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합니다.
많은 분들이 로마서 5:3-5 의 말씀을 방문하여 읽으셨기에, 환난 속에서 힘겨운 나날들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갈망하며 그 속에서 답을 찾기를 원하시는 그 갈급한 심정과 애통과 갈등을 조금이나마 헤아리기 위해 다시 새롭게 이 글을 씁니다. 조금이나마 하나님의 위로와 뜻을 깨닫는 귀함 믿음을 가지기를 진실히 원하고 또 원합니다.
롬 5:3-5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바울이 말하는 ‘환난’이란? 과연 성화란 가능한 것인가?
성도의 두 정체성:
바울이 말하는 환난은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겪는 인생살이와 같은 고생과 고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택함을 받은 사랑하는 성도에게만 소망이 이루어지는 환난이다. 즉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광의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는 하나님의 후사가 되는(고후 3:18, 고전 15:50) 그 영광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환난이며, 그 소망을 바라보는 믿음으로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고 말한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두 가지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간다. 육신은 이 세상에 속해 있지만, 우리의 영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에게 속한 ‘그리스도인’, ‘성도’라는 신분으로 살아간다. 우리는 이 세상 죄악 속에서 살아가지만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구별된 하늘에 속한 자들이며, 하늘나라의 원리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구별되는 삶으로 이끌려가기 때문에 성도의 삶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걸으시고, 우리 믿음의 선지들이 걸으신 발자취를 좇아 환난일 수밖에 없음을 제시한다.
바울은 에베소와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할 때, 성도의 두 가지 정체성을 언급한다.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1) 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2)”(엡1:1).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골 1:2). 육신은 에베소라는, 골로새라는 지역에 속한 자들이지만(1), 영혼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힌 자들”, 즉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속한 신실한 성도(2)이며, 그 삶은 이 세상에서 분리된 삶이 아니라 구별된 삶이라는 현실을 확실히 밝혀준다. ‘성도’라고 불리는 것은, 영적으로 이미 모든 신령한 복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온갖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엡 1:3 세번역). 하늘나라의 모든 신령한 복을 이미 받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잠시 육신으로 겪는 환난은 반드시 영광의 소망이 이루어짐으로 즐거움이 된다고 역설로 말한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성도만 그 영광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환난과 고통과 곤고의 연단을 부끄럽게 여기지 아니하며,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이며, 이는 하나님의 믿음이 성도를 굳게 붙들어 주시기 때문이며, 그 믿음이 우리를 인내와 연단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의 형상으로 변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는(고후 3:18) 소망을 이루어 주신다고 확신한다. 그러므로
성도는 영적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나라 모든 신령한 복을 받은 자”(엡 1:3),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은 자”(엡 1:4)라는 하늘나라 신분을 가진 이 세상과 구별된 자들이다. 그 놀라운 택하심은 창세전에, 이직 아무것도 창조하시기도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영원한 택함이다. 우리를 택하신 이유는 오직 하나, 사랑이시며 (요 3:16), 그 사랑은 조건이나 사랑받을 이유와 원인이 있어서가 아니라, 아직 만물이 창조되기도 전에 나를 사랑의 대상으로 택하셨고, 당신의 선한 목적과 의도인 하늘나라 모든 신령한 복을 내려주시기 위함이며 이미 주셨음을 바울은 에베소서 1:3-14에서 상세히 말해주고 있다. 즉 삼위 일체 하나님께서 무궁무진한 모든 능력과 지혜와 사랑을 아낌없이 풍성히 넘치게 쏟아 부어주셔서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함이다고 말한다.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1-12). 이르기를,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심을 받아 의롭게 되었고 영화롭게 되었음으로 그 영광에 합당한 하늘나라 소망을 이루기 위해 잠시 환난을 허락하셨다면 어찌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지 않을 수가 있으며, 어찌 영광의 소망이 이루어짐을 기뻐하지 않을 수가 있으며, 어찌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가 있으며, 어찌 놀라운 은혜와 사랑에 감사치 않을 수가 있겠는가! 바울의 삶 자체가 바로 환난이며, 또한 찬송과 감사와 기쁨의 삶으로 성도의 두 정체성을 확실히 보여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그리스도의 신실한 종’임을 증명하였다.
육신으로는, 이 세상 죄악에 속하여 있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 죄이고, 들리는 것이 죄이며, 생각하는것, 말하는것, 행하는것, 인간 자체가 열린 무덤이다고 표현한다(롬 3:13).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함으로 선을 행하는 것은 없다’(롬7:18). 내 육신을 죄의 종으로 지배하던 악한 죄가 항상 내 마음 문에 도사리고 앉아 기회를 잡아 죄에 굴복하도록 끌어내리기 때문에 바울은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롬 7:23)라고 그 육신의 연약함과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탄식한다. 수시로 넘어지고 실수하고 패배하는 육신을 바라보면서 거듭난 성도라고 할지라도, 내 육신 속에는 영을 지배하는 생명의 법과 육을 지배하는 죄의 법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다.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롬 7:21). 성도는 자신의 육신의 연약함과 끝없는 패배와 절망과 같은 환난과 곤고함을 비참히 체험하게 됨으로, 더는 자신의 육신을 신뢰하지 않게 되며, 오로지 그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하여 주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의와 은혜만을 꼭 붙들고 매일 부어주시는 은혜로 살아가게 된다.
환난과 인내와 연단은 과연 의인이 되는 ‘성화’를 말하는 것일까?
‘성화’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화란 단어는 신약에서 직접 사용된 구절은 없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죄를 멀리하며 거룩한 삶을 살도록 율법으로 명하셨다(출 22:16~31절). 성경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성도에게 죄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더럽히지 않도록 이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목표로 삼기를 요구하신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한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하셨느니라”(벧전 1:14-16). 성도가 죄를 떠나 자신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려야하는 그 이유가 바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레 11:44-45)이다. 하지만 점도 흠도 없는 완전한 거룩(성화)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원리와 기준으로 거룩하게 해 주심으로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일이다. 이를 바울은 하나님의 뜻은 우리 성도의 거룩함이며, 우리를 더러운 죄 속에서 불러내신 이유는 구별된 백성으로 영화롭게 하는 우리의 거룩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9-30).
우리의 본 상태는 ‘죄와 허물로 죽었다’(엡 2:1). 그런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의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일컬음을 받아 의인이 된 것이다(롬 5:1).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를 통한 구원의 의는 완전하며 영원하다. 이는 창세전부터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무궁무진한 능력과, 모든 지혜와, 풍성한 은혜와, 아가페 사랑을 동원하여 계획하시고 묵시로 성취하신 변할 수 없는 영원한 구원이기에, 그 구원을 받은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함몰되어 거룩함(성화)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성경은 성도를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우심을 받은 새 사람’(엡 4:24), 온전한 사람(고전 2:6),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흠이 없는 사람(엡 5:27), 성령으로 난 사람(요 3:8)이라고 부른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하심을 얻었느니라”(고전 6:11). 이와 같이 성화는 우리의 마음과 뜻과 의지와 행위로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의 의를 믿는 믿음으로 전적으로 불가항력적 은혜로 성령의 거듭남으로 단번에 성취된 단회적이며 확정적인 것이다. 때문에 성도는 창세전 택하심, 부르심, 중생, 칭의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롬 3:24) 성화된 자들이다.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하지만, 성도는 이 세상에서 두 가지 정체성, 영적으로는 위에서 난 하늘에 속한 거룩한 백성, 온전한 의인이지만, 육신으로는 이 세상에서 죄인인 상태의 모습으로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죄를 원함으로 바울은 이를 ‘육체의 소욕’, ‘죄의 법’이라고 말하며, 내 안에서 나와 함께 공존하고 있기 때문에, 육체의 소욕이 성령의 속사람을 대적하는 싸움을 겪게 된다고 확실히 말해 주고 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롬7:18). 그러므로 성도는 육신으로 성화에 이룰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육신의 연약함과 패배와 절망을 경험하면서 더는 자신의 육신을 신뢰하지 않게 되며, 오로지 그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하여 주시고 나를 성전 삼고 계시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붙으심과 은혜로 살아가며,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떠나서는 단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된다(고전 15:10).
거룩함을 입어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성도는 그 안에 성령님이 내주하고 있음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아 의롭다하심에 합당한 정해진 삶으로 인도 받기 때문에, 자신의 몸을 더럽히는 죄 가운데 더는 거할 수 없음을 인식하고 죄를 미워하며 죄를 멀리하며 죄를 끊어내려는 의자가 발동됨으로 당연히 죄와 싸우는 환난과 곤고 속에서 믿음의 연단을 받게 된다. 내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며 진리의 말씀을 먹음으로 날로 날로 새로워지는 거룩한 (성화) 삶을 추구한다. 하지만 육신은 이 땅에 속한 자이기에 죄로부터 완전히 탈리가 되는 육체의 성화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됨으로, 오직 믿음으로 자신의 정결을 지키기 위한 선한 싸움을 매일 하게 됨으로 우리에게 환난과 곤고와 연단으로 다가오며, 그 환난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는 신실한 성도로 인도를 받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다는 것은, 세상을 향하여 자신이 부인되고, 점차적으로 죽음으로 오로지 예수그리스도의 성품을 나타내는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는 것이다. 육신이 죽지 않는 한 성화란 죄인에게는 적용될 수가 없는 일이다. 오직 의인되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며 살아가며 마지막 부활 때의 완전한 성화를 소망하는 것이다.
역사가 증명하는 성화란?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조상으로부터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민족으로 4000여년의 환난과 시련과 훈련을 겪어왔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의로우시며 선하신 율법이(롬7:12) 주어짐으로 그 율법으로 의롭게 된다고 믿어왔고, 열심히 지켜 행하는 의를 추구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을 지켜 행하여 거룩한 백성으로 성화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율법을 어기고, 율법을 이용하여 육신의 탐심을 채우는 패역한 민족으로 드러난 것이다. 그들은 전지전능하신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터진 웅덩이를 채우는 헛된 백성으로(렘 2:13),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을 우상으로”(롬 1:23) 섬겼으며, 하나님을 멸시하고 원망하고 대적함으로 스스로 진노의 심판을 자초하여 결국 완전히 멸망하여 예루살렘 성전마저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철저히 망하여 나라를 잃고 세상에 흩어져 유리 방랑하는 민족이 된 것이다. 그들처럼 그렇게도 많은 환난과 시련과 징계를 겪은 민족은 없다. 그럼에도 더욱 성숙하고 발전하여 성화에 도달하는 백성으로 변화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마음이 더욱 강퍅하고 목이 굳은 독사가 되어, 그렇게도 소망하고 기다리든 메시아를 자기들의 눈앞에서 보면서도 영접하지 않았고, 오리려 멸시하고 천대하고 핍박하였으며,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그러므로 환난을 인내로 견디어 참고 이긴다하여 성화로 발전하고 성숙하여 의인이 되는 일은 육체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만약에 인간의 행함으로 성화가 가능하고 의인이 되는 것이 가능하였다면, 육신을 죽음으로 정하지 않으셨을 것이고, 발전하고 성숙하는 성화로 의인이 되는 행위와 업적으로, 즉 율법으로 의에 이르고 구원에 이르게 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시작부터 분명하게 반복하여 이 세상 육체로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라고 확실하게 선고하고 있다. 이 땅에서 티끌로 지음을 받은 육체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늘나라의 의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으라고 율법을 주셨으며, 그리하여 율법으로 죄인이라 정죄하시고,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심판을 내려주셨다. 그럼에도 목회자들이 자신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음에도, 강단에서 율법을 강요하며 육적 행위로 성숙하고 발전하고 죄를 다스려서 성화에 이르라는 망령된 설교로 인간의 외식된 의를 강요하고 있다면, 그 자가 바로 바리새인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망령되게 하는 생명을 죽이는 독사가 아니고 무엇인가! 처음부터 인간에게 흙으로 돌아가는 ‘죽음’을 선포하셨다는 것은 육으로는 그 누구도 하나님의 의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며, 그래서 우리를 이 세상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주시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주셨으며, 인간의 육을 입고 오셔서 인간의 모든 죄를 십자가 ‘죽음’으로 도말하시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이 임하는 은혜를 입혀주셨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갈 3: 10-11),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 5:4).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성도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택함을 받았기에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백성으로 지어져가는 신성한 목표가 정해져 있다. 그 거룩한 구별은 반드시 환난으로 시작되며, 바울이 말한 봐야 같이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함과 같다. 이스라엘의 애급의 종살이는 너무나 선명하게 성도에게 왜 환난과 인내가 필요하며, 그 인내와 연단을 통하여 하나님은 반드시 소망을 이루어주심을 상세히 설명하여 주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당신의 거룩한 백성으로 택하시고, 세상 죄악을 상징하는 애급 땅에 집어넣으시고 430년 동안 종살이라는 환난을 겪게 하셨다. 그 기나긴 고된 종살이로 애급인의 학대와 착취와 멸시와 수치와 모욕과 같은 온갖 환난과 고난을 몸으로 받아내면서 얼마나 하나님을 찾았고, 부르짖었고, 수많은 사건들과 일들이 일어났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의 울부짖는 기도에 무려 430년 동안 침묵하셨고 그들 앞에 나타나지 않으셨다. 조상 아브라함과 매일 동행하시면서 모든 일에 관심하시던 하나님께서 당신이 택하시고 당신이 애급에 집어넣으신 이스라엘의 그 쓰라린 노예 생활을 무려 430년 동안 침묵으로 바라보시면서 모든 일에 능하신 전지전능하신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셨고 마치 그들을 잊으시고 버리신 신처럼 성경 그 어디에서도 하나님을 발견할 수가 없다.
성도는 신앙여정에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도 이해될 수도 없는 침묵을 경험하게 된다. 긴 세월동안의 수많은 기도와 울부짖음, 질병에서, 재정의 어려움에서, 관계에서, 좌절과 절망의 환난과 고통 속에서 몸부림칠 때 하나님은 침묵하시며 응답주지 않을 때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는가? 어디에 계시는가? 나의 절박한 상황을 보고 계시는가? 왜 보고만 계시고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 것인가? 나를 버리셨는가? 왜… 어떻게… 이와 같은 수많은 질문들을 해 보지만 이해할 수 없는 침묵으로 실망과 슬픔과 원망과 고독으로 곤고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가 없다. 피조물이 창조주가 하시는 일을 어찌 이해할 수가 있겠는가! 성도의 믿음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을 끝까지 믿는 믿음이며, 하나님의 하시는 모든 일들을 ‘아멘’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완전한 때를 기다리는 믿음뿐이다. 그분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미리 우리의 모든 예정을 계획하셨고, 그 세밀한 계획대로 우리를 인도하시며, 반드시 우리를 위한 영광의 소망을 이루신다. 아브라함이 우리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롬4:18)그 믿음이며,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는”(4:20-21) 그 믿음이었다.
하나님의 침묵이 곧 응답이며 보호하심이며 지키심이다
이스라엘이 애급 땅에 들어가 430년 동안 종살이로 사는 삶은, 아직 일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계획이었으며, 아브라함을 통하여 미리 말씀하여 주셨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400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창 15:13-14).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목적과 의도가 분명하시며, 반드시 약속을 시행하시는 완전한 분이시다. 그 말씀대로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에서 사는 야곱 식구 70명을 애급에 들여보내시면서 말씀하셨다.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비의 하나님이니 애급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급으로 내려가겠고 정녕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다”(창 46:3-4). 가나안에서 살고 있는 야곱을 굳이 애급으로 들여보내신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고,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라는 큰 민족을 이루시는데 있었기에 하나님은 야곱, 곧 이스라엘과 함께 애급으로 내려가 함께 애급에 계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430년 종살이 기간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도 떠나지도 아니하시고 줄곧 그들과 함께 계셨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다”(사 59:1). 하나님은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시며, 단 한 번의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애굽인들을 몰살하여 종살이에서 해방시킬 수 있으신 분이시다. 그럼에도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고 당신의 자녀들의 고통과 울부짖음을 들어 시면서도 인내로 당신의 행할 완벽한 때를 430년 동안 기다리셨다.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나니 인간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그래서 인내하고 끝까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연단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급인의 종으로 430년 동안 살게 하신 것은, 첫째, 이스라엘을 큰 민족으로 완성하시기 위함이며, 둘째, 순수한 혈통을 보존하시기 위함이었다. 만약 애굽인이 이스라엘을 존귀한 민족으로 사랑하였다면, 이스라엘은 애굽인과 혼합되어 혈통의 순수성을 잃었을 것이고,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정체성이 무너졌을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순수한 혈통과 거룩함을 보존하여 주시기 위해, 애굽인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여 이스라엘을 비천한 종으로 만들게 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인의 학대와 멸시와 천대와 환난을 당하게 함으로 섞이지 않은 구별된 민족으로 세워주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가 되자 한 지도자 모세를 다시 애굽으로 돌려보내어 250 만 명의 큰 민족을 이룬 이스라엘을 단 한 번에 애급에서 구출하신 것이다. 이스라엘의 종살이에서의 해방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강권적인 은혜와 능력이었다. 하나님의 일하심과 능력과 은혜가 아니었다면, 이스라엘은 단 한발자국도 애굽의 종살이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완전한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였다. 그리하여 모세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외친 것이다.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3-14).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시 46:10-11). 누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겠으며 그 깊은 뜻과 지혜를 이해할 수가 있겠는가! 이르기를,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망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롬 11: 33-36).
그러므로 내가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다 하여, 죽고 싶은 절망에 처해 있다 하여, 하나님이 긴 세월동안 침묵하신다 하여, 그 어떤 것도 나에게 일어나지 않는다 하여,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 하여, 느끼지 못한다고 하여… 누가 감히 하나님께서 일을 하지 않는다고, 나를 버렸다고, 잊으셨다고, 하나님이 없다고 말할 수가 있겠으며, ‘누가 주의 마음을 알겠으며 누가 주의 계획을 알겠는가!’ 그분은 우리의 모든 생각, 상상, 지혜를 초월하여 높고 깊은 뜻을 가지고 반드시 그 일을 성취하시는 완벽한 하나님이시다. 반드시 환난과 연단을 통하여 소망을 이루심으로 믿음에 굳게 서서 그분이 이루시는 영광의 소망을 바라보면서 즐거워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의 계획과 그분의 때는 완전하시며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 그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브라함처럼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이며,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약해지지 않고 소망을 바라보면서 인내하는 믿음이다. 그분은 당신의 백성을 거룩한 자녀로 구별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서 존귀와 칭찬과 성공과 높임을 받는 자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미움과 멸시와 환난을 당하는 방법으로 우리를 순전하게 보호하시고 있다. 수많은 믿음이 있다고 자랑하던 자들이 환난과 고난과 고통이 닥쳐올 때 하나님을 의심하고 오해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며 믿음을 버린다. 그 속에서 신앙이 더욱 순전해지고 거룩하여지며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진짜 충실한 믿음의 종들이 나오는 것이다. 주님은 그 어떠한 환난과 시련 속에서도 끝까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만을 의지하는 변함이 없는 믿음을 원하시며 탄식하신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눅19: 8).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수가 없다. 오직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만이 우리를 아심으로 그분이 우리에게 일으키는 모든 일들은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행하시는 일이기에 반드시 일어나는 일이며, 영광의 소망을 이루시는 일임을 믿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환난으로, 고통으로, 수치로, 멸시로, 핍박으로, 절망으로, 죽음으로 다가온다 할지라도, 그분이 일으키시는 모든 일들은 선이며, 필연적이며, 온전하며, 완벽하며 반드시 성취된다. 때문에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직 이에 순종하는 인내와 믿음이다. 거룩한 백성으로 택함을 받았기에 성도는 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에 합당한 구별된 삶으로, 이 세상 원리가 아닌 하늘나라의 원로로 끊임없이 죄와 분리되는 찢어짐과 쪼개지는 환난으로 옛 사람이 삭제되고, 하늘나라에 속한 거룩한 새사람으로 탄생하여 하늘나라 영생의 소망을 이루어 주신다. 성도는 이 땅에서 육신으로 겪는 환난을 통하여,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신”(엡 1:4-5) 은혜의 풍성함을 알게 함으로,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존재 목적과 내가 살아가는 소망임을 깨닫게 하여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하는 것이다”(엡 1:6).
하지만,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인간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하는 욕망과 탐심으로 내가 신이 되기를 추구하기 때문에, 내 삶에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1:21-23). 죄의 본질은 하나님이 나의 주권자 되심을 거절하고 내가 나의 주인이 되어 육체가 원하는 정욕으로 온갖 거짓된 것들을 섬겨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을 더럽히며 욕되게 하는 일이다. 아담의 타락으로 하나님을 버린 모든 인간은 그 죄의 대가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임박해 있다. 그 죄와 사망에 허덕이는 완전한 절망 속에서 하나님은 택함을 받은 자들만 끄집어내어 당신의 거룩한 성품에 합당한 거룩한 백성으로 빚어 가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내려 주셔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아들들로 되게 하셨으며(엡 1:3-5), 당신의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기 때문에(계 1:6), 이 세상에서 환난과 곤고로 믿음을 연단하여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히 12:23)로 받으신다. 육신이 원치 않는 환난과 고통과 좌절과 절망과 같은 시험과 연단이 있음으로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하며, 무릎을 굽게 하며, 부르짖게 하며, 끊어지는 심령과 애통으로 긍휼과 사랑과 은혜를 구하게 하시며, 그로 인하여 내 죽은 영혼이 소생케 되며, 내 가난한 심령에 풍성한 위로와 기쁨이 채워지며, 애통이 즐거움으로 감사로 화하며, 오직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의만을 의지하는 반석 같은 믿음으로 연단된다. 바울의 고백과 같이,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며, 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롬 8:36-39)는 믿음의 고백을 듣기를 원하신다.
소망이란? 환난을 이긴 우리 믿음의 선지들
소망이란: 하나님의 영광이 성도 안에 온전히 임재 하여 그분의 영광을 온전히 드러내는 모습이 곧 영화로운 모습이며,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그 영광이 바로 믿음의 궁극적인 소망이며 목표임을 제시한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 소망을 바라봄으로 환난 중에도 기뻐하며 즐겨워한다고 말한다. “그로(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5:2).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성도는 창세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받은 자”(엡 1:3)로 택함을 받았다. 하나님의 나라는 완료된 나라이기에 변화와 성숙과 발전과 보태거나 빼는 것 같은 변경이 없으며 갇힌 시간과 장소라는 개념이 없는 “영원” 그 자체이다. 즉 후회라는 과거가 없고, 근심 걱정으로 사는 현재가 없고, 불안과 두려움으로 맞이하는 미래라는 시간이 없는 영원이다(약 1:17).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삼으신(계 1:6) 영광의 소망이 이루어짐으로, 다시는 육신으로 겪는 환난과 고통의 눈물과 아픔이 없는 오직 한결같은 그리스도의 빛과 하나님의 영광으로 들어가는 그 소망이 이루어지는 것이다(계 21:4). 그리하여 이르기를,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4:12~14)라는 격려를 주고 있다. 성도에게는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현실이 아니라, 내가 돌아갈 영원한 집,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이 끝나면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는 소망이 현실임을 제시한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환난을 주시는 의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택함을 받은 성도는 이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죄인으로서의 자신의 실체를 폭로 당하며 그 실체를 자각하고 인정하는 분리와 쪼개짐의 할례와 아픔과 고통을 건너뛸 수가 없다. 그 환난과 고통을 통하여 자신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게 되고, 자신의 무지와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처절히 깨닫게 되며, 나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 못을 박은 예수의 피를 의지하는 믿음으로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현실을 체휼하게 됨으로 죄를 미워하게 되고 죄를 끊어내려는 선한 싸움을 하게 된다. 하지만 내 육은 끊임없이 죄를 원함으로 그 끈질긴 죄를 도저히 이길 수 없는 현실에 부딪치게 됨으로 매일 도살당하는 양같이 죽임을 당하는 환난을 겪게 된다. 내 안에 깊이 뿌리박고 있었던 육체의 정욕, 탐심, 욕망, 음행과 같은 것들이 위로 올라와 내 진짜 모습이 드러나고, 쪼개짐으로 분리가 일어나고, 처음자리 ‘없음’으로 삭제되는 죽음이라는 환난을 처절하게 경험하게 된다. 성도는 분명히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단 한 번의 즉각적인 거듭남으로 구원을 받은 의인이다. 하지만 구원받은 성도는 이제부터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따라 거룩한 백성으로 지어져가는 점진적으로 거룩에 합당한 열매들을 맺어가는 환난과 연단과 인내가 필요한 것이며, 오직 믿음으로만이 가능한 것이다.
우리의 실체는 본래 “진토와 거름더미” (시 113: 7 / 삼상 2:8)이며, 거기에서 구원받은 것이다. 그분이 먼저 우리를 찾아와 주셨고, 죄와 죽음의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어 주셨으며, 그분을 믿는 믿음을 주셨으며, 죽음의 환난을 통과하게 하셨으며, 그분의 영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잉태케 하여 주심으로 비로소 하늘의 유업을 이어받은 아들들이 되는 소망이 이루어 진 것이다. 온 세상에서 그 많은 족속 중에서 하나님은 오직 창세전 선택받은 아브라함 한 사람에게만 은혜를 입혀 구원하셔서 믿음의 조상으로 만들어 내셨다. 오직 선택받은 자만 그분의 부르심과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마음을 주시며, 그분이 먼저 우리 마음에 겨자씨로 시작하시는 믿음을 주셔서 오직 그분만을 바라보고 의지하게 하시며, 결코 그분이 바로 나를 낳아주신 아버지이심을 고백하는 장성한 믿음으로 세워주시기 위해 이 역사 속에서는 환난과 시험을 겪게 하신다. 그 환난 속에서 창조의 주체이신 예수만 오롯이 드러나고 예수가 전파되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도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이 성도의 소망이다. 성도는 이 세상 환난 속에서 왜 예수만이 구원과 진리와 생명이시며, 왜 예수의 십자가 피로만 모든 죄가 도말되어 하나님나라가 완성이 되는 지를 깨닫고 나타내고 전파하는 역할로 사는 자들이다. 이 역사와 인생의 존재 목적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빛이요 생명이요 진리로 구원임을’ 증거하며 만물이 예수를 위하여, 예수로 말미암아, 예수로 비롯되고, 예수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을 드러내고 증거하고 전파하는 것이며, 요구되는 것은 오직 순종과 믿음이다. 이르기를,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계 7:14-15). 믿음으로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들이 이 세상 환난을 걸쳐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의 횐 옷을 입고 신부가 된 자들이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영광의 소망을 이루어주시기 위해 이 땅에서 받으신 환난
우리는 본래 사단의 노예로 죄의 사슬에 묶여서 이 세상에서 온갖 죄악들을 행하여 비참한 고역과 죽음의 멸망을 자초한 자들이다. 그런 우리를 ‘속량’하여 주시기 위해, 하늘나라 보좌에 앉아 만물을 다스리는 영광의 주 예수그리스도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여 그 누구도 상상할 수도 예측할 수도 없는 모습으로, 즉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형용할 수 없는 수모와 멸시와 조롱과 매 맞아 터지고 찢어지는 환난으로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대가를 하나도 빠짐없이 철저하게 온전하게 받아내셨다.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사 50:6). 그 누구도 내가 애 터지게 기다리던 왕이 이와 같은 처참한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수염이 뽑히고, 뺨을 맞고, 춤 뱉음으로 수모를 당하기를 원치 않으며, 또한 그렇게 무력하게 당하는 이를 왕으로 보는 자는 없다. 이사야 53:1-8에 보면, 그분은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으며,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는 싫어 버린바 되는 모습이었으며, 사람들에게 멸시와 조롱과 찢김을 당하며, 하나님에게는 징벌을 받아 맞는 고난을 당한다고 여겼으며,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도 그 입을 열지 않고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잠잠한 양같이 그 모든 치욕을 다 당하셨으며, 우리의 죄 때문에 죄인으로 정죄 받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하게 버림을 당하셨다.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는 메시아가 이와 같은 비참하고 처참한 환난을 당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하였기에, 이사야에서 그렇게도 상세하게 메시아의 오심과 고난을 기록하고 있었음에도 그 누구도 믿지 않았고 믿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 주님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갈망하고 기대하고 있었던 모습: 백마를 타고 천군천사를 호위하며 찬란한 옷을 입고 면류관을 쓰시고 전지전능하신 권능으로 이 세상 왕이 되시는 모습으로 오신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이 세상에서 가장 비천한 종으로, 사람들에게 짓밟히고 멸시와 조롱을 받는 밑바닥까지 내려간 그 누구에게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죄인이 받아내야 하는 모든 학대와 멸시와 와 같은 환난과 심판을 받아내셨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임박한 우리를 밀어내시고, 내가 선 그 자라에 서서 내가 받아야 할 죄에 대한 아버지의 진노의 심판을 몽땅 받아내신 것이다. 하나님은 죄인에게 향한 그 진노의 심판을 하나도 아낌없이 온 힘을 다하여 사정없이 아들에게 쏟아 내리신 것이다. 그 심판이 너무나 잔인하셨기에 주님은 아버지에게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부르짖은 것이다. 이와 같이 그분이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신 그 십자가의 구원은 점도 흠도 없이 완전하시며, 공의로우시며, 철저하시며, 완벽하시며, 우리에게 향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하늘나라 영광의 보좌에 앉아계시던 그 영광의 주가 이와 같이 피조물에서 온갖 멸시와 조롱과 수치와 능욕과 찢김과 핍박과 환난을 다 당하시고 비참한 모습으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리라 그 누가 상상이나 하였겠는가! 그 누가 민신창이 되어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을 수가 있었겠는가! 인간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분이 우리의 눈과 귀를 열어주지 않는다면, 저주의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나의 구주로 영광의 주로 믿는 믿음을 주시지 않았다면, 그분을 믿는 믿음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구원은 은혜이며 믿음이다.
다윗의 환난과 즐거움
우리는 성경에서 그 누구보다도 환난과 곤고를 제일 많이 겪은 다윗과 바울이 어떻게 환난 속에서도 즐거워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모든 일에 감사하는 믿음의 본보기가 되었는지를 읽을 수 있다. 다윗은 어린 나이에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다. 하지만 그 후 다윗은 15년 동안이나 자신을 죽이려고 좇는 사울 왕에게 매일 숨어 다니는 광야와 같은 기구한 삶을 살아낸 것이며, 일평생 전쟁터에서 살았고,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 다니는 비극적인 삶을 산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을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으며, 그의 시편은 온통 하나님 찬양과 감사로 넘쳤던 것이다. 구약 전제 132번 감사 구절에서 다윗의 시편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구절이 무려 77번이나 언급되어 있다. 신약 감사의 구절 64번 중에서 바울의 서신에서는 48번이나 언급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사울 왕에게 15년 간 쫓겨 다니는 환난을 주신 의도는, 다윗 인간 마음속에 숨겨 있는 사울 왕의 모습을 철저히 없애주심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으로 세우시기 위함이었다. 사울 왕의 교만한 모습, 하나님을 멸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불순종,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자기 멋대로 하는 거만한 모습들을 지워버림으로, 오직 하나님 한분만을 경외하고 창송하며,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순종하는 진실 된 왕으로 세워 다윗 왕의 혈통으로 메시아를 부내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윗은 자신의 생명을 누리는 사울 왕에게 매일 쫓겨 다니는 광야와 같은 환난 속에서 하나님의 지키심과 생명을 붙들어주시는 손길을 뼛속까지 체험함으로, 그 모든 환난을 찬송과 감사와 즐거움으로 화답한 것이다. 다윗은 자신을 온전히 철저히 하나님 손에 의탁한 것이다. 그러므로 매일 쫓겨 다니는 환난 속에서도 그는 ‘내게 부족함이 없으며, 내 잔이 넘친다’는 위대한 고백을 할 수 있었다. 그가 믿은 것은 단 한 가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뢰와 믿음이었다. 바로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다”(시 23:1)는 믿음이다. 그 믿음이 그를 부족함이 없다는 고백을 끌어낸 것이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다”는 그 사실이 믿어지면, 음칙하고 무시무시한 죽음과 같은 골짜기라도 푸른 초장과 쉼을 얻는 물가로 보이는 것이며, 나를 잡아 삼키려고 하는 원수 앞에 밥상을 차려줘도 그 맹수 앞에서 오히려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은혜로 내 잔이 충만하게 넘침으로 나는 두려움 없이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며 부족함이 없다는 고백이 터져 나오게 되는 것이다.
바울의 환난과 믿음
신약에서 우리는 바울처럼 처참한 환난의 인생을 산 사람은 이 세상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 24-27). 그는 11년 동안 9번의 죽음과 같은 매 맞음과 돌로 맞는 만신창으로 깨지고 어그러지고 찢어지고 부러진 몸을 이끌고, 온갖 위험과 춥고 헐벗고 굶주리고 목마름으로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은’(롬 8:36),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처참한 환난속에서도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멈춘 적이 없다. 바울은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롬 8:39)라고 그리스도를 끝까지 신뢰하는 믿음을 외친 것이다. 바울의 13 서신에서 빠지지 않고 시작한 구절이 바로 하나님 은혜에 대한 찬송과 감사이며, 바울의 삶 자체가 바로 찬송이며 감사였다. 그 절망적이고 비참하고 육신으로는 감당이 안 되는 환경과 상황에서 바울은 자신이 받는 고난을 이해하기 보다는 순종으로 찬양과 감사로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믿음으로 이긴 것이다.
성도는 환난과 곤고와 고통과 같은 상황과 사건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끝까지 믿는 믿음이다. 성도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직 그분이 하시는 모든 일들, 그것이 내게 보이기에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고난이든, 환난이든, 절망이든, 상관없이 하늘나라 영광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존귀한 환난으로 보는 믿음의 눈이다. 다윗의 고백과 같이 그분은 나를 기르시는 목자이시고,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시 18:2)는 사실을 믿는 믿음이며, 바울의 고백과 같이 나를 그토록 사랑하시는 “아바 아버지”라는 사실을 믿는 믿음이다.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뜻이 이루어지는 가장 완전한 때와 완벽한 때를 기다리는 인내이다. 히브리서 믿음의 장 11장에서 나열한 16명의 선지들은 모두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자신들이 겪은 일들을 이해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되시며 나의 모든 삶의 주관자라는 사실을 믿고 인내하는 믿음이었다. 예레미야는 40년 넘도록 오직 하나님 한분만을 바라보고 하나님이 시키시는 모든 일들을 순종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으로 지탱한 것이다. 그는 평생 눈물의 선지자로 매일 사람들에게 조롱당하고 멸시당하고 핍박당하고 매 맞는 눈물에 찌든 험난한 삶을 살았고 그 마지막은 애급에 끌려가 돌에 맞아죽는 처참한 죽음이었다. 대 선지자로 메시아의 구원을 예언하신 이사야는 노년에 악한 왕 므낫세에게 톱으로 키는 죽음을 당하였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이 세상에서 겪어낸 그 감당이 안 되는 환난들을 어찌 이해할 수가 있었겠는가!
하나님은 우리 성도에게 우리 믿음의 선지들이 목숨으로 고수한 그 믿음을 거룩으로 받으신다
하늘나라를 사는 성도는 이 허사인 역사 속에서 시간으로 사는 육체의 공허함과 허무함과 무능함과 썩어짐의 정체성을 알아가고 깨닫는 것이며, 육체가 만들어낸 이 역사의 종말이 어떠한 것인지를 인식하고, 영원히 썩지 아니하는 영생을 사는 하늘나라를 소망하도록 믿음을 선물로 받았다. 때문에 성도는 이 역사 속에서 나라는 육적 자아가 점차적으로 삭제되고, ‘이마에 어린 양 예수의 이름과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적힌’(계 14:1) 새로운 피조물, 즉 그리스도의 신부로 아버지의 아들로 잉태하고 탄생하여 성장하는 하늘나라 소망이 내 안에서 우리어 짐으로, 오로지 나만을 위해 살던 탐심과 욕망과 정욕들이 점차적으로 죽어지는 죽음의 환난을 반드시 통과하게 된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육신으로는 환난과 곤고와 시련을 겪으면서 영으로는 내안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확장되는 두 현실을 동시에 살고 있음으로, 바울은 육의 환난과 영의 소망이 공존하는 갈등과 싸움과 좌절과 절망의 탄식을 고백한 것이다.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롬 7:21-23). 하지만 거기에서 믿음이 발휘하여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 나가지 않도록 굳게 붙들어 주시며, 반석 같은 믿음으로 세워주시며, 내 안에서 누룩이 부풀어 오르는 것과 같이, 겨자씨 같은 믿음이 점차 자라서 큰 나무가 되어 새들이 깃드는 열매를 맺는 소망이 이루어짐으로 평강과 기쁨으로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한다고 역설로 말하는 것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목이 곧은 패역한 백성’이라고 부르셨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백성은 목이 꺾어져서 오로지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믿음이다. 목이 꺾어지는 죽음만이 예수 생명 안에 함몰되기 때문이다. 성도의 거룩한 삶을 한마디로 축약한다면, 내가 죽는 십자가 환난으로 연단된 믿음과 경건한 삶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의 형상으로 변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는(고후 3:18) 소망으로 사는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