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3:9-20
9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나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바울은 앞에서 모든 인간은 거짓된 존재이며, 오직 하나님만이 신실하시다고 선언하고, 인간의 마귀적 실체를 본격적으로 냉철하게 폭로하며, 그럼으로 이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깨닫는 자도 없고 선을 행하는 자도 없다”라고 죄인에 대한 결론을 내린다. 즉 인간은 율법을 주어도 죄를 짓고, 율법이 없이 양심을 주어도 그것으로 죄를 짓는 철저한 완벽한 죄인이기에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들은 죄일 뿐 선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없다는 결론이다. 왜냐하면,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3:13-18)함이기 때문이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9)
바울은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육신이 ‘다 죄 아래에 있기에’ 율법과 할례를 내세우는 유대인의 낮음이란 절대 있을 수 없으며, 인간 자체가 바로 거짓된 존재이기에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즉 인간은 날 때부터 죄의 지배를 받아 죄의 종으로 사는 철저한 죄인임을 성경 말씀을 인용하여 10절부터 18절까지 죄의 목록들을 나열하여 증거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인간 자체가 바로 죄인이기에 마음에서 행위에서 나오는 모든 것들은 악일뿐 선이라는 것이 하나도 없음을 지적하셨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 7:21~23). 이것이 “죄 아래 있는” 인간의 실체이다.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의 생명력으로부터 차단이 된 그 상태가 바로 죄이며 죽음이다. 이를 바울은 정확하게 모든 인간은 “허물과 죄로 죽었다”(엡 2:1)라고 인간을 죽음으로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생명력으로부터 차단된 상태를 “육체”라고 부르고 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창 6:3). 하나님의 신이 떠나 육체가 된 상태가 바로 ‘죽음’이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시기 위해 노아 홍수의 심판으로 육체를 몽땅 쓸어버려 ‘없음’으로 만드시셔고 오직 택함을 받은 노아 8식구만 은혜를 입혀서 죽음에서 구원하여 주셨다. 그리하여 바울은 하나님을 떠나 육체가 된 상태를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 ‘죄 아래 놓인’ 심판의 상태로 표현한 것이다.
아직 천지가 창조되기도 전에 먼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인 무의 상태를 주신 것은, 모든 존재는 하나님의 은혜의 덮음과 빛(예수그리스도)의 임재가 없이는 혼돈과 공허에 시달리는 어둠에 갇힌 죽음의 존재임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첫 인간 아담의 죄로 이 세상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저주를 받음으로(창 3:18) 이미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을 달리고 있음을 제시하신 것이다. 때문에 인간은 가시와 엉겅퀴로 저주받은 땅에서 난 존재이며 근본적으로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음으로 땅의 썩은 것을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는 마귀의 자식이며,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 아래 놓여 있음으로 하나님의 구원 대상으로 은혜를 입어야만이 살 수 있음을 나타내신 것이다. 인간은 하늘나라 생명의 진리를 주어도 알아보지 못하고 이 땅의 썩은 것으로 바꾸어 육체의 탐심을 채우며 그 주신 진리로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땅에서 난 육신은 땅으로 되돌림을 받는 죽음으로, 이 땅은 죽은 시체를 채워서 멸망으로 가는 심판으로 정해 놓으셨다. 이와 같은 실상을 바울은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다”(3:9)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 모든 인간은 마귀의 본성으로 육체의 탐심을 따라 범죄하며 죄를 쌓아서 스스로 자신을 멸망의 지옥으로 밀어 넣는 심판을 자초하고 있다. 즉 흙을 입은 육은 사단이 지배하는 이 땅에서 살고 있기에 사단이 원하는 죄를 행하게 되며 결과는 죽음이며, 그것이 흙을 입은 육체의 실상이다. 양심의 법으로 사는 이방인이나 율법으로 사는 유대인이나 상관없이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죄인으로 정죄 받아 심판을 받게 됨을 바울은 지적하고 있다.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3:9).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 셨도다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1-3). 이것이 땅에 속한 죄인의 실체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 14:6)라고 선언하셨다. 예수님이 자신을 “길이다”라고 제시하신 것은, 이 세상 본체가 “혼돈과 공허와 흑암”(창 1:2)이며, 때문에 ‘혼돈과 공허와 흠악’의 죽음에 갇혀 사는 인간에게는 살아 나갈 “길” 이 없다는 말씀이다.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구원과 생명과 천국으로 향하는 유일한 길임을 선언하셨다. “내가 곧 진리다”라고 제시하신 것은, 이 세상 “혼돈과 공허와 흑암”(창 1:2)에서 태어난 모든 육체는 참이 아니라 거짓된 존재이며 때문에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들은 거짓된 것들이며 선한 것이 나올 수 없음으로 “의인은 없나나 하나도 없다”는 뜻이다. 즉 진리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속한 것이며 그 진리 본체가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심을 선언하셨다. “내가 곧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 세상은 생명이 없는 죽은 세상이며, 즉 인간은 죄를 쌓아서 죽음으로 달리고 있고 이 세상은 죽은 시체를 쌓아서 종말을 고하게 됨을 제시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모든 인간은 “다 죄 아래 있으며”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라고 오직 예수그리스도 안에만 생명이 있으며, 그분만이 유일한 진리와 구원과 영생이시며, 예수 이외에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어둠이요, 죽음이요, 거짓이요, 지옥임을 제시하셨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제시한 모든 인간은 다 죄에 사로잡힌 죄의 종이기에 누가 더 낮다고 말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3:9).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나 하나도 없으며 (10)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바울은 죄인의 개괄적인 본질을 자신의 말이 아닌 성경 말씀의 권위로 시편 말씀을 인용하여 (시 14:3/ 53:3) 자신이 제시하고자 하는 핵심을 강조하고 있다.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의인에 대한 측정 기준은 사람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정하시며,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도달할 수 있는 자는 이 땅에 속한 육체가 아니라 하늘나라에 계시는 점도 흠도 없으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 한분뿐임을 계시하고 있다.
그리면 왜 이 세상에는 의인은 없나나 하나도 없다고 성경은 선언하고 있는 것일까?
창세기 서두에서, 아직 천지가 창조되기 전에 우주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인 무의 상태였음을 제시하고 있다. “지구는 아무 형태도 없이 텅 비어 흑암에 싸인 채 물로 뒤덮여 있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에 활동하고 계셨다” (창 1:2 현대인 성경).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 본체가 바로 혼돈이고 공허이고 흑암의 죽음임을 먼저 드러내어 보여주신 것이다. 우리의 본 상태, 즉 창세전 인간의 마음 상태가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정해져 있었다는 계시이다. 하나님께서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뒤덮인 이 땅의 흙으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실체를 보여주고 깨닫게하기 위해 곧바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총칭인 ‘선악과나무’를 죄와 죽음의 상징으로 주시면서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라는 첫 계명을 붙여주셨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티끌로 육을 입은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계명이 곧 구원과 생명임을 알지 못하는 무지와 미련함으로 영생을 약속한 ‘생명나무’를 무시하고, 오히려 ‘죽음’이 선포된 ‘선악과’를 택한 것이다. 인간은 생명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나무의 실과를 먹음으로 죄에 빠지게 되었고 이내 죽음과 함께 땅에 저주가 임한 것이다.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7-19). 그렇게 죽음을 향해 썩어가는 인간에게서 무슨 의가 나올 수 있으며,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가 있겠는가! 이르기를, “의인은 없나나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3:10-12).
이와 같이 인간의 본 상태, 옛 사람은 창세전 ‘혼돈, 공허, 흑암’으로 뒤덮인 흙으로 피조 된 이 땅에 속한 육체이기에 처음부터 하늘나라에 속한 선과 의란 존재하지 않았으며, ‘죽음’으로 정해져 있음으로 바울은 “다 죄 아래 있다”라고 표현한 것이다. 죄와 사망에 갇힌 육체로는 하늘나라와 하나님을 알 수가 없음으로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다'(3:11-12)라고 정확하게 육체의 실체를 지적한 것이다. 땅에 속한 육체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물 한 방울, 티끌, 메뚜기, 짐승, 초개, 진토, 거름 무더기’(사 40:15-17/ 사 40: 22-24/ 시 49:20/ 시 113:7)와 같은 존재일 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무지와 어리석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욕되게 하는 자들을 향하여 개와 돼지, 일곱 귀신 들린 자, 군대귀신 들린 자로 묘사하고, 회칠한 무덤, 독사의 새끼라고 부르신 것이다. 그리고 진리를 대적하는 인간의 추악한 실체와 결국이 어떤 것인가를 똑똑히 보여주시기 위해 광인에게서 나온 군대 귀신을 2천 마리의 돼지 떼에 들어가게 하시고 물에 빠져 몰살당하게 하신 것이다. 한마디로 인간의 마음 상태가 바로 2천 마리의 돼지가 들어있는 완전히 불가능한 추악한 상태이며, 아무리 청빈의 삶으로 깨끗하게 소제하여 도덕과 윤리적으로 의롭다고 성화를 자칭하여도 귀신들린 상태에서 격발되어 나오는 것은 오직 죄 일뿐이며 오히려 더 많은 더 악한 귀신들을 불러들여 완전한 마귀의 소굴로 만들어 심판의 근거를 쌓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인에게서 나오는 행위가 바로 마귀의 행사이며, 결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선고하신 것이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마 23:33).
인간의 실체가 바로 먼지에서 나와 먼지의 허망한 삶을 잠시 살고 다시 먼지로 돌아가는 ‘없음’이다. 이르기를,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잠 31:30). “진실로 천한 자도 헛되고 높은 자도 거짓되니 저울에 달면 들려 입김보다 경하리로다”(시 62:9). 이와 같이 헛되고 거짓된 없음에서 어찌 있음이 나오며, 무슨 선한 것이 나오며, 하나님께서 받을만한 가치가 나올 수 있겠는가! 티끌이 아무리 반항하고 대적해도 하나님의 뜻에 영향을 줄 수가 없으며, 또한 아무리 열심을 부려도 하나님께서 받을만한 하늘의 선이 나올 수가 없으며,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보탬이 되는 그 어떤 가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이다. 개미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하여 문명을 일으키고 위대한 업적들을 이룬다고 하여도 인간들 눈에는 빨리 치워 버려야할 쓰레기들이다. 그럼에도 티끌에 불과한 개미와 방불한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서 공로와 업적을 논하며, 행위의 의로움을 주장하며, 하나님처럼의 행세를 한다면 얼마나 무지하고 어리석고 미련한 짓인가! 인간은 처음부터 자아에만 굶주린 자들이기에 하나님을 알지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도 없는 패역한 존재임이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인간은 죄만을 뿜어내는 열린 무덤이며,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라고 정확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 (11)
인간의 특징이 바로 깨닫지 못하는 무지이다. 성경은 영적 깨달음이 없는 인간을 짐승으로 묘사하고 있다.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 49:20). 인간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을 전부라고 생각하고 이 세상의 것에 목숨을 걸고 살아간다. 보이지 않는 영원한 나라와 영생을 입혀주시는 하나님을 아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며 보여주고 들려주어도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다고 증언하고 있다.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우준한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렘 4:22). 만약 인간이 신을 찾는다면 그것은 육체의 탐심을 채워주는 이 세상 공중권세를 잡고 육신을 지배하는 마귀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인간을 “마귀에게 사로잡혀 죄에 종노릇 하는”(딤후 2:26) 죄의 종이기에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다”(3:12)라고 죄인의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인간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영에 관한 일이다. 육신으로 취득하는 피상적인 지식이 아니라 영이신 하나님을 영으로 아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하늘나라에서 내려오는 계시이며, 그 계시는 하나님이 직접 찾아와 주셔서 나의 죽은 영을 살려내어 주심으로 영으로 하나님을 알고 말씀을 깨닫게 하시며 영으로 새로운 피조물, 즉 하나님의 아들로 잉태케 하는 영적 거듭남을 겪게 하신다. 이는 인간이 배워서 취득한 지식과 추리로 알아가는 우리 쪽에서 노력하여 깨달아지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함으로(고전 1:21) 이 세상에는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3:11-12)라고 육체의 한정된 무지와 무익함을 지적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하늘나라에서 이루어진 영의 묵시대로 이루어지는 일이며, 이는 오로지 영의 계시로만이 이해되고 깨달아지는 하늘나라에 속한 영역이다. 영의 계시는 인간의 차원에서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과 영의 계시 속에서 그분이 친히 나의 영적 눈과 귀를 열어주심으로 그분을 인지하게 되며, 깨닫게 되는 일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친히 주관하시는 영역이기에 이 세상에 속한 육체로는 절대로 그분을 알 수도 깨달을 수도 없다. 그리하여 바울은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고 단정한 것이다.
둘째, 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죄로 오염된 혼적인 지성으로는 이해하거나 깨닫을 수가 없다. 이 땅의 티끌로 지음을 받은 ‘죽음’으로 정해진 육체로는 무한하신 영생의 하나님과 ‘영원’이라는 하늘나라의 영역을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르기를, “한가지로 무익하며”(롬 3:12), “하나님의 사정은 하나님의 영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리라”(고전 2:11). 이 세상 땅에서 잉태된 육체는 오로지 이 세상의 것에 마음이 가 있으며, 이 세상의 것을 추구하는 탐심으로 ‘자아’에 집착되어 있기 때문에, 땅의 것을 보고 말하며, 땅의 권세를 잡은 사단의 종으로 육체의 탐심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일 2: 16)을 쫓아 사는 오만의 악으로 끝임없이 썩어짐의 배설물들을 생산해 내어 썩어짐의 흙으로 다시 돌아가는 운명을 가지고 있다. 이를 바울은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둔다”(갈 6:8)라고 말한 것이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죽음에 갇혀 사는 인간이 아무리 지성으로 뛰어났다고 한들 어찌 죄인의 혼적 지성으로 보이지 않는 하늘의 일을 논할 수가 있으며, 어찌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가 있으며, 어찌 하나님의 의로운 역사를 운운할 수가 있겠는가! 이르기를,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어찌하겠으며 음부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 그 도량은 땅보다 크고 바다보다 넓으니라”(욥 11:7-9) 함과 같이 이 땅의 존재는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가 없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라고 바울은 정확하게 육체의 한계와 무지를 지적하고 있다.
셋째, “하나님은 영이시다”(요 4:24). 그 영의 하나님이 바로 삼위 하나님이시며, 창세전에 함께 인류 구원의 계획을 세우시고, 묵시로 이루셨으며, 하늘에서 이룬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시간과 공간 안에서 물질적 세계를 창조하셨다. 그리고 사람이 되셔서 인간을 찾아와 주셨고, 십자가에서 희생제물이 되어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주시는 방법으로 구원을 성취하여 주셨으며, 현재 우리 안에 성령으로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분은 우리 안에서 그분을 알고 믿고 의지하며 그분의 뜻을 헤아리는 영적 깨달음을 주신다. 즉 성령님이 나에게 영성을 열어주심으로 내 영이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그분이 내 아버지가 되심을 인지하게 되며, ‘하나님은 나를 낳으신 아버지이심을’ 믿게 하신다. 이것이 아버지께로부터 오는 영적 계시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 하시느니라”(고전 2:10) 라고 말씀하고 있다.
성령님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거룩한 영이시기에 우리가 영의 아버지를 인지할 수 있는 유일한 인도자이시며, 진리의 말씀을 영으로 깨닫게 하시는 계시를 주시며,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증거하는 증인이시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요 14:26; 요 16:13) 라고 성령님의 본질과 사역을 가르쳐 주셨다. 성령님은 만세전에 감추어두신 아버지의 비밀을 온 인류에게 알리고 전파함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며, 예수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고 영접하는 믿음을 주시며, 아버지의 아들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거듭나는 증거를 낳는다. 또한 성령님은 아버지의 구원 비밀을 깨달은 성도를 통하여 땅 끝까지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을 하신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라고 우리에게 복음의 사명을 감당케 성령의 능력을 부어주신다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성령님이 우리 영을 열어주시는 목적은 우리에게 향한 아버지의 참 마음, 구원의 은혜와 참 사랑을 깨닫고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시며, 영으로 새롭게 태어나 영생을 얻게 하시는데 있다. 하지만 성령의 계시와 체험이 없다면, 아무리 성경을 통달하고 외운다 할지라도, 아무리 내 몸을 던져 하나님을 섬긴다 할지라도, 그 안에 살아 역사하시는 진리가 나를 자유롭게 할 수 없으며, 내 안에 예수 생명이 잉태될 수가 없으며, 나에게 향한 그분의 참뜻을 깨달을 수가 없다. 인간에게 향한 아버지의 마음과 참 사랑은 오직 성령에 의해서 계시되며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바울은 성령을 ‘지혜와 계시의 영’이라 부르고 그 계시의 영이 성도들에게 임하여 하나님을 깊이 알게 하고 부르심의 소망과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다(엡 1:18). 성령 거듭남이 없는 육체로는 절대로 하나님을 알 수도 깨달을 수가 없기에 육은 무익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요 6:63).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알거나 진리를 깨닫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유대인들은 4천여 년 동안이나 하나님을 섬겨왔다. 그들에게는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고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율법과 제사와 할례가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며 중개 역할을 하는 선지자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의 참 뜻과 마음을 알거나 깨닫지 못하여 수시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며 불신과 우상숭배로 스스로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죄를 깨달으라고 주신 율법으로 이 땅의 허탄한 복을 추구하였고 육신의 탐심을 채우는 허된 일에 전념하였기 때문이다. 율법과 제사 속에 감추어 주신 예수그리스도의 구원과 생명을 읽어내고 깨닫는데 무지하여 영으로 드리는 신령한 예배를(요 4:24) 드릴수가 없었다. 그들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진정한 의도, 즉 언약의 성취자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읽어내지 못함으로 그렇게 손꼽아 기다리던 약속의 메시아를 핍박하고 거역하였으며, 율법으로 죄를 깨달은 것이 아니라 반대로 율법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죄인’이라 정죄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임으로 스스로 구원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율법을 지키고 행하는 일에 인생을 걸고 있었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는 대가 없이, 아무런 공로도 업적도 없이,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메시아 복음을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은 그들이 굳게 지키는 율법을 깨버리고 아무런 대가도 조건도 공로도 없는 세리와 창녀와 같은 죄인을 정죄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에게 용서와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시며, 안식일에 병든 자를 고치시며, 귀신을 쫓아내시며,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심으로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에게는 용서와 긍휼과 자비를 벳푸시고, 상대적으로 열심히 율법과 제사로 하나님을 섬겨드리며, 율법 행위로는 흠이 없는 의인이라 자고하는 율법주의 자들을 향하여서는 ‘독사의 자식’, ‘회칠한 무덤’, ‘마귀의 아들’, 일곱 귀신 들린 자, 쇠사슬로 묶어놔도 감당이 안 되는 목이 굳은 군대귀신 들린 자, 돼지로 묘사하고 저주하셨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그러면 우리 유대인이 나은 점이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미 내가 지적했듯이 유다인들이나 이방인들이나 다 같이 죄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입니다”(3:9 공동번역)라고 지적한 것이다. 그러므로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3:11-12)라고 선언을 내린 것이다. 이와 같이 율법적 행위와 육적 지성과 의지로는 영이신 하나님을 인지할 수도 알 수도 없으며 진리를 깨닫을 수가 없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율법을 주신 진정한 의도는 죄인의 실체를 깨닫고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이며 그래서 율법을 의롭고 선한 법이라고 바울은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롬 7:12). 즉 죄인이 그 율법 속에서 의롭고 거룩하고 선한 하나님이 이루시는 선한 구원을 보게 됨으로 자신이 철저한 죄인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는 것이다. “내가 바로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라는 철저한 자각과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와 자비를 구하는 회개가 나오게 될 때 진정 율법의 진의를 깨달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즉 율법을 주신 의도는, 이 세상 “혼돈과 공허와 흑암”에서 태어난 인간 자체가 바로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이며, 육체에서 나오는 모든 행위는 죽은 시체에서 나오는 추악하고 더럽고 거짓된 것들임을 알고 깨닫아라는 것이다. 바울은 에덴동산 아담 안에서 모든 자가 이미 죽었다고 분명이 제시하고 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 율법으로 죽은 자임을 인정하고 그리스도 안에만 생명이 있음을 깨닫고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라는 말씀이다. 바울이 율법을 ‘죄와 사망의 법’이라고 제시한 것은, 율법을 지켜서 산 자가 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 죄를 쌓아서 사망의 심판으로 갔기 때문이다.
3년이나 동거 동락한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3년이나 함께 있으면서, 예수님이 일으키신 수많은 이적과 표적을 눈으로 직접 보고 체험하였음에도 예수님을 진정 알지 못하였다. 진리의 말씀을 매일과 같이 들려주어도 깨닫지 못하였고, 아버지께서 정하신 뜻,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여러 차례 말씀하셨음에도 전혀 깨닫지 못하였다. 비록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고 고백은 하였지만, 그 고백은 베드로 자신에게서 나온 믿음의 고백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고백이었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 베드로는 그 후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간청하여 만류하다가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질책을 받기도 하였으며, 예수님을 부인하고 계집종 앞에서 예수님을 저주까지 했던 제자였다. 마찬가지로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을 이해하지 못함으로 실망하여 뿔뿔이 도망갔지만, 오순절 날,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자 예수님의 말씀과 제자들에게 향한 뜻을 알고 깨닫게 된 것이다. 그들은 성령님의 계시로 아버지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주신 참 뜻을 깨닫게 되었고, 그 무궁한 사랑을 깨달은 제자들은 비로소 나를 성전 삼고 좌정해 계시는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목숨을 다하는 순교로 십자가 복음을 전파하는 위대한 사도들이 된 것이다.
사도 바울의 깨달음
사도 바울은 회심 전에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 율법 신학박사였다. 그는 율법적 행위로 하나님을 섬기는데 흠이 없다고 자고하였고 최고의 열심을 자랑하였지만, 자신이 굳게 지켜온 율법으로 오히려 메시아를 핍박하고 교회를 박해하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에 앞장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비록 육의 지성으로는 하나님에 대하여 박식한 자였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계시와 체험이 없었기 때문에 영으로는 예수그리스도를 알아볼 수도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가 없음으로 그리스도를 핍박하는 원수가 된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고후 3:6), 율법은 ‘죄와 사망에 이르게 하는 법’(롬 8:2) 이라고 자신의 뼈저린 체험을 고백하게 된 것이다. 그 후 부활의 예수를 만나 영으로 거듭난 바울은 완전히 새 사람이 되어 성령의 계시로 아버지의 진정한 마음과 은혜를 깨닫게 되었고 십자가 복음을 목숨으로 전파하는 의로운 사도가 된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내가 되었습니다. 나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어느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 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고전 15:10).
여전히 아버지의 마음과 참 뜻을 깨닫지 못하는 오늘의 현실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은 아버지의 마음, 그분이 나를 택하신 사랑, 나를 구원하신 뜻, 생명의 후사를 낳는 복음 전파에 영성을 열어가기보다는 이론과 교리, 형식과 전통과 규례, 행위와 섬김, 업적과 공로 등 인간이 주도가 되고 인간의 시각에서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일을 만들어 내어 자신들의 의와 영광을 챙기고 있다. 뿐만아니라 성경의 진리를 윤리와 도덕을 가르치는 훈계로, 이 세상에서 허탄한 복을 받아내는 성공의 비결로 잘못 가르치고 배우고 있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유와 생명을 주시기 위해 자신의 육체로 페 하신 율법을 다시 일으켜 세워 스스로 자신들을 율법의 종으로 묶어놓고 굳게 지켜 행하는 행위의 의로움을 추구하며, 그 율법 지킴의 행위와 공로로 의를 쌓아서 이 세상 복과 이름을 높이는 가치관으로 이용하는 종교적 신앙이 교회마다 보편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령 말씀은 오직 구원과 생명에 관한 하늘나라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아버지의 뜻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우리에게 전달하여 주시는 진리이다. 아버지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사 값없이 구원과 생명을 주시는 사랑의 마음을 기록한 구속사이다.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 6:28-29);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라고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믿는 것이 곧 ‘영생’이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얻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 행위를 요구하지 아니하셨다. 열심이 기도하며, 구제하며, 예배에 빠지지 말며, 십일조를 빼 먹지 말며, 구제하며, 죄를 짓지 말고 의롭게 살아야 한다는 등, 현재 교회에서 강요하는 행위들을 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하나님을 알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며 너희가 추구하는 영생이라고 말씀하셨다(요17:3 / 6:29). 왜냐하면 그분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 14:6)이시기 때문에 그분을 알고 믿는 것이 곧 구원과 영생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오로지 당신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시며,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의 앞으로 나오게 하신다. 이르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다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14:6-7). 즉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것이 곧 구원과 영생임을 제시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모든 일은 태초에 정하여진 하늘의 묵시대로 그분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일이며, 그분이 우리를 움직이고 끌고 가시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우리에게 의무와 행위를 요구하지 않으셨다. 그분 홀로 구원을 이루어 주시고,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아무런 대가도 조건도 없이 그분을 알고 믿는 믿음을 주시고 그 믿음을 의롭다 하심으로 구원과 생명을 얻게 하셨다. 내가 그분의 일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오히려 나에게 구원과 영생을 주시기 위해 열심히 당신의 의를 나타내시는 선한 일을 하고 계신다. 나를 통한 그분의 선한 일을 깨닫게 될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그분을 신뢰하게 되며, 그분의 진정한 사랑을 깨닫게 되며, 바울의 고백과 같이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시는”(갈 1: 15-16) 아버지의 진정한 뜻이 내 마음에 전달됨으로 목숨을 다하여 오직 복음을 전파하는 영광스러운 일을 감당하게 된다.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2)
'선'이란 창세전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 즉 우리에게 향한 구원과 생명을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사랑으로 입혀주심을 성경은 말씀하신다. 그 구원의 선을 이루시는 분은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 한분이시기에 예수님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10:18)라고 선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시는 구원과 영생임을 제시하셨다. 즉 하나님은 '선'의 근원이시며 생명의 본체이시기에 그분이 계획하시고 일으키시고 성취하시는 모든 일은 '선'이시다. 본질상 그분은 '선'이시며 '의' 이시며 ‘거룩'이시며 '영광'이시며 '영생'이시기 에 이 역사를 선으로 주관하시며 선으로 성취하시며 당신의 자녀들에게 영생을 입혀주시는 선을 행하신다. 그러므로 구원의 선을 행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이시기에 바울은 이 세상에는 선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음을 “선을 행하는 자는 없다”라고 선언한 것이다. 즉 바울이 말하는 ’선‘은 우리가 생각하는 행위의 의로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이루어주신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 한분에게서만 나오는 구원과 영생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선한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시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인간은 모태로부터 죄인으로 형성하여 출생하면서 그 마음이 부패하기 때문에 절대로 영이신 하나님을 알 수도 또한 생명의 말씀에 순종하는 ‘의로움’이란 나올 수 없음을 첫 인간 아담의 타락으로 증명된 것이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바로 마음'(렘 17:9)이기에 예수님은 인간의 마음 상태를 무덤으로 묘사하셨다.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 23:27-28), 인간의 마음이 바로 무덤 안에 있는 썩은 시체와 같이 온갖 탐욕과 방탕과 외식과 불법과 더러운 것들로 가득함으로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는 말씀이다. 바울도 동일하게 인간의 실체를 열린 무덤으로 표현하고 있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3:13-18). 그러므로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2)라고 선언하고 있으며, 그 원인은 ‘모든 인간은 다 죄에 갇혀 있는 거짓된 존재이며’(3:4,9), 열린 무덤과 같이 육체에서 나오는 모든 것들은 썩어서 부패된 더러운 죄일 뿐 선한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 모든 육체는 죽기 위해 태어난 자들이며 때문에 하나님 없이 사는 모든 존재는 멸망으로 끝나는 짐승임을 성경은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한 것을 훼방하고 저희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벧후 2:12). “아무리 영화를 누리며 살아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짐승처럼 죽으리라”(시 49:20). 사람은 본래 이성 없는 짐승이며 죽기 위해 태어난 존재임을 제시하고 있다. 짐승처럼 죽어가는 존재에게서 무슨 의가 나오며 선한 것이 나올 수가 있겠는가. 절대로 없다는 것이 바울의 강력한 주장이다. 이 역사는 인간들이 ‘없음’으로 부정되고, 하나님의 ‘있음’, 즉 예수그리스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드러내고 인정하고 믿고 구원을 얻는 예수그리스도로 정착되는 역사이다. 즉 하나님이 그려내시는 그림만 그리는 것이 인생이며 절대로 인간이 주도하는 인간 귀결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짐승과 같은 인생과 역사가 내어 놓는 행위가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무슨 이득이 되며 무슨 방해가 되겠는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처음부터 하나님은 영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인간에게 천하고 천한 흙으로 육을 입혀 주셨다. 그리고 그 육체의 나약함과 무익함을 드러내기 위해 선악과나무를 주셨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 곧 죄와 죽음임을 알게 하기 위해 “먹지 말라"라는 계명을 주셨다. 즉 창세전 정하신 영의 영원한 구원을 이 땅에서 이루시기 위해 육의 타락을 허락하셨다. 바울이 깨닫고 말씀하기를,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갈 3:22). 오직 선하신 예수그리스도 한 분의 의로운 순종으로 구원을 이루시고,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생명을 선물로 주시기로 미리 정하셨다. 그런데 기적 중의 기적은 만물보다 부패하고 패역한 인간의 마음 안에 그분이 친히 뚫고 들어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고 우리 안에 새 마음을 바꾸어 주시기 위해 자신의 영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시키는 ‘거듭남’이라는 방법을 택하셔서 그분의 완벽한 은혜 안에 스며들어 하나로 완성하신 데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이시며, 선한 분은 오직 삼위 하나님 한분이심을 제시하신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혜의 복음을 확실하게 제시하기 위해 로마서 3장에서 인간의 본 상태가 바로 “죄에 사로 잡힌” 죄의 종이며, 육체로는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3:10-12)라는 죄인의 본질적 무지와 어리석음을 먼저 폭로하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