든 죄가 이미 사하여졌음을 감사하며, 죄에서 돌아서서 그리스도 생명과 빛 안에 거하는 의인의 회개로 그분의 십자가 공로의 복음을 찬송하며 자유하며 기뻐하며 감사하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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