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으로 읽는 아버지의 마음

[1] 믿음이란? 믿음의 본질 / 하나님의 열심으로 은혜를 입은 아브라함의 믿음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2025. 5. 10. 01:02

믿음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생명을 잉태하는 진리이다. 인간의 의지나 노력으로 될 것이라고 믿는 희망 사항이 아니다. 한마디로 믿음과 영생은 하나님을 아는 일이며(요 17:3), 구원과 생명이 은혜로 입혀지는 실상을 믿는 일이다. 믿음은 자신의 정체성을 아는 것부터 시작된다. 믿음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과 스스로 자신을 죄에서 구원할 수 없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이며, 내가 받아야 할 저주와 죽음을 예수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나를 죄에서 구원하여 영원한 생명을 입혀주신 은혜를 깨닫는 일이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은, 창세전 이미 택함을 받아 ‘믿음’이라는 의의 씨앗을 심어주셨기 때문에 그분의 믿음으로 나는 구원을 받았고 그분의 은혜로 생명을 선물로 받았다. “너회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회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8).

예를 들면, 장님은 자신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장님’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인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앞을 못 보는 장님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자신을 안내자에게 맡길 수가 있다. 비록 장님은 보지는 못하지만 안내자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음으로 자신을 잘 인도하리라는 믿음으로 자신을 맡기게 된다. 하지만 그를 안내하는 안내자는 그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는 목자가 될수 있고, 반대로 그를 구덩이에 빠뜨려 죽게하는 악한 마귀로 나타날수가 있다. 장남은 아무것도 보지 못함으로 분별할수가 없다. 무조건 자신을 안내자에게 맡기는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장님은 안내자를 선택할수가 없다.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하여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여 믿음을 주시기 때문에 믿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비록 하나님을 볼 수도 알 수도 없지만, 하나님의 믿음에 근거하여 자신을 영의 안내자이신 성령님에게 맡기며 그분의 인도에 순종하여 천국에 들어가는 실상을 소유하게 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신뢰하고 어머니 말대로 따라 하는 것은 어머니가 자신을 낳았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확신과 자신을 맡길 수 있는 유일한 안내자라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택한 백성에게 이미 ‘믿음’이라는 열쇠를 손에 쥐여 주셨다. 예를 들면,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는데 누구든지 열수만 있다면 들어갈 수 있다고 하자. 많은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하여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한다. 밀어도 보고 부셔도 보고 연구도 해 보고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봤지만 워낙 튼튼하여 사람의 힘과 방법으로는 열수가 없다. 그런데 어떤 이가 열쇠를 가지고 있으며 그는 아무런 수고도 없이 즉각 열쇠를 꼽아 열고 들어갔다. 그 열쇠가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시다. 단번에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열쇠가 바로 예수를 소유하는 믿음이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 모든 것을 다 동원하여도 내 몸을 받쳐 하나님을 섬긴다 하여도 천국에는 들어갈 수 없다. 비록 육신의 노력과 행위로 육신이 사는 동안 보응은 받을지 모르겠지만 구원은 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라고 예수님은 선포하셨기에, "하늘 아래에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다른 이름이 인간에게 주어진 일이 없기 때문이다"(행 4:12).

예수님이 말씀하신 빛과 소금의 비유에서(마 5:13-16), 율법의 관념에서 보면, 우리는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하여 의로운 행위와 열심을 강조하게 된다. 하지만 복음의 차원에서 보면, 우리는 이미 빛과 소금이 되어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바로 생명의 빛이며, 언약의 소금이기 때문이다. 예수 생명 안에 있는 자는 이 세상 어둠에서 구원받은 ‘빛’ 이요, 은혜로 말미암아 영원히 변치 않는 생명으로 잉태된 ‘소금’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우리에게 빛과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 (마 5:13-16)라고 선포하셨다. 노력과 행위로 빛이 되는 것이 아니라, 빛과 소금이신 예수 생명 안에서 한 몸이 되었기에 당연히 빛이고 소금이다. 가지가 뿌리 되신 포도나무에 붙어있기만 하면 열매는 그분이 맺게 하시는 것과 같이 예수 생명 안에 있으면 그분이 나를 통하여 세상에 예수의 빛을 나타내게 하시며 복음을 전파하는 소금의 역할을 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은혜를 입혀주셔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그분이 주셨기에 그 믿음은 의로운 것이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롬 4: 5). 즉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기에 의로운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일방적으로 베풀어주시는 은혜와 사랑을 입어 구원을 선물로 받으라고 믿음이라는 수용적인 방법을 주셨다. 그러므로 믿음은 아주 간단하다. 하나님을 아는 일이며,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이룬 구원의 사랑을 깨닫고 나에게 베푸시는 은혜를 받아들이는 믿음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말씀하여 주셨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 6:29),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 17:3). 믿음은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일이며,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믿음으로 영생을 얻게됨을 제시하셨다.

바울이 말하기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롬 1:17). 즉 하나님의 의가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져내는 구원을 성취하셨고, 그 십자가 구원을 믿는 믿음을 주시며: "믿음으로", 그분이 주신 "믿음으로" 우리가 믿게됨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함과 같이 반드시 구원에 이르는 생명을 낳게 됨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복음의 핵심을 제시한다. 그리하여 바울은 구원과 믿음을 "선물이다"(엡 2:8)고 선언한다. 이와 같이 구원은 하나님이 인간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생명을 조건과 대가 없이 오직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하는 '은혜의 선물'이다. 이 은혜의 선물을 행위와 노력으로 받지 못하도록 '믿음'이라는 수용적인 방법을 주셨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9). 믿음은 모든 자랑과 행위를 배제하는 오직 순수한 은혜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피동적인 행위를 말한다. 그러므로 믿음은 나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은혜로 주신 선물이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핍박하고 교회를 박해하는 난폭한 자로부터 복음의 선구자로 전환된 것은 완전히 하나님의 믿음과 은혜 때문이다. 예수님이 먼저 바울을 찾아와 주셔서 “사울아, 사울아” 하고 그의 이름을 불러 영의 눈을 열어주었기에, 바울은 비로소 자신이 핍박한 예수가 바로 자신이 좇는 진리임을 깨닫게 된다. 바울은 은혜가 무엇이며 복음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자로부터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복음을 받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예수에게 붙들린 위대한 사도가 된 것이다. 하나님을 거슬러 예수를 핍박하던 바울에게 어찌 의가 있으며 믿음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위대한 사도가 된 바울은 오직 하나님의 믿음으로 하나님이 빚어낸 작품이다.

이와 같이 내가 먼저 믿어서 구원이 나에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먼저 나를 찾아와 주시고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어 나의 손을 잡고 한걸음 한걸음 믿음으로 이끌어주셨기에 그분의 믿음으로 은혜를 입어 의로운 자로 여기심을 받은 것임을 아브라함의 믿음에서 역력히 읽을수 있다. “일을 하니 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5), 즉 의롭다 함은 행위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믿음으로 불의한 자가 의로운 자로 여겨짐을 받았다는 말씀이다.

믿음의 본질

믿음은 우리의 의지와 노력과 열심을 동원하여 능력으로 발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자신의 무력함과 티끌의 존재임을 인정하는 자기부인과 자기죽음으로 내려가는 항복과 순종이며, 그 없음의 자리에 하나님의 믿음만이 발휘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의 주’ (히 12:2)라고 부르는 것은, 그분이 자신을 완전히 비우시는 자기부인으로 내려가 오직 어버지의 뜻과 의만을 담고 그분이 하시라는 말만 하시고 하시라는 일만 하시는 순종으로 내려가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신 십자가 죽음이다(요 4:34, 5:30, 17:4). 즉 믿음은 능력을 얻어서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하나님의 믿음에 이끌려 자기부인과 자기죽음의 십자가 삶을 살아냄으로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의'만을 나타내는 '없음'의 자로 내려가는 삶이다.

예수님은 믿음의 본질을 ‘겨자씨 한알’의 믿음으로 표현하셨다. 즉 너회에게 요구되는 것은 태산과 같은 무엇인가를 할수 있다는 능력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겨자씨와 같은 없음의 존재로 내려가 오직 하나님의 믿음으로 이끌려감을 의미한다. 그렇게 겨자씨와 같은 없음의 자리로 내려갈 때 하나님의 믿음으로 너희 안에 견고하게 쌓여있는 ‘자아’ 라는 산이 바다에 던져지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말씀이다.

오늘날 우리는 믿음의 본질을 잘 못 인식하고 믿음을 나의 소유로 내가 발휘하는 것으로 열심을 부린다. 하지만 믿음은 우리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이 폭로될 때, 내가 철저히 부인될때, 비로소 하나님의 믿음이 발휘되는 능력이 나타난다. 히브리서 11장 믿음 장에서 나열된 믿음의 조상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의 믿음과 열심에 의해 믿음의 작품들이 되었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의 믿음으로 이끌려가는 인생을 살아낸 자들이었기에 그들에게서 나온 행함을 믿음으로 여겨주시고 그 믿음을 의로 여겨주셨다(히11: 7-24). 모두가 하나님의 믿음에 이끌려서 자기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그들의 삶에 개입하셔서 그들의 삶을 친히 주관하여 주셨기에 믿음의 작품이 된 것이다.

하나님은 창세전 정하신 뜻과 섭리로 당신의 믿음으로 역사를 주관하신다. 그러므로 그분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믿음은 무엇인가를 발휘하여 능력을 나타내는 태산같은 큰 믿음이 아니다. 반대로 철저하게 자기를 부인하는 죽음으로 썩어서 없어지는 ‘겨자씨’ 한알의 믿음을 원하심을 예수님은 한알의 밀이 땅속에 썩어서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셨다(요 12:24). 내가 죽음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셔서 우리를 생명을 잉태하는 믿음으로 끌고가시며, 결코 당신에게 속한 믿음의 작품으로 만들어 내신다. 예수님께서 자기부인의 십자가 삶을 사셨듯이 우리 자신을 완전히 비우는 자기부인의 십자가 삶을 날마다 살아가게 되는(눅 9:23) 성도의 지향성을 제시하셨다. 오직 한 알의 밀과 같이 자기 부인으로 자기 죽음으로 내려가는 "겨자씨 한 알의 믿음"이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나타냄으로 "너희가 못할 것이 없다"(마 17:20)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열심으로 은혜를 입은 아브라함의 믿음

아브라함이 믿음의 아버지로 세워진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믿음이며, 아브라함 자신이 먼저 하나님을 알고 믿어서, 스스로 거룩한 생활과 의로운 일들을 하여서가 아니다. 아브라함이 아직 하나님을 알지도 못할 때, 하나님이 먼저 아브라함을 찾아가서 불러내심으로 아브라함의 인생은 하나님의 ‘믿음’으로 출발한 것이다. 그리하여 성경은 하나님의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본토를 떠났다”고 말한다. 믿음으로 시작한 주권자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께 떠밀려서 고향을 떠나 떠돌이 하는 고생길에 들어선 것이다. 그가 먼저 하나님을 알고 원해서 하나님을 믿고 고향을 떠난 것이 아니라, 피동적으로 처음부터 하나님의 주권으로 떠밀려 사는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하나님은 안락하게 사는 아브라함에게 부모와 형제, 친척과 친구라는 모든 인간과 사회관계를 끊게 함으로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먼저 안일한 고향에서 끄집어내는 일부터 시작하셨다.

고향을 떠난 아브라함은 의지할 곳 없이 외로운 떠돌이 삶이 시작되었고, 세상 사람과 똑같이 먹고 사는 일로 벅찬 인생을 산 것이다. 그에게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복된 환경을 주신 것도 아니고, 또한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인가 해야 하는 일로 고민을 주거나 부담을 주는 일도 없었다. 다만 세상 사람과 똑같이 일상생활에서 평범한 인생에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떠돌이 삶이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열심으로 크고 작은 하나하나의 사건과 환경 속에서 점차적으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이루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심을 알아가게 되고, 하나님과의 사귐을 통하여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수 없음을 깨닫게 됨으로 비로소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가지게 된다. 아브라함은 실수도 하고 유혹에 빠지기도 하고 시련도 겪고 고생도 하며, 그 험난한 환경 속에서 하나님을 알아가고 뜻을 깨닫는데 백 살이 넘는 세월이 흐르게 된다. 하지만 그 지극히 평범한 생활과 풍파 속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 자신도 알 수 없는 인류 구원 역사의 기초를 닦아 가시며 창세전 뜻하신 구원 계획을 이루어 가신다.

처음에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별과 같이 모래알같이 자손을 주시겠다는 약속이 너무나 추상적이었고 전혀 믿기지 않는 일이었지만, 더디어 백 살이 넘어서야 독생자 이삭을 가지게 됨으로 신실한 하나님을 믿고 약속을 붙들게 된다. 그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고 나서야 하나님의 마음을 읽게 되었고, 하나님은 언약을 이루시는 분으로 신뢰하게 됨으로 자신에게 아들을 받치라는 그분의 뜻을 헤아리게 되는 믿음의 절정까지 도달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히 11: 19) 믿고 이삭을 받칠 수가 있었다. 아브라함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열심과 열정으로 만들어지고 빚어진 믿음의 작품이다. 그러므로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전 15:10) 바울은 고백하고 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생애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얼마나 열심히 일을 하시는가를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