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으로 읽는 아버지의 마음

은혜란 ? 죄인은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살리라: 행위는 은혜를 망령되게 하는 악한 일이다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2025. 5. 9. 21:06

은혜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은혜는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속한 자들을 이 세상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생명을 입혀주시는 자발적인 사랑의 열정이시다. 즉 내가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나를 당신의 자녀로 택하셨다는 그 이유 하나로 나를 이 세상 죄와 죽음의 멸망에서 건져내어 당신의 품에 넣어서 새로운 생명으로 잉태시켜 영원히 당신과 하나로 연합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시며 선이시다. 때문에 구원과 생명은 아무런 대가도 조건도 인간의 그 어떤 요소도 끼어들 수 없는 오직 무상으로 택함을 받은 자에게만 입혀주시는 선물이다. 이르기를,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엡 2:5).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

우리는 죄인으로 타고난 본능 때문에 끝없이 하나님을 배척하고 반항하며 대적한다. 처음부터 티끌로 만들어진 '없음'과 같은 존재이다. 때문에 그분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시며, 오직 아가페 사랑이라는 은혜를 입혀주어서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생명을 주시는 일이 그분의 행사이며, 이는 창세전에 하늘나라에서 이미 이루신 선한 뜻이다. 때문에 그분은 인간의 반항도 대적도 전혀 개의치 아니하시고 끝까지 당신의 선한 뜻대로 우리를 구원하시며 당신의 은혜를 입혀 당신의 자녀로 잉태시키시는 완성으로 강권적으로 끌고 가신다. 이는 하나님 홀로 정하신 뜻이며, 성취하신 뜻이며, 무상으로 우리에게 입혀주시는 은혜로 완성하시기에 인간의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의로운 사역에 끼어들 수가 없다.

예를 들면, 광활한 우주에서 보면 지구의 존재가치는 먼지와 같다고 한다.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는 바로 티끌의 존재이다. 그분이 우리를 귀히 여겨주셔서 은혜를 입혀주셨기에 하나님의 생명력으로 산 자가 된 것이며 자녀의 신분으로 하늘의 존재가 된 것이다. 영생을 선물로 받은 것이다. 티끌의 존재에서 무슨 선이 나오며 하나님께서 받을만한 가치가 어찌 나올 수 있겠는가. 티끌이 아무리 반항하고 대적해도 하늘을 움지일수 없듯이 하나님의 뜻에 영향을 줄 수가 없으며 또한 하나님의 일에 보탬이 될 수도 없다. 개미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하여 문명을 발달시키고 최고급화로 위대한 업적들을 이룬다고 하여도 인간들 눈에는 빨리 치워버려야할 쓰레기와 같은 존재이다.

그럼에도 티끌에 불과한 개미와 방불한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서 공로와 업적을 논하고, 보좌를 흔드는 기도, 하나님의 뜻을 되돌리는 간청기도를 벌인다면 얼마나 웃기는 어리석은 일인가. 자신의 주제 파악을 하지 못하고 간청으로 금식기도로 새벽 작정 기도와 같은 강력한 기도 발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 이 세상 물질적 육적 축복을 받았다고 간증 거리들을 쏘다 내놓는 것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미혹의 영들이 역사하는 미끼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거짓 선지자들의 기적과 능력 행함에 미혹되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마 7:22-23 --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24:24 --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인간은 오직 자아에만 굶주린 자들이기에 하나님을 알지 못함으로 하나님이 원하는 일을 할 수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도 없는 패역한 존재로 타고났다. 그래서 바울은 인간의 타락한 마음을 열린 무덤으로 묘사하였고, 이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라고 선언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기”(롬 3:13-18, 사 59: 3-15) 때문이다. 자신들이 토해내는 악한 죄악으로 인하여 죽음의 지옥에 치닫고 있음에도 하나님을 찾지도 않거니와 살려 달라고 구하지도 아니하며, 방치된 존비처럼 살아가고 있다.

이와 같은 패역한 자들을 죄와 죽음에서 다시 살려내기 위해 그분은 자신의 거룩함을 초월하여 사랑의 무궁한 힘으로 하늘이 땅을 덮음같이 은혜로 우리를 감싸주시는 사랑을 구원하여 주셨다. 내가 아직 죄인으로 죽음에 처해 있을 때 그분이 먼저 나를 찾아와 주셔서 나의 손을 잡고 구원으로 이끌어 주셨기에 죽음에서 살아난 것이다. 예를 들어 한 살인 강도가 있다고 하자. 그 강도는 자신의 죄로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런데 어떤 의인이 그 살인강도를 살리기 위해 자신이 사형 죄를 뒤집어 쓰고 그 살인 강도는 그 의인이 대신 자신의 죄를 감당하여 주심으로 이내 풀려나 자유인이 되었다. 이르기를, 그리스도께서 “의인으로 불의 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벧전 3:18). 이것이 은혜이며 복음이다.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조건과 자격은 바로 우리가 죄인이라는 데 있다. 나는 비록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지만, 그분이 나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기에 그분의 의로운 피의 공로와 풍성한 은혜로 나의 모든 죄가 사하여 졌으며, 그분이 자신의 죄 없는 의의 생명으로 나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셨기에 새로운 피조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다.

그분은 자신의 의로운 죽음으로 우리를 율법의 정죄와 심판에서 속량하셨고 죽음의 지옥에서 구원하여 주셨다. 자신의 생명을 지불한 구원이기에 절대로 우리를 포기할 수 없다. 그분은 자신의 소유였던 우리를 되찾기 위하여 인간의 육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우리를 찾아와 주셨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으로 우리의 죗값을 지불하시고, 다시는 분리될 수 없는 영원한 하나로 연합을 이루시기 위해 자신의 영으로 우리를 새롭게 잉태시켜 영생을 입혀주셨다. 이것이 은혜이다.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조건과 자격은 바로 우리가 죄인이라는 데 있다. 그러므로 “내가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라”(고전 15:10)고 외칠 수밖에 없다. 그분이 먼저 나를 찾아와 주셔서 나의 손을 이끌어 그분의 품에 안겨 주셨기에 그분의 사랑과 은혜로 구원받은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수 없으니” (요 6:44)라고 말씀하심으로 구원과 생명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입혀지는 창세전 하나님께서 정하신 선한 뜻이다.

나 같은 죄인을 택하여 죽음에서 살리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아들이라 칭하여 주신다면, 나는 그분의 마음에 얼마나 귀한 존재이며, 은혜를 입혀주신 하나님은 나에게 얼마나 과분한 은인인가! 천하를 주관하시고 나를 그토록 사랑하여 생명까지 은혜로 주신 그분에게 또 무엇이 더 필요하여 이 세상 배설물들을 구하는 금식 기도 새벽 기도 작정 기도 같은 강청들이 나올 수가 있단 말인가!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셔서 하나로 함께 하는 은혜를 입은 자가 또한 어찌 계속 죄에 거하겠는가.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을 깨달아 은혜 속에 거하는 자는 그 은혜에 너무나 감격하여 죄를 떠나 하나님의 의와 뜻을 추구하는 자로 이끌려가게 되며, 바울처럼 하늘에 소망을 두고 오직 예수 생명의 복음에 모든 것을 거는 자로 서게 된다.

죄인은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살리라

어린 아이들이 사과를 따 먹기 위해 사과나무를 향하여 돌을 던져 사과가 떨어지면 너무나 행복하게 그 사과를 맛보는 모습을 볼수 있다. 사과나무는 사과가 달렸다는 이유 하나로 돌에 맞는다. 돌에 맞은 사과는 오히려 돌을 던진 아이들에게 자신을 떨어뜨려 먹게 한다. 우리가 바로 생명나무이신 그분에게 끝없이 돌을 던지는 어린애들이다. 우리는 항상 그분께 돌을 던지는 일만 한다. 하지만 그분은 개의치 않으시고 오히려 돌을 던지는 우리를 사랑하사 아낌없이 자신을 먹으라고 우리에게 내어 주신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요 6:56). 이와 같이 주님은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주면서 자신의 살을 먹게 하고 피를 마셔 영생을 입혀주셨다. 은혜는 본래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자가 하나님의 선택과 긍휼을 입에 하나님의 자녀로 칭하여 주심으로 하나님과 하나로 연합되는 사랑의 기적이다.

예수님은 혼인잔치 비유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선물로 임함을 설명하셨다.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된 자들은 아무런 준비가 없었던 전혀 예상치 않았던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이었다.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마 22: 10). 그들이 악하게 살던 착하게 살던 어떤 신분으로 살던 상관없이 임금님의 부르심에 호응하여 즉각 따라온 자들이었다. 부르심에 따라 잔치에 들어온 자들은 갑작스러운 일이기에 아무것도 준비한 것이 없다. 모든 것은 임금님이 이미 준비하셨기에 이끄시는 손만 잡고 따라가기만 하면 영광스러운 혼인 잔치에 참여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은혜의 초청이다. 자격이 있어서도 아니고, 내가 예복을 준비하는 것도 아니다. 죄인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다만 그 부르심을 알아듣고 따라가기만 하면 예복도, 포도주도, 음식도 모두 준비가 되어있는 영광스러운 임금의 상을 받게 된다. 이는 내가 준비해야 할 부담도, 예의를 갖추어야 할 예복도, 신분도 걱정 없는 자유로운 기쁨이 충만한 혼인 잔치이다. 임금님이 호의로 베풀어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다.

은혜는 오직 그분이 원해서 자발적으로 베풀어주시는 선물이기에 그 은혜를 받는 대상이 의가 있든 없든, 일을 하든 안 하던, 경건하든 안 하던 상관이 없다. 내가 믿고 따르는 그분만 의로 우시면 되고, 그분만 영원하시면 되며, 그분만 나를 품어주시면 된다. 그분은 창세전에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를 영화롭게 하시고 믿음을 주셔서 구원을 선물로 주시기로 정하셨고 성취하셨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선물은 내 의지와 뜻과 행위의 노력과 상관없이 무상으로 얻어지는 기쁜 일이다. 이는 인간에서 난 산물이 아니기 때문에 신학적 교리와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다. 오직 성령님이 주시는 계시 속에서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라고 바울과 같은 고백이 터져 나오게 된다.

문둥병 환자가 온몸이 다 썩어서 눈도 코도 빠지고 손가락도 떨어진 상태에서 몸에서는 고름과 썩은 냄새로 도저히 인간으로 볼 수가 없다. 그런 문둥병 환자에게 무슨 의가 있으며 행위가 나오겠는가? 죽음에 처해있는 그에게 누가 가까이 다가가며 누가 그를 죽음에서 살릴 수가 있겠는가? 우리가 바로 문둥병 환자처럼 죄로 썩어 들어가고 있음에도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죽은 자와 방불한 자들이다. 겉모습은 멀쩡하다 할지라도 우리의 마음은 “열린 무덤”과 같이 썩고 더러운 뼈다귀처럼 도저히 온전하다고 말할 수가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문둥병인 우리를 돌아보시고 끌어안고 자신의 의의 생명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게 하시고, 자신의 찬란한 의의 옷으로 우리를 덮어주시며 아들이라 칭하시고 천국으로 인도하신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오직 냄새나고 썩어빠진 죄뿐이다. 그분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의 더러운 죄가 제어되고, 의의 옷을 입혀주심으로 은혜로 말미암아 의인이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은혜이며 죄인은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살아난 것이다. 구원의 은혜는 하나님이 경건치 아니한 죄인을 사랑하는 증표이며 영원한 속성이다. 이는 우리에게 조건 없이, 값없이 거저 주시는 은총이다. 즉 하나님의 선하심과 의로우심, 사랑과 긍휼의 속성에 근거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하여주시고 아버지의 자녀로 화합하는 영원한 구원을 제공하시는 선물이다.

행위는 은혜를 망령되게 하는 악한 일이다

죄인에게서 나오는 행위와 공로는 하나님의 의로운 구원에 죄를 덧붙이는 격이 되기 때문에 처음부터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오직 은혜로 구원을 성립하시고 성취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의지와 행위로 구원을 얻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이 입혀주시는 은혜를 망령되게 하는 악한 자이며, 왕이 차려준 은혜로운 잔칫상에 재를 뿌리는 격이 되며 사할 길이 없다.

사도 바울의 예를 들어보자. 사울이 바울로 불리기 전에 자신을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의로운 자로 자고 하였고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는 일에 집착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욕되게 하였다. 그러나 부활의 예수를 만나 새 사람으로 거듭나자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임을 깨닫게 되었고, 그가 집착한 율법의 의 즉 행위의 의는 그를 의롭게 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진리이신 예수그리스도를 핍박하고 대적하고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 사신 교회를 박해하는 원수가 된 것이다. 이런 바울을 어떻게 의롭다고 할 수 있으며, 이런 괴수를 어떻게 복음의 선구자로 쓰실 수가 있단 말인가. 이는 오직 하나님이 먼저 그를 찾아가 주셔서 은혜를 입혀주셨기에 그의 범죄가 용서되고, 옛 죄인을 벗고,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 복음의 선구자가 된 것이다. 바울 자신의 고백처럼 사울이 바울이 되어 완전히 예수에게 잡힌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강권적인 은혜와 믿음이다.

은혜는 이와같이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철저한 죄인을 오직 궁휼과 자비와 인내를 베풀어 주시는 불가항력적 일방적인 사랑이다. 인간의 그 어떤 것도 원하지 않는 자발적인 사랑과 열정이시다. 만약 인간의 노력과 행위로 얻어진다면 그것은 은혜라고 말할 수 없으며, 만약 구원이 인간의 행위적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합작품이라 한다면, 그 구원에는 죄인의 악이 섞어있기에 영생하는 생명을 잉태할 수가 없다. 이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에 (롬 3:10) 처음부터 인간이 하나님 앞에 의롭지 못함으로, 끊임없이 죄를 짓게 됨으로 그 죄를 죽이기 위해 육신의 죽음을 선포하셨다. "허물과 죄로 죽은"(엡 시체에서 무슨 의가 나오고 선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 그리하여 하나님은 인간을 ‘진토’ ‘거름더미’(삼상2:8)라 부르셨다.

‘거름 더미’에서 건지심을 받은 우리는 오직 그분이 입혀주시는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롬 3:24) 들이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 더미에서 올리사”(삼상 2:8)함과 같다. 귀신 들린 자의 이야기를 보자. 수천에 달하는 군대 귀신이 들린 자가 어찌 자신의 힘으로 그 많은 귀신들을 쫓아낼 수 있겠는가? 귀신들린 자에게 어찌 율법의 행위가 필요하며 어찌 자신을 의롭게 할 수가 있겠는가? 오직 능력의 하나님만이 할 수 있나니 그를 “불쌍히 여기는”(막 5:19) 궁휼로 귀신을 쫓아내 주었기에 하나님의 은혜로 사단의 노예에서 해방 받아 자유인이 된 것이다. 우리가 죄에서 구원받은 것은 전적으로 그분의 택하심과 부르심과 이끌어내심과 붙드심과 인도하심의 은혜이다. 다윗이 이 놀라운 은혜를 찬송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시 18:2). 은혜는 위에서부터 밑으로 베풀어주시는 아무런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사랑이다.

우리는 모태에서부터 잉태된 죄인이기에(시 51:5), 우리에게는 자신의 행위를 정결케 하는 기능도 능력도 없다. 우리 본마음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이 부패”(렘 17:9) 함으로 우리 안에는 열린 무덤과 같아서 죄만 생산해내는 ‘거름 더미’와 같은 존재이다. 죄인답게 사는 것이 세상인의 본색이다.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함에 있어서 조건이나 대가나 행위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분만 완벽하고 거룩하시면, 우리가 그 어떤 죄를 졌던 상관없이 다만 그분의 거룩한 빛 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우리는 그분의 의의 빛과 생명을 입어 의인이 되며 아들이 되며 영화로운 신부가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기적적인 은혜가 또 어디에 있겠는가? 우리는 다만 그 놀라운 은혜에 찬양과 영광을 드릴뿐이다. 다윗과 같이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 18:1)라고 매일, 매순간 숨을 쉴때마다 그분이 나와 함께 하심을 고백하는 삶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바울은 서신마다 ‘하나님의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 찌어다’라고 찬양하고 있으며, 주안에서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롬 1:7, 고전 1:3, 고후 1:2, 갈 1:3.....) 라고 나를 그토록 사랑하셔서 자신의 전부를 주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평강과 감사와 기쁨을 누리기를 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