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영적 계시

로마서 (6:17-23) [2] 의에게 종이 된 삶이란? / 의에 대하여 자유 하였느니라 / 인간에게 자유란 있는 것일까? / 사망이란, 영생이란?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2023. 12. 23. 05:29

 

롬 6: 17-23

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8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20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21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의에게 종이 된 삶이란?

(1). 의인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종이 된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고상하고 영광스러운 신분이다

성경에서 “종”은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과 총애를 받아 하나님으로부터 쓰임을 받은 구별되고 영광스러운 지칭과 신분이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택정함을 받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충실한 종의 삶을 살아낸 아브라함, 모세, 여호수아, 다윗과 선지자들, 모두가 겸손하게 자신을 ‘하나님의 종’ ‘주의 종’으로 부르거나 불렸으며, 자신의 ‘종’의 신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충성을 다하였다. 예를 들면, 바울은 스스로 자신을 예수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부름으로 '작은 자' – 바울로서 오직 예수그리스도에게 속하여 예수의 복음을 위해 자신의 전부를 드린 충실한 종이었다. 그는 자신의 고백과 신조로 철저하게 종의 삶을 삶아냈기에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다'(롬 14:8)라고 절대적으로 예수께 소유된 존재임을 당당하게 자랑스럽게 외친 것이다. 또한 죄로 죽어가는 영혼들을 섬김으로 예수에게로 인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죽어가는 영혼들이 하나님의 의로운 아들로 살아 올라오는 그 복음을 위해 태어났고, 그것이 살아가는 유일한 소망이기에 “모든 사람의 종”(고전 9:19) 이라고 부르며, 죽든지 살든지 그리스도만 존귀케 하기를 원한다고 부르짖는 것이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0-21).

(2). 종은 주인을 신뢰하며, 시키는 모든 일에 절대적으로 복종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바울이 자신을 ‘예수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분명하게 밝힌 의도는, 자신이 하는 모든 일(복음사역)이 자기의 의지나, 선택과 결정으로 되어 지거나 행사하는 일이 아니며, 또한 자기의 이름을 높이며 자신을 자랑하는 의를 세우기 위한 것도 아니며, 전적으로 성령님이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사역이며, 자신은 오로지 종으로 순종과 의무를 하였을 뿐임을 확실하게 밝히기 위함이었다. 이르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롬1:1) 함과 같이 자신의 의지와 선택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친히 택하시고 부르시고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로 세워주셨기 때문에,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열심임을 확실하게 제시하고 있다. 바울은 다만 주님을 굳게 믿고 시키고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으로 이끌려 가는 ‘종’으로 충성하였음을 분명하게 밝힘으로, 종은 주인이 시키는 일에 절대적으로 복종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제시한다. 바울은 죄인중의 괴수와 같은 자신을 택하여 부르셔서 당신의 의로운 사역에 동참시켜 그릇으로 사용하여 주시는(행 9:15-16) 은혜에 너무나 감격하여 자신을 기꺼이 내어드리는 순종으로 충성하기를 원하는 진실한 마음과 소명을 표현하여 “예수그리스도의 종 바울”이라고 부른 것이다.

(3). 충성된 종은 그 어떠한 역격 속에서도 종의 신분을 잃지 않고 순종으로 끝까지 주인을 위해 사는 자이다

종은 자기의 생각으로 일을 계획하거나 선택하거나 결정하는 그 어떤 권한도 없다. 주인의 명령에 그 어떤 핑계도, 거절도, 불평도, 또한 수고와 공로에 대한 보답이나 대가를 기대할 수도 없는 것이 종의 신분이다. 주인과 일치하게 동행함으로 주인의 뜻이 곧 자신의 뜻이며, 주인의 말씀과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할 의무만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는 자가 바로 충성된 종이다. 그 충성된 종의 삶이 어떤 삶인지를 바울은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 11-13). 바울은 감옥과 열악한 환경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라고 담대하게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주님이 주신 모든 환경과 모든 일에 순종하는 종의 삶 그 자체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여 그로 하여금 모든 것을 감당하도록 붙들어 주셨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그 어떤 고통과 고난과 매 맞는 핍박과 최악의 환경과 조건에서도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며 기도하며 감사하며 평강을 유지하라고 권고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데살전 5:16-18). 사랑하는 주님 안에 함께 거하는 그 사랑의 권능으로 하늘에서 부어주시는 놀라운 은혜로 말미암아 그 어떠한 역격 속에서도 묵묵히 믿음을 잃지 않는 순종으로 종의 사명을 충실히 감당할 수가 있었음을 고백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는 이와 같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체질로 예수그리스도에게 속한 의의 ‘종’으로 거듭났기 때문에, 오로지 하늘에 소망을 두고 예수를 위해 당하는 고난과 핍박과 수모를 즐겨 받으며, 그 어떠한 채찍도 옥에 갇히는 것도 돌로 치고 톱으로 켜는 것과 칼에 죽는 극심한 고통과 절망과 시험 속에 집어넣더라도 세상이 하늘의 평화를 사는 성도를 감당치 못한다고 증거하고 있다(히 11:35-38). 이것이 십자가 의로 거듭난 예수그리스도의 종으로 사는 성도가 지향하게 되는 하늘나라의 삶이다. 그리하여 예수그리스도의 종이 된 바울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라"(고전 2:2),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 6:14)라는 참된 종의 고백을 하게 된다. 바울만큼이나 복음을 위해 고난을 많이 받은 이도 없으며, 바울만큼 복음으로 산 자도 없다.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고난을 기뻐하노니”(고후 12:10)라는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종의 삶을 자랑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믿음이 그를 확고부동한 진리로 세워주셨기 때문이며, 주님이 바울 안에서 모든 삶을 주관하고 있었기에 자신이 겪는 고난이나 핍박이나 버림이나 멸시와 죽음까지도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시기 위한 선한 의도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도는 사도 바울과 같이 자신의 정체성을 철저히 깨닫고 심령이 가난한 작은 자로 내려가 오직 십자가 예수그리스도만을 의지하고 전파하는 예수그리스도의 종의 신분으로 이 세상을 잠시 나그네로 사는것뿐이다.

(4).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종의 삶을 살아내신 우리 주님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모든 권세를 지니신 지극이 높으신 우리 주님도 자신을 ‘종’이라 하셨다. 그분은 진정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은 ‘종’이라 불렸으며, ‘종’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자신을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온전히 드림으로 우리를 이 세상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주셨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베푸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신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사 42:1-7). 이와 같이 이사야의 예언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종’이 되셔서 이 세상에 구원자로 오셨으며, 예수님도 자신의 구원 사역을 ‘종’으로 말씀하셨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바울은 종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하여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또는 본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 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라고 하나님의 종으로 오셔서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셨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예수그리스도의 종”이 됨이 얼마나 귀하고 영광스러운 신분이며, 또한 그 어떠한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종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로지 ‘순종’과 ‘믿음’뿐임을 바울은 자신이 살아낸 험난한 종의 삶으로 “의에게 종이 됨이‘ 어떤 것인지를 말해주고 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란 바로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종의 자세와 그 어떠한 역경과 고난과 시험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다. 바울은 자신의 정체성을 깊이 깨달은 자로서, 죄인중의 괴수로 심판을 받아 마땅한 사망의 자리에서 은혜를 입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세워주시고, 믿어주시고, 도구로 사용하여 주시는 그 배례에 너무나 벅참으로 자신의 전 인생을 예수에게 걸었으며 예수에게 붙잡혀 예수그리스도의 종으로 사는 것이 가장 고상한 삶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모든 사람을 향하여 십자가 복음에 순종하여 의에 종이 되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고 또 원한 것이다. 그 길만이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6:23).

20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20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21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종이 된 옛사람 ‘그때’ 와 ‘지금’ 영생에 이른 새 사람

바울은 자신의 서신 서에서 종종 “전에, 본래, 그때” ( 6:17, 20, 21) 와 “이제, 지금” ( 6:19, 21, 22), 이와 같은 대조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거듭나기 전 죄의 종으로 있었던 옛 사람의 모습과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 새 생명을 얻은 성도의 의로운 모습을 극적으로 대조하고 있다. 바울은 20절과 21절에서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지만 얻은 것은 부끄러운 사망이었다’라고 지적하고, 이내 그 다음 22절에서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6:22)라고 반전을 말하다. 즉 “전에”는 죄의 종이 되어 사망에 이르렀으나(20-21), “이제는” 하나님께 종이 되어 영생에 이르렀다(22)라고 전과 후를 확실히 구분하고 있다. 똑 같은 분기점 표현으로 바울은 에베소서 2:12절에서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라고 대조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와 같이 바울은 자신의 삶에서 체험한 획기적인 변화로,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 옛 사람 죄인과, 만난 이후의 새 사람 의인됨을 확실히 구별하여 옛 사람을 버리고, 예수그리스도의 종으로 새로운 생명 안에서 살아가기를 권면한다(엡 4:23-24). 바울이 특별하게 죄의 종으로 사망에 갇힌 옛 사람 ‘그때’와 하나님께 종이 되어 영생을 얻은 새 사람 ‘지금’을 확실하게 분리시켜 강조하는 것은, 그 옛사람은 첫 아담의 범죄로 말미망아 죄의 종으로 온갖 불의를 행하여 저주와 사망에 이른 상태였으며, 둘째 아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의 의로 말미암아 지금은 새 생명을 입어 하나님의 자녀로 잉태되었다는 은혜의 복음을 제시하기 위함이다. 즉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모든 사람이 죄의 종이 되어 사망이 왕노릇 하였지만, 지금은 의인이신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 안에서 하나님께 종이 되어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고 있다는 것이다(롬 5:17). 그러므로 죄의 종으로 살았던 그 옛 사람을 완전히 벗어버리고, 영생을 입혀주신 하나님께 종이 되어,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엡 4: 24)는 권면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결론으로,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6:21-22) 라고 선포한다.

의에 대하여 자유 하였느니라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18절);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20절).

바울은 복음의 핵심을 다른 각도에서 대조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특히 18절과 20절은 표현은 다르지만 똑 같은 원리를 말하고 있다. 즉 죄의 종으로 있었을 때에는 죄가 주인이었고, 의의 종으로 된 지금은 의가 주인이라는 말씀이다. 감사한 것은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그 결과 죄의 종에서 사망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섬기는 의의 종이 되어 영생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17-18절).

18절: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 옛 사람 죄인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었기에 죄가 더는 성도에게 주권을 행사할 수 없음으로 죄에서 해방 받았으며, 죄의 형벌에서 벗어나 자유 한 자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잉태된 새 생명은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 그 삶을 주관함으로 “의에게 종이 되었다.” 의인이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사랑의 줄로 하나로 매인바 되어 영원히 하늘나라 영생을 사는 의인의 삶으로 이끌려감에 순종하는 새 사람을 입었음으로 ‘의에게 종이 되었다’라고 선포한다.

20절: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 하였느니라” : ‘죄와 사망의 법’에 묶여 종으로 살 때에는 죄와 법이 너희를 주관함으로, 그 때에 너희는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와 간섭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유‘한 자 같으나, 그 결국은 은혜에서 떨어지고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갈 5:4) 사망에 이르렀다는 말씀이다. 바울은 여기서 ‘자유’를 죽음으로 표현하고 있다. 한마디로 너희가 죄의 종이 되어 죄에 대하여 산 자로 있었을 때, 하나님께 대하여는 죽은 자였기에 그것은 참 자유가 아니라 죽음으로 몰아넣는 사망이라는 역설적인 표현이다. 하나님의 은혜에서 벗어나 버림을 당한 하나님과 상관없는 죽음의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의에 대하여는 자유하였느니라”라고 표현한다. 같은 원리로 6:11절에서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 이를 다른 원리로 표현하면 ‘죄에 대하여 살아있을 때 하나님께 대하여는 죽은 자 (자유 한 자)였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바울은 여러 가지 대조적인 표현으로 복음을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절대적 의존자로 피조 된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여 객체로 있는 것을 ‘자유’라고 인식하지만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사단과 한 몸이 되어 진리를 대적하며 온갖 쓰레기 같은 죄악들을 행하는 죄의 노예가 되어 사망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죄의 노예가 된 인간은 부끄러움 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그리고 자유자재하게 죄를 짓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지도 또한 인정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인간은 그 본성이 더럽고 추악하고 부패하며, 마음이 강퍅하며, 오직 자신만을 사랑하는 ‘자아’에 굶주려 끊임없이 육신의 탐심과 욕망을 채워 닫는 곳이 바로 사망이다. 결론적으로, ‘너희는 지금 누구에게 속한 종인가? 죄의 종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종인가? 사망인가 아니면 영생인가?’를 질문하고 있다. 이르기를,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6:21-22).

의에 대한 자유함이 곧 구원이 없는 사망이다

바울은 왜 하나님과 상관없이 제멋대로 죄를 행하는 자에 대하여 “자유”라는 단어를 쓴 것일까?

바울은 일치하게 구원의 조건은 오직 은혜와 믿음이며,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복음의 본질을 명백하게 제시하고 강조하고 있다. 인간의 그 어떤 행함이 아니라, 오직 믿음, 즉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믿음으로 십자가 구원의 의를 믿는 믿음에 이르도록 이끌어주셔서 의롭다하시고 구원에 이르게 하심으로, 주권이 하나님에게 있음으로 성도를 ‘의에 이르는 종’이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바울이 제시한 복음의 진리를 멸시하고 대적하며, 또는 은혜의 복음을 자기들에게 이롭게 해석하는 왜곡된 자유주의와 방종주의가 등장한 것이다. “예수를 믿어서 구원도 받고 의인도 되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나 자유하게 되었으므로, 죄를 지어도 상관이 없으며 노력할 필요가 없다”라는 그릇된 신앙을 합리화 하여 세상과 타협하여 다시 죄의 종으로 돌아가려는 방종과 방탕 같은 조짐들이었다. 그리하여 바울은 그들을 향하여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라고 물은 것이다. 즉 너희가 율법을 행하여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지는 심판의 법 아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은혜의 복음을 모독하고 왜곡하여 율법의 매임에서 벗어나 육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음으로 ‘자유하다’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다시 죄의 종으로 돌아가는 사망이라고 선포한 것이다. “그 결과 얻은 유익이 무엇입니까? 지금 여러분이 부끄러워하는 것밖에 더 있습니까? 그런 생활의 결과는 영원한 죽음입니다”(21절 현대인 성경).

첫째, 율법의 매임에서 해방 받았음에도, 율법적 행위로는 구원이 없기에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킨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 무거운 멍에와 짐을 지고 자신의 의를 세우는데 열심을 부린다면, 그 상태가 바로 “죄와 사망의 법”(롬 8:2)에 묶인 종이 된 상태이며,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져 자유한 자 같으나 실상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사망에 이르렀으니 그것은 참 자유가 아니며, 율법의 의가 너희에게 아무런 유익을 가져다주지 못했다는 반박이다. 둘째, 자유와 방종을 외치는 자들아 너희는 그 추악하고 더러운 쓰레기 더미에서 구원받았음에도, 육신의 탐심을 위해 다시 자신을 죄에게 내어 준다면, 그것이 곧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하는 말이다”(벧후 1:22)함과 같다는 것이다. 야고보는 이와 같이 복음을 변질시켜 자기들의 유익에 적응하려는 자유 방탕을 외치는 무지한 자들을 향하여 허탄한 믿음, 죽은 믿음, 귀신들이 믿는 믿음이라고 직설적으로 비난한다. 그리하여 ‘의에 자유하다’고 외치는 너희들의 마지막은 자유가 아니라 “사망이다”6:20-21)라고 선포한다.

인간이 추구하는 자유란? 인간에게 자유란 있는 것일까?

인간이 추구하는 자유의 토대는 나의 탐심과 욕망을 채우는 ‘자아’에서 출발하며, 모든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나 죄의 종으로 살기 때문에 그 ‘종’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처음부터 자유란 존재하지 않는다. 성경에서 말하는 자유는 이 세상 육신에 속한 자들이 정의하는 어떤 외부적인 속박이나 억압이나 규제로부터 벗어나 내 의지와 선택과 힘을 발휘하여 이 세상에서 육신의 편리와 유익과 탐욕을 채우는 것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육신의 탐심은 구멍 난 항아리에 물을 채우는 것과 같이 절대로 채워지지 않는다. 인간은 타고 나면서 죄의 지배를 받는 죄의 종이기에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은 오로지 끝없는 탐심뿐이며 죄를 쌓고 있기 때문에 그 결국은 자유가 아니라 영원한 사망이다. 진정한 자유는 죄와 사망에서 벗어나는 해방이며,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으로만 이루어진다. 주님은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시기 위해 우리를 대신하여 죄의 멍에를 상징하는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오르셔서 십자가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면서 “다 이루었다"라고 선포하심으로 모든 죄의 사슬을 끊어버림으로 죄와 사망에서 해방 받는 영원한 자유를 주셨다.

첫 인간 아담이 하나님으로부터 자유하여 독립적으로 자신을 주장하는 신이 되기 위해 선택한 것이 바로 죄와 사망(선악과)이었다. 그렇게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죄와 사망에 묶인 종이 되었음으로 ‘자유’라는 것은 처음부터 인간에게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간 타락에서 명백하게 보여 주셨다. 인간은 타락한 본성으로 육신의 탐심과 욕망을 추구하는 것을 자유로 착각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속박으로 오인하고 스스로 생명의 말씀을 거역하여 하나님의 품을 떠나서 마귀가 지배하는 죄의 종이 되어 죄를 섬기는 자가 된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생명력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인간이 자유를 얻기 위하여 저지른 일이 바로 자기 형제를 죽이는 살인이었으며, ‘죄가 지배하는’(창 4:7 새번역) 종이 된 것이다(요 8:34). 죄의 종이 되었다는 말은 자유가 박탈당하고 그 어떤 선택이나 결정권이 없이 완전히 죄에게 소유된 존재가 되었다는 말이다. 죄의 종은 죄가 시키는 대로 사는 존재로 오로지 죄만을 생산하는 철저한 죄인이며, 그 삯은 사망이라고 선포하고 있다(롬 6:26). 진정한 자유는 죄와 사망에서 벗어나는 해방이며,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을 믿는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이 입혀지는 거듭남이다. 인간은 예수그리스도에게 속하여 그분의 종이 되어 그분의 생명력으로 살아갈 때만이 존재가 되고 생명이 되며 가장 행복한 영생의 자유를 누릴 수가 있다.

그러므로 자유는 인간에게 선택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주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에게 있음을 제시하셨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 8:36)라고 오직 예수그리스도 안에서만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선포하셨다. 이를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라고 권고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케 하시는 분은 오직 우리를 이 세상 죄의 종에서 사망의 지옥에서 구원하여 주신 우리 주가 되시는 예수그리스도 한분뿐이다. 그리하여 주님은 자신을 가리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 즉 ‘‘너희가 내 말에 거하여 진리를 아는 것이’ 곧 자유이며, 그 자유는 인간의 노력과 행위로 의지로 원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자유케 해야 참으로 자유하다’는 말씀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함을 받은 자이며, 하나님의 자녀로 하늘나라의 유업을 이어받은 자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진정한 자유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6:22)라고 선포한 것이다.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21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바울은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19절) 그때에, 즉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20절), “너희가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라고 묻고 있다. 너희가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의 의와 상관없이 ‘자유’한 자 같았으나, 오히려 죄의 종이 되어 육신의 탐심과 욕망으로 온갖 불의와 온갖 추악하고 더러운 열매를 맺지 않았는가를 상기시킨다. 그 죄의 열매에 대하여 바울은 1:21-31절에서 이미 상세하게 나열하고 있다.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며,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이 땅의 썩은 것들을 섬기며, 율법을 악용하여 자신들의 이름을 높여 영광을 갈취하는 데에 열심을 부려 하나님의 은혜를 욕되게 하였다고 지적한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 하였느니라”(롬 10:3). 인간은 온갖 불의를 행하여 쓰레기 같은 죄악들을 쏟아내어 생명을 파괴하고 죽이는 일로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켜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고 있었다고 유대인의 죄악과 이방인의 죄악들을 사정없이 지적하고, 유대인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고, 이방인들은 율법 없이 망한다고(롬 2:12)선포한 것이다.

그럼으로 너희들이 의롭다고 자랑하고 구원에 이른다고 자고한 율법적 행위로 쌓아놓은 그 공로와 업적과 같은 열매들이 과연 죄와 사망에서 당신을 구원하기에 무슨 유익이라도 되었는가!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세우기에 족한 것들이 아닌가! 너희 육체에서 나오는 열매는 사망에 이르는 썩은 열매라는 것이다.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열매만이 영생에 이르게 됨을 제시한다. 죄의 종 되어 죄의 지배 하에서 행하여진 모든 것들은 악한 열매임을 주님은 유대 율법주의자들을 향하여 말씀하셨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마 12:34-35).

‘사망’이란, ‘영생’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사망이란, 생명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하여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져 나가 객체가 되어 그 영이 죽고 육신으로 사는 자가 되어 육이 원하는 탐심으로 모든 면에서 완전히 타락한 범죄를 말한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찌라”(겔 18:20)라고 선포하셨고, 바울은 “죄의 삯은 사망이다”라고 일치하게 선포하고 있다. 첫째, 인간이 처음부터 흙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인간의 본체가 생명이 없는 죽은 흙이며; 흙을 입은 육신이 생령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범죄로 다시 흙으로 되돌림을 받은 ‘죽음’이 선포되었으며,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 곧 죄이며 사망임을 제시한다. “이는 네가 땅에서 취하여졌기 때문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죽은 흙으로 만드셨다는 것은, 장차 흙으로 만들어진 육은 ‘죽음’으로 삭제하시고, 자신의 영으로 새 생명의 창조를 일으켜 당신과 하나가 되는 아들과 신부로 영원히 함께 사시겠다는 의도였음을 언약으로 계시해 주고 있다. 즉 흙 안에 생명의 씨를 뿌려서 당신의 아들로 잉태되는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이었다.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얻으리라"(창 22: 17-18). 바울은 갈 3:16에서 아주 명확하게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씨’가 바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이심을 확실히 밝히고 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자신을 한 알의 씨로 묘사하시고 그 씨가 죽어야 만이 영원히 죽지 않는 새 생명이 잉태됨을 제시하셨다. 흙은 생명을 잉태하는 원동력을 가지고 있다. 오직 생명의 토대인 흙만이 씨를 받아서 생명을 잉태할 수 있다. 하나님 아버지는 장차 죄로 죽어 있는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려고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흙을 택하셔서 인간을 만드셨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씨 뿌리는 비유에서 우리를 밭이라하시고 자신을 생명의 씨로 묘사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육은 무익하며 영이 실상임을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바울은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8)라고 정확하게 육의 본능을 지적하고, 그러므로 인간의 육 자체가 바로 죄와 종이며 그 결국은 사망이다고 선언한다(6:16, 22-23). 이르기를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셨느니라“(고전 15:45).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처음부터 흙으로 무익한 육을 만드시고, 이 땅에 거처를 정하시고, ‘선악과’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모든 사람을 죄 아래 가두어 두시고, 육적 ‘자아’를 추구하는 본능을 드러내게 하시고, 그 결국을 ‘사망’으로 정하셨다. 바울은 이를 하나님의 지혜와 복음으로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2-33). 인간은 타락으로 모든 것을 잃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의 극치에 도달한 구원과 영생을 얻는 은혜에 은혜를 더한 축복이 되였고, 하나님의 의와 영광에 천하에 나타나고, 복음이 땅 끝까지 확장되었음으로 바울은 이를 ‘지혜’라고 말한다. 또 이르기를,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롬 5:20-21).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23절)

영생이란?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에게 생명이 무엇인지를 설명하여 주시기 위해, 인간을 만들 때 이 땅의 먼지로 무익한 육체를 만드시고 육체에 하나님의 ‘숨, 호흡’을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셨다. 생명은 오직 하나님의 것이며, 인간은 오로지 하나님의 생명력으로만이 살 수 있는 존재이며 생명은 하나님의 주관이심을 나타내셨다. 그리고 그 보이지 않는 생명이 무엇이며, 어떻게 유지가 되는지를 설명하여 주시기 위해 선악과를 먼저 주셨다. 그 선악과에 한 계명을 붙여주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곧 생명이며, 그 생명의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만 생명이 유지됨을 계시하시고 알게 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이 곧 생명과 능력임을 천지 창조에서 먼저 알게 하심으로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 곧 죄이며 사망임을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그 죄와 사망에 놓여 있는 죄인을 구원하시는 은혜의 복음을 설명하시기 위해,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으로 택하시고, 무엇이 죄이며, 무엇이 심판인지를 알게 하는 율법을 주시고, 그 율법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가르쳐 주심으로, 죄인은 오로지 십자가 은혜로 말미암아 십자가 구원의 의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과 영생을 얻는 의가 됨을 제시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없는 생명으로 우리를 잉태시키기 위하여, 그분의 본체인 성령으로 잉태하셔서 근본적으로 죄의 유전을 받지 않으셨기에 그분의 생명은 태초부터 영원을 사는 죄와 전혀 상관없는 영생임을 제시하셨다. 그러므로 그분의 영으로 태어난 우리도 그리스도를 따라 죄와 무관하며, 그분의 의의 생명으로 의인으로 태어났기에 영으로는 죄를 짓을 수도 죄인이 될 수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로서 난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요일 3: 9). 그러므로 육으로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롬 6:11), 영으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자"(롬 6:11)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 거하므로 영으로 죄를 짓을 수가 없다는 말씀이다. 의인은 오직 하나님의 의로 살아가며, 다시는 죄인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즉 우리의 영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기에 하나님께 속한 자는 그분의 속성을 따라 죄와 상관없이 영원을 사는 자가 되었다. 이를 바울은 “하나님의 은사”라고 말하는 것이다. 아무것도 한 것 없이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홀로 십자가에서 구원을 성취하여 주시고 불가항력적 은혜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셔서 새로운 피조물로 잉태시켜 주신 것이기에 “은사(선물)"이다. 이르기를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롬 8:13).

그러므로 영생을 얻은 자는 죄인으로 살던 육체가 삭제되어 없음으로, 하나님의 의로 사는 자이며, 이를 바울은 “의에 종이 되었다”라고 완전히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임을 선포한 것이다. 이제 나는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탄생된 그분에게 속한 생명이기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이 시작되었음을 바울은 명백하게 제시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 20). 예수그리스도의 영으로 잉태된 자는 땅에서 난자가 아니요 하늘에서 난 자이다. 그러하여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너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요 17: 14)이라고 말씀하셨다. 즉 그분은 죄가 없으신 의로우신 분이시기에 그분의 영으로 거듭난 자는 새 생명을 가진 ‘의인’이며 그 열매는 ‘영생’이다.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22절). 영생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누리는 하늘나라 삶이며, 그 삶은 죄와 죽음과 고통과 눈물이 없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의와 기쁨과 평강으로 충만한 예수그리스도 사랑 안에서 누리는 생명이다. 하나님은 그 영생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담에서 우리에게 선물(은사)로 주셨으며 그 선물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이 소유하게 된다.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