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13:31-33
13: 31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32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며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33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주님은 모든 씨중에서 가장 작은 씨인 겨자씨 한 알과 누룩을 천국으로 비유하시고 있다. 왜 주님은 눈에 나타나 보이지 않는 씨중 가장 작은 씨 한 알을 영생을 사는 하늘나라로 비유하셨을까? 주님은 지금 이 세상 가치관으로 인식되는 천국과 완전히 반대되는 원리로 천국을 설명하시고 있다. 오직 자신의 이름 높임과 명예와 영광만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천국을 겨자씨 한 알로 비유하신 것은, 천국은 눈에 보이는 권세와 힘과 재물로 운영되는 나라가 아니며, 또한 높은 자, 유명한 자, 공로와 업적으로 들어가는 나라도 아니며, 그 나라는 오직 겨자씨 한 알과 같이 나타나 보이지 않는 없음의 자리로 내려간 자기 부인의 삶을 지향하는 자들에게만 허락된 것임을 비유로 말씀해 주시고 있다.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과 반대로 씨 중에 가장 작은 겨자씨 한 알과 같이 자신을 부인하는 없음의 자리로 내려가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는 삶으로 이끌려 가게 되는 지향성을 말씀해 주신다. 그 시작이 바로 아담의 첫 후손 아벨이 세상 가인에게 맞아죽는 형국으로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짐으로 장차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을 향하여서는 죽음으로 하나님을 향하여서는 영원히 사는 자로 들림을 받게 됨을 첫 인간 아담의 후손인 아벨의 죽음을 통하여 미리 계시하여 보여주셨다. 천국의 백성은 아벨과 같이 이 세상에서 아주 연약하고 하찮은 은닉된 겨자씨 한 알의 모습으로 멸시와 핍박과 죽음을 당하는 철저한 자기 부인의 삶을 살게 되며, 그렇게 아주 보잘것없는 없음의 존재같이 보이는 그 작은 한 알의 겨자씨에서 그 누구도 꺾지 못하는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이 잉태되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게 됨을 제시한다. 즉 자기 부인의 십자가 삶으로 세상에 대하여서는 죽는 자로, 하나님을 향하여서는 산 자로 그분에게 함몰되어 영생으로 거듭나는 생명의 진리를 겨자씨 한 알로 비유하신 것이다.
그렇게 새롭게 탄생된 하나님에게 속한 새 사람은 마치 누룩 반죽이 부풀어 올라오는 것과 같이 내 안에서 천국 즉 하나님의 처소가 확장 되어가고 완성되어 다른 새들이 와서 깃들어 쉼을 얻을 수 있는 무성한 나무로 자라나더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주님은 천국은 여기저기 어느 정해 놓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너희 안에 있다고 말씀하셨으며, 너희 안에 보이지 않는 그 겨자씨 한 알의 믿음으로 하나님의 처소가 확장됨을 가리켜 천국을 부풀어 오르게 하는 누룩으로 묘사하신 것이며, 공중의 새들이 깃들여 쉼을 얻는 무성한 나무로 묘사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세상을 목적으로 이 세상에서 성공하여 유명인이 되고 부자가 되는 자아 건설과 자아 확장의 꿈을 실현하는 자가 절대 아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반대로 ‘나’라는 옛 사람은 점차적으로 기각되고 부서지는 십자가의 죽음과 하나님이 심겨주신 겨자씨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는 부활의 삶으로 이끄심을 받게 된다. 즉 내 안에 심겨진 겨자씨가 싹이 틀 때 내 옛사람은 세상을 향해 죽는 십자가 삶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창세기 시작부터 아담의 첫 후손인 아벨이 세상 악인 가인에게 맞아죽는 죽음을 통과하여 천국의 백성으로 들림 받게 됨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다. 즉 천국은 이 땅에 겨자씨 한 알과 같은 은닉성으로 임하게 되며, 그 겨자씨 한 알은 너무 작아서 눈에 띄지 않지만, 하나님 백성 안에 이미 심겨져 있기 때문에 반드시 생명이 잉태되는 천국이 내 안에 임하게 되는 은혜의 필연성을 겨자씨 한 알의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다.
창세기에서 첫 인간의 후손 아벨이 예수의 모형으로 등장하여 세상 악인과 율법의 모형인 가인에게 살해당하는 죽음으로부터 시작하여 구약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선지자들, 그리고 신약에서 예수님의 제자들과 사도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모두가 세상에 감추어진 연약한 자, 천대와 멸시로 세상으로부터 배척과 핍박으로 자신이 완전히 부인되는 십자가 죽음으로 세상과 대립되는 삶을 살아내셨다. 우리를 이 세상에서 구원하려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님도 이 세상에 내려오실 때 인자로 태어나기도 전에 핍박으로 유리 당하시고,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으며, 세상에서 무시당하시고 배척당하시고 조롱과 매 맞음과 온갖 수모를 다 당하셨으며, 십자가에서 이 세상 죄인들에게 살해당하셨다. 우리를 구원하려 오신 메시아이신 그분이 몸소 자신을 철저히 부인하시고 오직 아버지가 원하시는 십자가의 삶을 살아내신 것이다. 몸소 자신의 삶으로 천국의 삶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나타나며, 어떻게 우리 안에 임하게 되며, 어떠한 삶으로 이끌려가게 되는가를 보여주셨고, 우리에게 그분이 살아내신 십자가 삶으로 그분의 증인이 되라고 명하셨다. 그래서 주님은 미리 성도의 십자가 삶을 제시하여 주셨다.
요 15: 18-20 -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요 16:33 -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눅 9: 32 -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행 1: 8 -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니라 하시니라
이 세상은 잠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의와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발판으로 모든 인간을 죄 아래 가두어 두셨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갈 3: 22 / 롬 11:32). 때문에 모든 인간은 죄인의 몸으로 태어나 오직 자신의 유익만을 추구하는 마귀의 원리에 따라 자아 건설과 자아 확장으로 ‘나’라는 바벨탑을 쌓아 올리는 목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내가 철저히 부인당하고 죽어지는 십자가의 삶으로 내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잉태되는 원리로 임하게 됨을 주님은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 설명하여 주시고 있다. 이것이 천국 백성이 지향하는 겨자씨 한 알의 믿음이다. 그리고 그 겨자씨와 같은 믿음이 어떻게 장성한 믿음으로 천국이 확장되어가는지를 우리에게 상세히 역사로 설명하여 주신 것이 바로 구약의 역사이며 우리 믿음의 조상이 된 아브라함의 이야기다.
창세전 택함을 받은 아브라함 안에는 아주 작은 겨자씨 한 알과 같은 믿음이 심겨져 있었다. 그 겨자씨 한 알의 믿음은 아브라함 자신의 노력과 열심으로 싹이 나서 열매가 맺어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속에 파묻혀 우상을 만들어 섬기는 아브라함을 먼저 찾아가 주셔서 그가 섬기고 의지하고 믿어야 하는 신은 이 세상 신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자신임을 하나하나의 사건들을 통하여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아브라함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와 주시고, 불러내시고, 이끌어 가시는 강권적인 은혜와 열심으로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진 것이다. 그리고 그의 후손을 세상 애급으로 들어 보내셔서 세상 속에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으로 장성하게 키우시고, 다시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어 분리시키시고, 40년 동안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하늘의 양식만을 먹이시고, 친히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지키심으로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은혜로 살아가는 당신의 백성으로 만들어 내신 것이다. 40년이라는 광야에서 하나님은 세상 속에서 세상 사람으로 살아간 옛 사람은 율법을 주어 완전히 철저히 죽어서 시체가 되게 하시고, 세상에 속하지 않는, 당신의 은혜로 광야에서 탄생된 새 사람만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들여보내신 것이다. 그런데 그 가나안 땅은 인간이 상상하는 모든 것이 완전히 구비된 낙원과 같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었다. 그 가나안 땅은 세상 모든 악인들의 집합 소굴이었다. 반드시 전쟁으로 하나하나 점령하여야만이 들어갈 수 있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친히 그들의 대장이 되셔서 당신의 백성들을 이끌고 악인의 소굴을 하나하나 점령하고 제거하는 전쟁을 거쳐서 가나안을 소유하게 하셨다.
천국이 내 안에 임한다는 것은 반드시 치려야 하는 전쟁을 통과하여야 하며, 그 전쟁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천국으로 이끄시는 그분이 친해 싸워주심을 보여주셨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쳐들어가 전쟁을 거쳐 하나하나 먹어서 점령한 것 같이, ‘나’라는 육신의 자아가 성령의 검으로 진리의 말씀으로 하나하나씩 깨지고 부서지고 십자가에 못을 박아 내 옛 죄인은 죽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되는 하늘나라의 원리로 천국이 내 안에서 견고하게 확장되어 감을 제시하셨다. 이 세상을 향한 욕망과 탐심과 자랑으로 나를 세상 신으로 쌓아올리는 모든 시도가 하나하나 부서지고, 이 세상 강도에게 핍박당하고 강탈당함으로 때로는 패배와 절망과 고통과 살 소망까지 끊어지는 내 자아가 철저히 죽는 십자가 죽음으로 끌려가게 된다. 즉 천국이 내 안에 임하게 되면 세상인으로 살던 ‘나’라는 존재는 천국의 침노에 의해 점령당하여 완전히 죽는 십자가 죽음을 반드시 통과하게 됨을 바울은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내 옛 죄인이 완전히 죽어야만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국이 내 안에 임할때 먼저 터져나오는 것이 바로 자신의 실체를 깨닫는 자각이다. 나의 실체가 백야에 드러나 ‘죄인 중의 괴수’임을 깨닫게 됨으로 실망을 가지게 되며, 거지 나사로와 같이 세상을 향하여 빈털터리로 버림을 받아 세상 사람들의 조롱거리로 땅바닥에 떨어지게 될 때 나를 끝까지 붙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감지하고 체험하게 되며,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 15:10) 함과 같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집요하게 붙들 게 된다. 반대로 이 세상에서 욕망과 탐심으로 세상 왕으로 군립하는 자에 대하여 다윗은, 악인은 이 세상에서 형통하여 재앙도 고난도 고통도 없고 오히려 힘이 강건하고 너무나 부유하여 소득이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며,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 교만이 하늘을 치솟는 듯하다고 표현하고 있다.
시 73장
2-7: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12-14: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 다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
17-19: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하나님의 사람은 종일 재난을 당하고 아침마다 징벌을 받고 모든 것이 헛됫것 같이 느껴지더라는 것이다. 다윗의 고백과 같이 성도는 종일 징계와 고통의 삶으로 이어지며, 바울의 고백과 같이 ‘종일 도살당하는 양’으로 해부되는 십자가 죽음으로 이끌려가게 된다. 세례요한도 자신이 열심히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로 자신의 모든 삶을 하나님께 완전히 드려진 자로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는 마지막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였지만, 감옥에 갇혀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자 잠시 실망하여 자신이 그렇게 열심히 증거 한 그 예수가 “기다리던 오실이가 맞습니까”라고 물어볼 정도였다.
이와 같이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살아낸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삶이 바로 천국에 의해 침노당하는 삶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우리 안에 임하는 삶이라고 성경은 반복하여 제시하고 설명하여 주고 있다. 내가 세상에서 완전히 해체되어 죽는 그 삶이 바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로 영화로운 그리스도의 신부로 탄생되어 영생으로 이어지는 복된 삶이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성도의 죽음을 복된 죽음이라고 성경은 말씀하여 주고 있다.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계 14:13).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마 5:10-12). 그러므로 천국은 이 세상 가치관으로 인식하는 힘과 능력과 부와 명예와 형통으로 나에게 임하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말씀이다. 천국은 내 안에 겨자씨 한 알로 누룩으로 들어와 있다. 보잘것없는, 세상 사람들에게 감추어져서 보이지 않는 아주 작은 겨자씨 한 알로, 밀가루 반죽 안에 감추어져 있는 누룩으로 들어와 있다는 말씀이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 17:20). 이는 필사적인 기도와 의심 없는 믿음으로 능력을 구하면 산도 옮길 수 있는 기적들이 일어나게 된다는 밖으로 나타나 보이는 현상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주님은 천국을 겨자씨로 비유하셨고, 그 천국의 겨자씨는 이미 당신이 택한 백성 안에 심겨져 있으며, 농부이신 하나님께서 그 씨가 생명이 잉태하여 열매 맺게 기르신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신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이 세상의 힘과 재물과 명예와 인기로 견고히 쌓아놓은 ‘나’ 라는 큰 산이 뽑혀나가게 됨을 말씀하신 것이다. 즉 아주 작은 겨자씨 한 알로 시작하신 믿음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내 안에 도사리고 있었던 그 고질고 바위 같은 ‘나’ 라는 산이 심판의 바닷속에 던져진다는 말씀이다. 그 상태가 바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형통이다. 내 안에 산더미로 쌓여있었던 마귀의 탐심과 욕심과 같은 죄악들이 십자가의 능력으로 몽땅 도말되는 죄사함을 은유하고 있다. 때문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라고 말씀하신 그 형통은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능력과 기적에 관한 육신에 관한 형통이 아니라, 반대로 내 안에 쌓여 있는 산더미 같은 죄악들이 몽땅 던져지는 죽음을 통과하여 새롭게 하늘나라의 아들로 탄생되는 영생의 형통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옥중에 갇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능력 주시는 자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하나님의 영생에 관한 진리의 형통이 자신에게 임한 그 감개무량한 은혜를 외친 것이다.
이와 같이 천국에 의해 침노당하는 자는, 이 세상 가치관으로 쌓아놓은 권세, 힘, 자랑, 부와 같은 세상 산, 즉 우리 안에 산으로 견고히 자리잡고 있었던 고질적인 죄악들이 이미 내 몸에 침투해 들어와 피가 되고 살이 된 손과 발과 눈이 짤려 나가고 뽑혀 나가는 늑탈과 고통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매몰차게 손, 발, 눈이 천국을 향하는 걸림돌이 되면 짤려버리라고 말씀하시고 그렇게 짤려나가는 것이 오히려 "유익하다"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게 침노하여 들어오는 하나님의 나라에 의해 ‘나’라는 자아가 해체되고 부정당하며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어야 하는 고통을 겪게 되며, 그렇게 죽어서 나라는 존재가 '없음'으로 비여질 때 나는 비로소 그리스도의 영으로 새 사람, 즉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새롭게 태어나게 되는 영생을 입게 된다는 말씀이다.
창세전 택함을 받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녀는 이 세상 속에서 작고 하찮은 겨자씨 한 알로 은닉되어 있기에 ‘세상이 너 회를 알지 못하며’ (요일 1:1),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것이고’ 또한 ‘박해할 것이며’ (요 15:18-20절)라고 말씀해주고 있다. 그럼에도 오늘날 교회와 교인들은 이 세상에서 유명한 교회로 이름을 빛내기를 추구하며, 업적과 공로들을 쌓아서 간증으로 사람들의 칭찬과 인기를 얻어내어 영웅 되기를 지향하고 있다. 분명 주님은 우리를 겨자씨 한 알과 같은 제일 작은 존재로 있는 그 자체가 바로 믿음이라고 말씀하여 주셨음에도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십자가 삶을 전하는 목회자도 지향하는 성도도 아주 드물다는 사실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세상 밭에 숨겨진 겨자씨 한 알과 같이 낮아지고 부인되는 은밀된 역할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신다. 그 겨자씨를 기르시고 가꾸시고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은 바로 농부의 열심이다. 그래서 주님은 분명 우리 성도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포도나무이신 예수에게 붙어있는 가지로 묘사하신 것이다. 그건 우리 자신의 힘과 열심으로 소금이 되고 빛이 되는 것이 아니라, 소금과 빛 되신 예수그리스도 안에 우리가 들어가 있기 때문에 그분이 우리의 모든 삶을 주관하시는 그분의 착한 행실이 우리를 통하여 터져 나오기 때문이다. 그분이 앞서 자기 부인의 십자가 삶을 살아내셨기에 당신의 백성들에게도 겨자씨 한 알과 같은 자기 부인의 십자가 삶으로 인도하신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영원히 함께 계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에게 하나로 연합된 신부로 영생을 사는 새 피조물이 된 것임을 (갈 2:20) 명쾌하게 겨자씨 한 알의 비유로 설명하여 주신 것이다. 이것이 역사 속에서 천국을 사는 성도의 겨자씨 믿음이며, 누룩처럼 부풀어 오르는 천국의 삶을 사는 복된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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