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영적 계시

로마서 (8:19-25) 피조물과 성도의 탄식 /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 / 몸의 속량? / 보이는 소망과 보이지 않는 소망이란?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2024. 8. 27. 02:23

로마서 8:19-25

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바울은 구원의 영역을 좀 더 넓혀서 모든 피조물에게까지 언급하고 있다. 천지 만물은 태초부터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께서 명하여 주신 법칙대로 질서 있게 준행하고 있다. 인간으로부터 질서와 조화로 아름답게 사랑으로 ‘다스림’을 받아야 하는 자연과 모든 생물들은(창 1:28) 인간의 탐심과 타락으로 훼손되어가고 있음으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패역한 인간들이 다시 하나님의 아들들로 회복되기를 기다린다고 바울은 말한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롬 8:19-22). 인간의 타락으로 훼손되고 뒤틀려가는 자신들을 바라보면서 속히 ‘썩어짐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아들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를 함께 누리기를 기다린다’고 말씀한다.

피조물의 역할

삼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지혜와 지식과 능력을 동원하셔서 가장 아름답게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완전한 천지만물을 인간에게 선사하여 주시고 당신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고 선포한 피조물의 역할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세상에 하나님을 알리고 가르치며 설명하여 주는 것이었다. “이제 모든 짐승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네게 가르치리라 공중의 새에게 물어보라 그것들이 또한 네게 고하리라 땅에게 말하라 네게 가르치리라 바다의 고기도 네게 설명하리라 이것들 중에 어느것이 여호와의 손이 이를 행하신 줄을 알지 못하랴 모든 생물의 생명과 모든 사람의 육신의 목숨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욥 12:7‐10). 천지와 자연과 모든 생명체들은 자신들을 창조하여 주신 창조주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찬양하며, 그 은혜에 감사하며, 끊임없이 인간에게 알리고 가르치고 설명하여 주고 있다는 말씀이다. 그럼에도 유독 인간만 하나님의 그 위대하시고 존귀하신 영광을 찬양하지도 아니하고, 그분이 주신 모든 것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감사치도 아니하고, 끊임없이 하나님을 거역하며 아름답게 선사한 자연을 무자비하게 파괴하고 생물들을 학대하는 악행을 멈추지 않고 있다. 때문에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뜻을 펼치지 못하고 인간들의 끊임없는 탐심과 욕망과 악행으로 무참히 훼손되어 가고 있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라고 말한다.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8: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허무한데: 인간의 타락은 자기 자신들만 허무한 데로 이끈 것이 아니라 그의 지배하에 있는 다른 피조물까지도 허무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허무한”의 본 의미는 타락, 어리석음, 무익이며, 이는 만물이 쇠락하고 훼손하여 불안정의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도자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전 1:2-3)라고 해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은 다 헛되고 헛된 허무이며 , 오직 해 위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만 영존함을 제시한다. 바울은 “허무함”을 “썩어짐의 종노룻”으로 표현한다(8:20-21).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리고 지배하는 주권자로 대 제사장의 역할로 세움을 받았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범죄로 그 지배권을 사단에게 빼앗기게 됨으로써 이 세상 모든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 당하여 썩어짐의 종노릇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다 (8:22). 즉 모든 피조물의 대표자이자 주관자로 세운 인간이 타락함으로 (창1:26-30) 그 타락이 모든 피조물들에게도 악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하루속히 영광의 자유의 몸으로 회복됨으로 자신들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에서 해방 받아 함께 영광의 자유를 누리는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고대하고 있다고 말한다(8:21).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람의 지배와 다스림을 받게 하셨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 1:26 새번역).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피조물들을 사람의 지배와 다스림을 받도록 법칙을 세우셨기에, ‘허무’에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와 법칙을 어길 수 없음으로 자기 자리를 지키면서 탄식으로 인간들이 하나님의 온전한 아들들로 회복되어 하나님의 나라가 궁극적으로 이 땅에 온전히 임하여 영광의 자유에 동참하기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모든 피조물은 인간이 아직 창조되기도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먼저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는’ 복을 받았다(창 1:22-24). 피조물은 이 땅에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하는“ 뜻대로 준행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신 생명의 창조 능력과 그분의 영광의 임재와 은혜의 축복을 사람에게 ‘고하고 가르치고 설명하고’ 있다(욥 12:7‐10). 즉 피조물은 태초 하나님이 말씀으로 정해주신 법칙과 질서를 따라 자기 자리를 이탈하거나, 흩트리어지거나, 게으름이나, 쉬는 것이 없이 성실하게 책임을 다하여 운행하고 있다. 그들은 첫 인간 아담의 타락에 동참하지도 않았고, 허무한데 굴복하지도 않았다. 다만 인간이 먼저 타락함으로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을 저주할 때 피조물도 인간과 함께 허무한 데 굴복 당하게 하셨다. 이르기를, "내가 너에게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의 열매를 먹었으니, 이제, 땅이 너 때문에 저주를 받을 것이다. 너는 죽는 날까지 수고를 하여야만, 땅에서 나는 것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땅은 너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다”(창 3:17, 18 새번역). 이를 바울은 “피조물이 헛된 것에 복종한 것은 스스로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8:20 현대인성경) 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인간의 타락으로 인간에게 종속된 피조물도 함께 ‘허무한데’ 굴복을 당한 것이다. 즉 모든 피조물도 인간의 타락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 헛된 것에 예속되어 있다는 것을 제시한다. 땅은 자신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있다. 예를 들면, 태풍, 지진, 화산, 기근, 홍수와 같은 자연 재해들을 일으키고 있다. 이는 결코 자기 뜻이 아니라 굴복케 하는 어떤 존재로 인하여 허무한 데 굴복 당할 수밖에 없는 암흑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즉 인간만 타락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타락으로 온 땅이 저주를 받음으로(창 3:17) 모든 피조물들도 인간과 함께 죄와 사망이라는 저주 속에 빠져있다는 사실이다. 그 죄와 사망에서 벗어나는 해방! 그래서 얻는 자유! 이것을 간절히 탄식으로 소망함을 바울은 말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하늘나라 영광으로 회복될 때 시간과 공간 안에서 창조된 하늘과 땅, 모든 피조물들이 옛 창조를 벗고, 새로운 단장으로 다시는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아니하는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을 고대하며, 반드시 임하는 하나님의 언약성취를 계시록에서 제시하고 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 이러라“(계 21:1-4).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친히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을 귀히 여기시고, 마지막 회복의 역사를 계획하셨고 언약하셨음을 계시록에서 기록하고 있다. 그 영원한 안식의 기쁨과, 환희와, 영광의 소망을 인간과 피조물이 함께 고대한다고 말 한다(8:22-23).

피조물의 탄식

태초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만물은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여 말씀으로 정하여 주신 그 법칙대로, 질서를 따라 자기 자리를 이탈하거나, 흩트리어지거나, 게으름이 없이 성실하게 자신의 맡은 일들을 준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첫 인간 아담의 타락으로 땅도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내어 인간을 삼키는 무덤이 된 것이다. 한 사람 아담의 죄악으로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오고(롬 5:12), 그 죄로 말미암아 온 세상이 타락하여 저주아래 있음으로 피조물이 다 탄식하며 인간과 함께 고통을 겪고 있다고 말한다. 이 땅과 땅 위에서 사는 모든 피조물들은 죽음과 멸망을 향하여 달리고 있다. 인간들의 끊임없는 탐심과 욕망과 음란으로 말미암아 모든 면에서 훼손되고, 파괴도고, 어그러져가고 있음으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인간들이 다시 하나님의 아들로 회복되기를 기다린다고 바울은 말한다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롬 8: 21-22).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성도의 탄식과 몸의 속량

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 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란: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두 가지를 의미한다.

첫째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셔서 첫 열매가 되심으로, 우리도 그분 안에서 죄와 상관없는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하나님의 아들들로 잉태하게 하셨다. 그분은 비록 인간의 육신을 입으셨지만, 우리를 의인으로 잉태시켜 영생을 주시기 위해, 죄인과 상관없는 자신의 본체인 성령으로 잉태하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의의 생명을 주신 것이다. 또한 자신의 거룩하고 흠 없는 신성을 그대로 유지하시면서 인간의 육신을 입으시고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게 하심으로, 육으로는 인간의 모든 죄를 도말하시고, 영으로는 우리를 자신에게 속한 새 생명으로 잉태시켜 주심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형상을 그대로 우리 심령에 새겨주셔서 영의 자녀로 하나가 되게 하셨다.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기”(요일 4:13) 위함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자는 예수와 합하여 한 몸이 됨으로 하나로 영생을 살 수 있는 열매가 된 것이다.

둘째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며, 부활하셔서 모든 성도가 소망하는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음을 말한다. 바울은 동일하게 고린도전서 15장 20-23에서 부활의 첫 열매는 예수그리스도이심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죽은 사람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부활에는 각자 자기 차례가 있습니다. 첫째는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이고 다음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그분을 믿었던 모든 성도들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첫 열매로 부활하심으로 그분 안에 있는 우리도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 부활의 몸으로 변하여 영원한 천국의 왕국을 누리게 되는 소망을 보여주셨다. 예수님은 생명이 부활에 있으며 자신이 곧 부활이라고 선포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 11:25-26).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시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를 지시고 자신의 목숨을 버리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죽음으로 완전히 철저히 도말하여 주셨으며, 우리에게 영원한 새 생명을 주어 당신의 영원한 자녀로 신부로 삼기 위해 먼저 부활하셔서 부활의 영으로 우리에게 영생을 입혀주시는 부활의 첫 열매가 되어 주셨다.

이와 같이 성도는 이미 예수그리스도와 하나로 연합된 자로 몸의 온전한 부활을 소망하며 잠시 이 세상을 사는 나그네이다. 바울의 말대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롬 8:10-11), 마지막 날에 재림의 예수께서 오시는 그 영광스러운 날에 재림 전에 죽은 자도, 그때 살아 있는 자도, 부활의 몸으로 살아나게 됨을 제시한다(살전 4:16-17). 우리 주님이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셔서” 최후의 심판자로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셨다.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 1:10-11). 성도는 신랑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는 자들이다.

성령의 처음 열매를 받은 성도의 탄식

성령으로 거듭난, 즉 “성령의 처음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한다”고 바울은 말한다. 왜냐하면 성도에게 있어서 이제 유일한 소망은, 주님의 재림의 날 썩어짐의 육체를 벗고 영원한 부활의 몸으로 영광의 자유함으로 하나남의 나라에서 영원을 살기 때문이다.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23).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는”(고전 15:54) 온전한 부활의 몸을 기다리는 소망이다.

인간은 썩어서 없어질 육체의 안일과 탐심을 채우기 위해 온갖 악을 도모하며, 삶의 질을 높여 복을 누리겠다고 만들어낸 문명, 기술, 과학, 문화, 오락 같은 것들로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훼손할 뿐만아니라 자신들을 파멸과 멸망으로 몰아가고 있다. 모든 인간들이 갖고 싶어 하는 돈, 인기, 명예, 권력 같은 것들은 지옥으로 밀어 넣기 위해 마귀가 던져주는 위조품들이다. 인간들이 그 모조품 행복에 목숨을 걸고 끝없는 탐심으로 스스로 파멸을 자초하고 있으며 자신들이 추구하는 그 모조품 행복이 바로 사망이며 지옥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오직 성령으로 거듭나 영적 눈이 떠진 성도만 이 세상이 바로 저주와 죄와 사망의 늪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사도 바울과 같이 이 세상의 것들이 ‘배설물’로 보이며, 모든 부귀영화를 누린 솔로몬의 고백과 같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전 1:2-3),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찌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3-14)라는 마지막 교훈을 남긴 것이다. 또한 회복의 날을 기다리는 이사야의 외침과 같이 “주여 어느 때까지입니까?”(사 6:11)라고 탄식하며, 바울의 소망과 같이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는”는 것이다.

성령의 첫 열매를 받은 성도는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죄의 종노릇에서 벗어났다’(롬 6:6-7). 하지만 내 육신은 여전히 이 죄악 된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내 육신 안에는 여전히 내 옛사람의 죄의 습성이 있기 때문에, 수시로 나를 죄의 포로로 잡아 끌어내리는 그 죄의 맹렬한 세력에 굴복하는 자신의 육신을 바라보면서 ‘속으로 탄식하며 몸의 속량을 기다린다’는 것이 현실이다. 내 속사람은 영의 것을 사모하고 추구하나, 내 육신은 이 땅의 것을 원하고 즐기는 습성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함으로, 내적인 갈등과 좌절과 실패의 절망과 슬픔을 겪게 됨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정직한 신앙의 몸부림을 말해주고 있다. 인간은 육신의 원함을 채우는 탐심과 욕망과 정욕으로 전적으로 타락하였기 때문에 ‘마음이 심히 부패함으로’(렘 17:9) 나오는 것이란 오직 죄뿐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내 육신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며”(롬7:18), 내 영은 선을 원하지만 내 육은 “악은 행 한다” (7:19)라고 우리 성도를 대표하여 고백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령의 첫 열매를 받은 성도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죄로 썩어가는 육신을 벗고 점도 흠도 없는 새 육신의 부활로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방법 외에는 다른 방책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탄식하며 ‘몸의 부활을 기다린다’고 말하는 것이다.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성도의 소망은 ? 몸의 속량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울은 고린도 전서 15장에서 “몸의 속량”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하여 주고 있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영의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고전 15:42-44). 즉 몸의 영원한 부활은 우리 성도의 궁극적인 소망임을 제시한다. 성도의 소망은 우리 주님이 부활의 영광스러운 몸으로 제자들에게 보이신 것과 같이, 우리도 이 썩은 육체를 벗어버리고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하여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사는 것이다. 그날이 바로 점도 흠도 없는 온전한 부활의 몸으로 영광의 소망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예수님 재림의 날이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피조물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고 말한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다리느니라”(8:19-25). 이로 보아 바울이 말하는 ‘몸의 속량을 기다린다’는 말은 이 썩어짐의 육체를 벗고 영원한 부활의 몸으로 영생을 사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더디어 현실로 다가오는 소망의 이루어짐이며 그 소망의 성취를 계시록에서 기록하고 있다(계 21:1-5).

그 날에는 ‘죽을 몸이 다시 살아나’ 부활의 몸으로 재림의 예수를 맞이한다고 말한다. 이르기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살전 4:16-17). 또 이르기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전 15:51-53, 마 22:30). 이는 모든 감추어져 있었던 것들이 백일하에 만 천하에 드러나는 지상 최대의 결국이다. 수천 년 전에 죽은 자나, 지금 살아있는 자나, 재림의 날은 시간 공백이 없는 한날한시 순식간의 사건으로 모두에게 동시에 일어나지만, 하나는 영생하는 부활의 몸으로, 하나는 지옥 불에 떨어지는 심판의 부활로 영원히 분리되는 순간이다.

보이는 소망과 (24절) 과 보이지 않는 소망(25절)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바울은 보이는 소망, 보이지 않는 소망, 이렇게 나누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성경이 말하는 소망은 미래에 있을 것에 대한 기대 같은 희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제시하는 실체! 실상이 표적으로 또는 어떤 형상으로 증거로 이미 와 있거나, 반드시 성취되는 언약으로 소유하고 있음을 말한다. 이는 창세전 삼위 하나님께서 묵시로 이루어 놓으신 말씀이 태초 천지 창조와 시간의 창조로 이 땅에 보이는 물질세계로 펼쳐졌으며, 때문에 반드시 성취되는 변함이 없는 언약이며 이를 믿는 믿음을 소망이라고 말한다. 태초에서부터 시작하신 역사의 수레바퀴는 한 치의 오차 없이 하나님의 정하신 사간 속에서 멈춤이 없이 계시록 완료로 굴러가고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그 완료의 하늘나라를 마음에 품고 이 땅에서도 천국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소망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우리 믿음의 선지들이 그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실체로 실상으로 마음에 품고 사는 믿음에 굳게 서서 그 어떠한 핍박과 순교에도 소망을 잃지 않았다. 하늘나라 소망이 실체로 실상으로 그들에게 임하여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뜻으로 바울은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8:24-25)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통하여 우리에게 계시하여 주신 것을 믿음으로 취하여 그 나라가 나에게 임하였고 또 임한다는 것을 바라는 것이 소망이다. 즉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이는 실체로 받아들이고 그 나라를 내 안에서 살아 내는것, 그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으로 바라는 것이며, 그 소망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필연적으로 성취되는 실체이고 실상이기에 참으면서 기다리라고 확신으로 권면한다. 이르기를 “우리는 이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면, 참으면서 기다려야 합니다”(8:24-25 새 번역). 또 이르기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고 말씀으로 우리에게 진리를 계시하고 가르치고 설명하여 주고 있다. 예를 들면, 보이는 빛은 어둠을 비추는 빛으로만 보이고 인식되지만, 믿음의 눈으로는 빛이 곧 생명이고 생명이 곧 예수그리스도이시며, 그분은 빛과 말씀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 빛과 말씀이 육신을 입고 보이는 인자로 이 세상에 우리를 찾아 오셨다고 사도 요한은 영적으로 증거하고 있다(요 1:3-5).

보이는 소망과 보이지 않는 소망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은 형체가 없으신 영이시며, 자신의 존재 근거를 스스로 가지시는 ‘자존’하시는 분이시며, 생명 자체이시며, 무한하신 초월자이시며,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념이 없으신 분이시다. 그분은 자신을 보이는 소망으로 우리에게 계시하여 주시기 위해, 태초라는 시간의 시작을 정하시고 형제를 지닌 물질세계를 창조하여 주셨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조건 보이지 않는 소망을 믿으라고 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인간에게 먼저 보이는 소망으로 성취하여 주셔서 보이지 않는 당신 자신을 보이는 소망으로, 실상으로, 증거로 나타내어 주셨다. 바로 당신의 백성과 맺은 반드시 성취하시는 언약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당신의 나라를 소망하도록 언약을 맺으시고 성실하신 믿음으로 인간에게 향한 구원의 소망을 이루어 주셨다. 그분은 언약을 통하여 당신의 백성들의 영원한 아버지가 되시며 당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시는 온전한 사랑이심을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심으로,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영원한 소망이심을 나타내어 보여주셨다. 그분은 역사를 창조하셔서 당신의 마음에 합한 사람을 택하시고, 사건과 상황과 배경들을 설취하셔서 드라마로 엮어서 그 보이지 않는 소망들이 어떻게 실체로 사실로 현실로 이루어져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하는지를 아주 상세하게 구체적으로 점층적으로 설명하여 주고 있으며, 이래와 같이 요약할 수 있다:

-- 하나님은 태초부터 인간에게 보이는 소망을 제시하여 주셨다. 인간에게 향한 당신의 극진한 사랑을 나타내어 보여주시기 위해 인간에게 천지와 발광체와 모든 식물과 생물들을 창조하여 은혜로 선물하여 주시고, 사람을 당신의 형상으로 만드시고,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리는 소망을 왕으로 제사장으로 세워 주셨다.

-- 하나님은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마지막에 사람을 창조하셨다. 첫 인간 아담은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본 적도 또한 참여한 적도 없이 아침에 눈을 뜨자 천지와 모든 생물들이 아담을 위해 완벽하게 준비됨으로 오직 은혜로 모든 창조물을 누리는 안식에 들어간 것이다. 이는 장차 당신의 백성들이 아무것도 한 것 없이 오직 은혜와 사랑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안식의 소망이 이루어짐을 보여주셨다.

--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당신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설명하여 주시기 위해, 특별하게 아담을 위해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그곳에 옮기 놓으시고, 동산 중앙에 눈에 들어오는 선악과나무와 장차 소유하게 되는 생명나무를 소망으로 주셨다. 보이는 에덴동산으로 장차 당신의 백성들이 당신의 품 안에서 함께 거하게 되는 당신의 영원한 나라를 소망하게 하셨다. 이제 아담을 위한 에덴동산과, 죄와 죽음을 상징하는 선악과나무와 구원과 생명을 상징하는 생명나무, 두 나무를 통하여 당신의 백성들이 소망하는 하나님 나라가 어떠한 원리에 의해서 시작하여 완성의 지점인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님의 섭리로 진행될 것인지를 역사의 드라마로 보여주시기로 정하셨다.

-- 첫 인간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타락함으로 에덴동산에서 좇겨 나갔지만, 하나님은 장차 그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는 소망을 언약하여 예수그리스도의 희생제물을 상징하는 양을 잡아서 피를 흘리게 하시고 그 피의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혀주심으로 장차 예수그리스도의 피와 은혜의 덮음으로 구원이 성취되는 소망을 보여주셨다.

-- 하나님은 좀 더 구체적이고도 현실적인 그림을 보여주시기 위해, 아브라함 한 사람을 택하셔서 하나님 자신을 직접 나타내어 깊은 관계를 맺어주심으로, 하나님 자신이 바로 아브라함이 믿고 의지하는 영원한 구원자이시며 소망이심을 믿는 믿음을 주셨다. 그 믿음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모든 족속의 믿음의 아버지가 되는 소망이 되었고 그 소망이 이삭의 탄생으로 성취된 것이다.

--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을 세상 애급으로부터 불려내어 거룩한 백성으로 구별하시고, 보이는 성막과 제사와 율법을 주셔서 하나님은 그들의 아버지가 되시며 남편이 되시며 그들이 믿고 의지하는 유일한 구원자이시며 소망임을 시내산 결혼 언약으로 확증하셨다. 비록 이스라엘이 아무리 하나님을 배신하고 대적하고 세상 신들과 간음하는 온갖 역겨운 행음을 멈춘 적이 없었음에도,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을 사랑하셨고 그 언약에 충실하셔서 이스라엘의 유일한 하나님이시며 아버지이시며 남편이시며 영원한 안식의 소망이심을 4 천여년의 기나긴 역사로 끊임없이 보여주시고, 가르쳐주시고, 설명하여 주시고, 깨닫게 하셔서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셨다.

--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보이는 율법을 주신 것은 지켜 행하여 의를 쌓으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율법이 제시하는 은혜와 유일한 소망이 오직 예수그리스도이시며 그 진리를 소망으로 붙들고 믿으라는 것이었다. 율법으로 인간의 육적 본능과 탐심을 드러냄으로 행위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갈 2:16),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하여 구원이 선물로 임하게 되는 실상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엡 2:7-8). 진짜 소망과 믿음은 생명나무와 복음이지 선악과와 율법은 허상이며 모형이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모든 것, 하늘과 땅, 자연과 식물과 동물, 성막, 성전, 제사, 율법, 그리고 나라는 사람, 이 모든 것을 주신 것은 보이지 않는 진리를 깨닫고 구원과 생명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영원한 도래를 소망하라는 하나님의 섭리였다.

-- 그리고 보이지 않았던 소망으로 믿었던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이 진짜 소망이며 실체이며 실상임을 보여주시기 위해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친히 사람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보이는 소망으로 직접 찾아와 주셨다. 그리고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려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심으로 4000 여년 넘도록 계시하고 언약하여 주신 구원의 소망이 성취된 것이다. 또한 우리를 위하여 부활하여 주심으로 그분 안에 있는 우리는 이제 이 썩어질 몸을 벗어버리고 영원한 몸의 부활을 소망하게 하셨다. 이를 바울은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고 말한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보이는 소망이요, 부활은 보이지 않는 내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이 나를 새로운 피조물로 살려내어 하나님의 아들이 된 인 치심이다. 이제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마지막 예수님의 재림의 날에 썩어짐의 육체를 벗고 영원히 하늘나라에서 영생을 사는 소망을 인내로 기다리는 것이다. 이를 바울은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만물 안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심어주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보이는 실체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실상으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심으로 믿음으로 이미 받았다고 말한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모든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려 주셨습니다”(엡 1:3 현대인 성경). 즉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 그 믿음이 나를 구원 하였으며, 그러므로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모든 영적인 복을’ 받았음으로, 믿음으로 ‘몸의 영원한 부활’을 소망으로 기다린다고 말한다. 만약 구원에 대한 소망이 실체로 내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소망은 소망이 아니며 누가 몸의 영원한 부활이 이루어지는 소망을 바라겠는가 하는 말이다. 이르기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 11:1), 즉 믿음은 바라는 소망이 이루어지는 실상이요 실체를 받은 증거임을 제시한다. 때문에 보이지는 않지만 확실한 소망을 “참음으로 기다린다”고 말한다. 그 보이는 소망 속에서,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 소망을 대망하는 믿음으로 사는 삶이 바로 인내라고 말한 것이다. “우리는 이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면, 참으면서 기다려야 합니다”(8:24-25 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