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으로 읽는 아버지의 마음

하나님의 열심 / 영의 강건함을 위하여 겪는 고난과 시련 /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다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2025. 5. 10. 05:02

영의 강건함을 위하여 겪는 고난과 시련

하나님은 창세전 세우신 뜻대로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당신의 의와 선과 사랑을 천하에 나타내시며, 우리 영의 온전함을 위하여 육의 고통과 질병과 악한 것과 죽음을 있게 하셨다. 당신의 영만이 영원한 실상임을 나타내시기 위해서는 허사인 육이 필요하며, 영생을 나타내시기 위해서는 죄와 죽음이 필요하며, 선을 이루시기 위해서는 악한 것들이 주는 육의 고통과 고난과 시련이 필요한 것이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약 1:3).

진주를 보자. 진주가 사람들에게 사모와 아름다움을 과시할 수 있는 것은 오랜 시간의 시련을 거쳐서 고통과 아픔을 이겨내는 인내심 때문이다. 조개는 외부에서 쳐들어오는 모래와 이물질 때문에 아픔의 고통을 겪으면서 끝까지 참는데서 더디어 아름다운 진주를 만들어 낸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난 자는 하나님의 자녀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다듬어 가는 과정에서 조개처럼 아픔과 고통을 겪게 된다. 비록 육의 고통과 고난으로 몸이 찢어지는 것 같고 살 소망까지 잃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의 자기부인과 자기 죽음의 십자가 삶을 한마디로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로 표현한 것이며,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 이니라”(눅9:23)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나의 반석 되시며 나의 피난처가 되시며 방패요 목자가 되시며 나의 구원자이신(시 18:2) 그분 안에서 나의 영의 유익을 위하여 겪어야 하는 일들이다. 그 어떠한 고난과 시련이 있어도 그분은 우리를 꼭 붙들고 계시며, 참고 견딜 수 있도록 인내심과 격려를 주시며, 환경을 초월하여 모든 일에 순종으로 자기 부인의 십자가 삶으로 이끌고 가시며, 하늘나라를 소망하는 찬송과 평강과 기쁨과 감사가 터저나오게 하신다.

우리는 마치 나무와 같은 존재이다. 추운 겨울에는 잎사귀가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 남아있는 것이 죽어있는 것 같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인다. 하지만 나무는 땅속에 깊이 묻혀 있는 왕성한 뿌리를 가지고 있기에 그 어떤 추위도 눈보라 속에서도 꺾기지 않는 생명력을 가지고 자신을 다시 소생시키는 봄을 기다린다. 햇빛과 비와 온기를 주는 봄이 오면 나무들은 다시 소생하여 파란 잎을 내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다. 우리는 세상에서 살면서 앙상하고 부러지고 약하고 죽은것 같은 처치에 있지만, 예수님의 뿌리에 접붙여 있기 때문에 절대로 꺽기지 않는 왕성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우리를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로 표현하셨다. 고난과 시련은 또한 우리가 아끼고 제일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을 앗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고난을 통하여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 줄기로 하나님과 하나로 묶여 있기 때문에 그 고난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입혀주신다. 고통과 역경은 우리를 항상 깨여있게 하며, 자기 부인의 십자가 삶을 지향하게 하며, 진리의 말씀을 갈망하게 하며, 모든 일에 순종으로 받아들이는 삶으로 정착되어 간다.

하나님의 열심: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다.

거듭난 자는 거듭나는 순간부터 여태껏 살아온 자신의 삶이 아버지의 계획과 의도에 따라 움직여 왔음을 깨닫게 된다. 즉 모태에서부터 택정을 받아 하나님의 믿음으로 이 세상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았으며, 하나님의 은혜로 새 생명을 입어 하늘나라로 이끌려 감을 깨닫게 됨으로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며, 진리의 말씀 속에서 그분이 진정 내 아버지가 되심을 깨닫게 되며, 그분의 의로운 인도에 자신을 부인하는 순종을 지향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가기 싫어도 가야 하는 길이며 반항할지라도 하나님은 기어이 자신의 믿음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시며 우리를 통하여 자신의 뜻을 결코 이루신다.

모세를 보라. 모세가 믿음이 충만하여 지도자의 탁월한 자질을 갖추어 있었기에 부른 것이 아니다. 그는 거칠고 분노를 참지 못해 사람을 죽인 자였다. 그리고 40년이라는 세월 동안 세상과 격리된 환경에서 양을 치는 밑바닥 생활을 하였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모든 것을 포기한 자이며, 자기의 가치와 정체마저 잃어버린 상태에 있을 때, 80년 세월에서 한 번도 찾아와 주신 적이 없었던 하나님께서 갑자기 모세를 부르시고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을 떠맡기셨다. 모세에게는 황당한 일이지만, 하나님은 이미 모태 중에서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 택하셨고, 80년이라는 긴 세월에서 모세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방식으로 비밀리에 장차 이스라엘 민족을 애급에서 이끌어 낼 위대한 지도자로 다듬어가시고 훈련시키셨다. 80년 인생에서 모세는 하나님을 모르는 세월을 보냈다고 말할 수 있다. 한 번도 하나님을 만난 적도 대화한 적도 없기 때문이다. 비록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시지 않으셨지만, 모세의 인생은 처음부터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주관하시는 인생이었다.

그러므로 모세가 거절하든 반발하든 상관없이 상의가 아닌 명령으로 설득하신다. 하나님의 명령은 모세의 현 상황과 너무나 빗나가 있었기에 모세로서는 전혀 믿어지지 않는 일이며 상상도 안 되는 일이다. 바로 왕에게서 도망하여 겨우 목숨을 건져 산골짝에서 40년 동안 홀로 양만 상대해온 양치기가 어찌 애급 왕 앞에 다시 설 수가 있으며, 250만 명에 넘는 민족을 애급 왕으로부터 이끌어 낼 수가 있단 말인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기에 모세는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세가 원하든 안 하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주권으로 모세를 이끌어 가신다. 일을 하시는 분은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시기 때문이다. 모세는 이성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지 않았지만 그분의 말씀을 어길 수가 없음으로 그분이 시키는 대로 40년 동안 양을 치든 목자의 생활을 접고 나이 80세에 도망 나왔던 지겨운 애급 땅으로 다시 돌아가야만 했다.

애급이라는 환경과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싸우시는 하나님과 바로 왕 간에 일어나는 10 가지 재앙이 애급인에게 이르는 하나하나의 사건 속에서, 모세는 자신의 몸으로 친히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과 인간으로는 할 수 없는 기적적인 사건들을 체험하면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전지전능하심과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심을 비로소 마음에 새기게 된다. 하나님과의 빈번한 교제 속에서 모세는 더디어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며 자신이 하는 일이 아니며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홍해 앞에서 아우성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기를, “너희는 두려워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급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 지니라”(출 14:13-14). 모세는 영안이 열려 하나님이 친히 애급 군과 싸워 홍해가 애급 군을 침몰할 것까지 예견하여 ‘다시는 애급 사람을 보지 못한다’ 고 선포한다. 모세는 이제 하나님의 마음을 읽고 장차하실 일까지 읽게 되는 영적 지도자로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자로 전환된 것이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과 모세의 사건에서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얼마나 열심히 일하시는가를 알게 된다. 그분은 모든 일을 자신의 계획대로 홀로 이루어가시며,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일은 오직 그분이 하시는 일을 지켜보고 시키는 말씀에 순종하며 그분을 온전히 신뢰하는 믿음뿐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일한다는 그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망령되게 하며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욕되게 하는 일이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만물을 자신의 뜻대로 주관하시고 통치하시는 전지전능하신 그분이 어찌 한낱 먼지와 같은 이 세상 지구에서 나오는 것들을 받을 수가 있으며, 이 먼지 속에서 사는 죄인에게서 나오는 거름 더미와 같은 배설물들을 어찌 공로와 업적과 의라고 인정해 줄 수가 있단 말인가! 어찌 그분이 죄인들이 토해놓는 쓰레기를 받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진토’ ‘거름더미’(삼상 2:8; 시 113:7) 라고 부르고 있다.

믿음은 나의 주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에 자유하다. 즉 내가 모색하고 내가 해야 하고 내가 책임을 져야 하는 일이 아니다. 그분이 내 안에서 하시는 일을 지켜보며 시키는 대로 순종하는 믿음뿐이다. 말씀하시기를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이니” (삼상 15: 22). "허물과 죄로 죽은"(엡 2:1)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으며, 죄인에게서 나오는 무덤 같은 쓰레기들을 하나님께서 어찌 받을 수가 있단 말인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분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나의 모든 죄를 도말하시고 나를 당신의 영으로 살려주신 그 은혜를 알고 깨닫는 믿음뿐이다. 즉 나의 그 어떤 의지나 생각이나 행위가 첨가되지 않는 그분의 선한 뜻과 말씀을 따르는 순종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이해할수가 없다. 모세가 그랬듯이, 이해되지 않더라도 불가능하다고 생각될지라도, 내 의지와 마음에 거슬리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 어떤 이유나 핑계 없이 받아들이며, 그분이 이끄시는 대로 나 자신을 맡기고 그분의 손을 잡고 따라가는 일이다. 내 삶의 주관자는 그분이시며, 나는 나 자신의 앞을 내다볼 수 없지만 그분은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나를 정해놓은 목표까지 이끌고 가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이 부르면 나오고, 가라면 가고, 있으라면 있고, 핍박하면 핍박받고, 멸시하면 멸시 당하고, 고통을 주면 고통을 받고, 시험을 주면 시험을 받고, 끌고 가면 끌려가고, 부르시면 순교하고, 그분이 허락하시는 모든 일을 선으로 받아들이면, 그것이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이며, 나에게는 영원한 구원과 생명이 되는 일이다. 바울이 복음을 위하여 굶주림과 옥에 갇힘과 매 맞음과 모욕당함과 온갖 죽음의 고통을 밥 먹듯이 당하였지만 오히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육체에 채우기를 기뻐한다고 고백하였다. 내가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내 안에서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옥중에서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라고 믿음을 고백하였다. “내가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이 훈련을 다 마치시면 내가 정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욥 23:10), 이 말씀을 깨닫고,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그분의 의로운 열심에 기뻐하며, 고난과 시련을 주시는 그분의 선한 뜻을 깨닫고, 순종으로 주시는 대로 받아들이며, 그분의 의로운 뜻이 나를 통하여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것이다.